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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롱쌤 Jun 02. 2024

주목나무와 철쭉

태백산에서 만난 것들

봄이면 연례행사처럼 연분홍 철쭉을 봤다. 가깝게는 북한산, 사패산에서 조우하기도 하고, 남양주 서리산에서도 만났다. 하지만 올해는 어쩐 일인지 서울 근교 산행 시기를 놓쳐버렸다. 5월 중순에 찾은 소백산 철쭉도 냉해로 봉우리째 시든 모습만 보여줬다. 뭔가 아쉽고 서운한 마음에 강원도 태백산에서 마지막 기회를 잡아보기로 했다.       


사실 태백산은 겨울 눈꽃 산행의 대명사다. 지금껏 겨울에만 태백산을 서너 번 탔으니 눈만 감아도 그 절경이 어른거린다. 영하 십 도를 훨씬 웃도는 칼날 같은 추위엔 상고대가 멋졌고, 또 눈 온 뒤 순백의 설경이 최고였다. 하얀 눈을 배경으로 우뚝 솟은 주목나무를 끌어안고 감탄하던 날도 기억난다.   

   


태백산의 봄날은 어떨까.


새벽녘 동네 산악회 버스에 몸을 실었다. 지난 1월 한라산 산행 이후 처음이다. 10년도 더 된 인연이니 이제는 언제 찾아도 편안하다. 그간 뜸했던 나를 책망하듯 만나는 분마다 한소리 하신다.

“왜 그렇게 얼굴 보기 힘들어요?”

“학기 초라 바빴어요?”

“짝꿍은 어찌하고 혼자 왔어?”

‘죄송해요, 자주 올게요’라는 말로 인사를 대신해 본다.      


강원도 태백이 이렇게 멀었던가? 4시간 가까이 걸려 해발 900미터 유일사 주차장에 도착했다. 1500미터 넘는 고산이지만 시작 지점이 높아 한 시간이면 충분히 정상 장군봉까지 오를 수 있다. 하지만 끝없는 오르막의 연속이라 초반부터 힘들다. 한마디로 짧고 굵게 치고 올라간다고 보면 된다.       


하얀 설경을 자랑하던 태백산을 초록의 기운을 가득 받으며 출발했다. 초입부터 늘씬하게 쭉 쭉 뻗은 나무들이 등산로를 도열하고 있었다. 바람 솔솔 불어 시원한데 땀은 뚝뚝 떨어졌다. 이게 감기 기운의 식은땀인지 운동으로 인한 땀방울인지 분간이 어려웠다. 막힌 콧구멍이 뻥 뚫리는 걸 보니 태백산 산신령이 내 감기도 냉큼 가져갈 모양이다.      

겨울철 눈 속에 꽁꽁 감춰졌던 등산로는 실은 푹신한 흙길의 연속이었다. 나무 계단, 야자수매트 등 정비가 꽤나 잘 돼 있어 발걸음이 편했다. 산 중턱에서부터는 자로 잰듯한 납작한 돌판까지 놓여 이 무거운 걸 어찌 재단하고 깔았는지 감탄하며 걸었다.     

 

태백산의 상징은 뭐니 뭐니 해도 주목나무다. 보통 지리산, 설악산, 계방산, 소백산 등 고산 지역에서만 볼 수 있는 이 나무는 낮은 지역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희귀종이다. 수명이 줄잡아 1000년 이상을 살고 죽어서도 1000년 이상 아름다운 자태를 뽐낸다고 하여 ‘살아 천년, 죽어 천년’ 나무로 알려져 있다. 나뭇결이 빨개서 붉은 주(朱)를 써서 주목나무라고 한다.      

주목나무들이 등장한다면 태백산의 정상에 거의 왔다고 보면 된다. 살아있는 주목나무도 볼만하지만 나의 눈길을 잡아끈 것은 실은 죽은 주목나무다. 붉은빛도 잃었고 초록 이파리 하나 없는 고목이다. 하지만 특유의 미끈함과 간결함으로 위압감이 대단하다. 군더더기 하나 없는 단정한 모습에 경외감이 들 정도다. 계절 따라 피고 지는 무수한 생명들 가운데 당당히 뿌리박고 버티는 모습을 넋을 놓고 봤다. 기이하게 휜 나뭇가지를 뽐내기도 했고 온몸을 다 줘버리고 빈 구멍만 남은 모습도 처연하고도 엄숙했다. 고작 100년도 못 사는 우리가 주목나무를 제대로 알기나 할까.     

 

드디어 태백산 남쪽 봉우리 천제단에 도착했다. 원형제단으로 녹색 편마암의 자연석으로 정성스럽게 쌓인 곳에서 일부 산객들은 두 손을 모았다. 실제로 옛 우리 조상들은 이곳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고 하니 태백산은 신령스러운 산은 틀림없다. 나도 올라가서 절이라도 할까?     


그럴 때가 있었다. 작은딸이 고등학교를 자퇴 후 한창 방황할 때 절실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돌더미 앞에서 다. 자식을 향한 불안하고 걱정되는 마음을 산신령 앞에서 합장했다. 산사가 보이면 어김없이 들어가 부처님 앞에서 무릎 꿇었다. 그때는 등산을 하러 전국을 다녔는지 아님 전국의 절을 찾아 산을 올랐는지 헷갈릴 정도였다. 기도하고 합장하는 저분들은 부모로서 절박할까, 아님 자식으로서 간절할까? 그들의 마음이 하늘에 닿길 나도 빌어본다.

태백의 정상 장군봉서 내려다보이는 능선이 참 아름다웠다. 우리는 함백산과 운탄고도의 풍력발전기를 보며 도란도란 모여 앉아 점심을 먹었다. 산악회 회원들과 함께 하는 이 특별할 것 없는 소박한 점심이 난 마음에 든다. 부담 없이 도시락 싸서 좋기도 하지만 모아놓으면 훌륭한 밥상이 되는 것도 참 신기하다.      


산들바람 부는 정상에서  더 걸어보기로 했다. 문수봉으로 가는 능선길에서 드디어 연분홍 철쭉을 만났다. 봄바람에 하늘거리는 꽃을 한참을 쳐다봤다. 그 옛날 친정엄마가 춘천에서 일하던 아버지를 만나려고 연분홍 한복을 차려입은 딱 그 모습이다. 두 분의 젊고 다정했던 모습이 연분홍 옷자락과 함께 눈앞에서 흔들렸다. 아, 봄날의 연분홍 철쭉은 당신들을 향한 그리움이었구나.      

흐린 날씨와 비 예보로 살짝 걱정했는데 산행 내내 날씨가 좋았다. 정상에서는 시야가 좋아 사방이 탁 트였고 파란 하늘과 구름이  등산하기 제격이었다. 바람도 적당히 불고 하산길도 편안해 6시간 걸음이 짧게 느껴졌다. 당골로 하산 후 석탄박물관 앞에 주차된 버스에 탑승하니 그제야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태백산 산신령이 아니, 연분홍 철쭉과 우람한 주목나무가 우리를 보우하셨다!     


봄날의 태백산을 친정 다녀오듯 갔다 왔다. 몇 달 만에 나타나도 여전히 반겨주는 산우들과 함께한 걸음은 즐거웠다. 연분홍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엄마는 문수봉 능선의 철쭉처럼 활짝 웃었다. 생명을 다하였지만, 여전히 버티고 있는 주목나무는  아버지처럼 단단했다.


분명히 내 곁에 존재하는 당신들을 만나고 왔다.

연분홍 저고리를 입은 엄마와 햇볕에 새까맣게 그을린 아빠.1976년 강원도 춘천 소양강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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