어제 하루 아픈 목을 무리했더니 아침에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어쩐다지.
출근하면서 큰 스케치북에 글씨를 썼다.
-선생님 목이 아파서 소리를 낼 수 없어요. 조용히 책 읽어 주세요.
“선생님, 안녕하세요!”
우리 반 왈가닥 3총사 교실문을 열어젖히며 참새처럼 인사한다.
인사 대신 큰 스케치북을 갖다 들이대 보았다.
이게 무슨 일이가 싶어 모두 눈을 동그랗게 뜬다.
그리고 이내 더듬더듬 읽으며 씩 웃는다.
“많이 아파요?”
고개를 끄덕였다.
줄줄이 들어오는 아이들 코 앞에 글자를 들이밀었다.
능숙하게 읽어내는 녀석부터 한 글자 한 글자 짚는 아이, 옆 친구 도움을 받아서 이해하는 아이 한글 해득 수준차가 큼을 실감한다.
그래, 오늘은 글자 공부에 대한 동기부여를 해보자.
작은 모기 같은 소리로 얘기한다.
“선생님 오늘 많이 도와줘요. 너희들이 조용해야 내 목소리가 들려. 가끔씩 오늘은 글자로 이야기해볼 거야.”
아이들 목소리도 덩달아 작아진다.
“네. 선생님”
에너지 가득 삼총사도 오늘은 차분하다.
스케치북 글자와 수신호, 그리고 겨우 나오는 허스키 보이스로 의사소통을 한다.
국어시간, 어제 외운 동시도 다시 큰소리로 낭송해봤다.
실력이 늘었다.
한글 모음 두 번째 ‘야, 여’를 배웠다.
소리를 내보고 종합장에 순서대로 써봤다.
‘야’가 들어가 낱말도 찾아보고 ‘여’가 들어간 글자도 만들어 보았다.
그리고 다음 시간에 부를 ‘야’와 ‘여’가 들어간 동요 2편을 소개해본다.
수학 시간엔 교과서 부록에 붙은 1~9까지 숫자카드를 뜯어서 놀이를 해보려고 했다.
그런데 놀이는커녕 카드 뜯기부터 난관이다.
고학년 아이들은 순식간에 해내는 일이 1학년 아이들에겐 버겁다.
“선생님, 안 뜯겨요.”
“선생님, 찢어졌어요.”
“선생님, 어디에 숫자카드 있어요?”
“선생님, 도와주세요.”
그래 그래, 목소리가 안 나오니 몸이 더 바쁘다.
1~9까지 순서대로 놓아보고 읽어보고 써 본다.
가위바위보 카드 뺏기 게임도 해본다.
작은 소리에 나도 답답했지만 아이들은 더 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한마디 불평도 없이 걱정해주고 염려해줬다.
앞자리 앉은 친구는 나의 말을 큰 소리로 전달하는 역할도 했다.
기특한 녀석들.
“오늘은 옥상 운동장 가서 숫자 맞추기 달리기 해보자!”
함성이 터진다.
처음 가보는 옥상 운동장,
철문을 열어젖히니 또 감탄이 터진다.
“우리 학교에 이런 데가 있었네요.”
숫자를 1부터 9까지 뒤집으며 신나게 달리는 아이들.
30분도 안돼 땀을 뻘뻘 흘린다.
“우리 날씨 좋을 때 자주 오자.”
급식 시간 유난히 조용하다.
할 말이 있어도 멀리서 손짓으로 다 해결한다.
신기한 것은 나의 수신호가 다 이해되나 보다.
뭐든 고개를 끄덕끄덕.
진짜 알아들은 거 맞니?
밥 먹는데 **가 가만히 다가온다.
“선생님, 궁금한 게 있어요. 선생님은 아파도 왜 보건실 안 가요?”
아이고, 그게 궁금했구나.
너희들을 두고 보건실 가면 공부는 누가 가르치니.
교실 오는 길에 학교 안 미니 봄동산을 걸어본다.
“강아지똥 민들레 있어요.”
“선생님, 저거 며느리밥풀꽃 아니에요?”
배운 것들이 사방에 지천으로 보인다.
라일락 향기도 맡아봤다.
“진짜 냄새 좋아요.”
“오늘 달리기 모두 1등처럼 열심히 했으니 금메달을 줄게요.
금이 진짜 좋은 보석인 건 알지요? 집에 가져가서 고이고이 모셔둬야 해.”
가방에서 금메달을 꺼냈더니
“에잇, 또 속았다. 초콜릿이잖아요. 저번엔 피자 준다고 하더니 이번엔 금메달.”
“금메달 맞잖아. 집에 가서 깨물어봐.”
메달 받고 신나는 발걸음, 하교하는 뒷모습을 쳐다본다.
아이들이 봄 햇살 사이로 환히 빛난다.
멈춰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처럼
말을 줄이니
더 잘 보이고 더 잘 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