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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롱쌤 May 27. 2024

다정함에 대하여

소백산 야생화

남편 고등학교 친구들의 등산모임을 꽤 따라 다녔다. 하지만 이번에는 안 가려고 했다. 나이 먹어서까지 남편뒤를 졸졸 따라다니는 게 자존심 상했다. 그런데 당일 새벽 4시에 거짓말처럼 눈이 딱 떠졌다. 에잇 이건 봄날의 소백산을 보라는 운명인게지.


이번 코스는 어의곡 탐방지원센터에서 시작해서 비로봉과 국망봉을 찍고 늦은맥이재를 거쳐 다시 어의곡으로 내려오는 삼각형 모양의 원점회귀 산행이다. 창원, 구미, 거창, 대전, 서울 등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남편의 친구들은 총 12명. 대부분은 작년 설악산 공룡능선서 봤던 얼굴들이다. 찍사로 따라왔다며 묻지도 않은 말을 해가며 18㎞의 대장정을 시작했다.      

저 사진찍어주러 왔어요!!!출발전 한 컷!

봄의 끝자락, 녹음이 우거진 산속으로 걸어 들어가자 공기가 상쾌했다. 바깥은 뙤약볕으로 따가웠지만, 그늘로 이어진 산길은 바람까지 불어 기분이 좋았다. 적당한 경사에 흙이 폭신폭신해 걷기가 편했다. 그런데 땀이 비 오듯 했다. 이래서 소백산이 좋다. 오르막인지도 모르게 걷지만 운동은 제대로 된다. 뚝뚝 떨어지는 땀을 손수건으로 닦으며 주위를 둘러봤다. 나만 힘들고 더운 게 아니었다.

 

산에 빠진 사람은 안다. 등산은 밀당의 고수와 꼭 연애하는 기분이다. 쉽지 않을 것임을 알고 오른다. 각오를 단단히 했지만 여전히 매순간 힘들다. 끝없이 이어지는 오르막에선 숨이 깔딱깔딱 넘어갈 것 같다. 포기해버려? 유혹이 슬그머니 고개 내밀 때면 평탄한 숲길을 펼쳐주며 마음을 살살 어루만져 준다. 그래, 바로 이맛이지! 새소리 들으며 행복을 만끽하는 순간, 가파른 길이 여지없이 나타난다. 한발 한발 계단을 힘겹게 오르며 아이고~ 곡소리 나온다. 그럼 또 이때다 싶은지 탁 트인 풍광과 시원한 바람 한 줄기 냅다 날려준다. 이 정도면 연애 100단은 저리 가라다. 나같은 순진한 사람은 산 중독돼 허우적거릴 수 밖에 없다.   

      

쭉쭉 뻗은 전나무 숲을 지나며 오늘도 어김없이 산과 사랑싸움중이었다. 이런 코스라면 하루 종일이라도 걸을 수 있겠다는 당돌한 말을 입밖에 꺼내자 가파른 계단이 나타났다. 다리에 쥐가 난 친구를 위해 속도를 조금 늦추는 일행들. 친구의 무거운 가방이 다른 친구들의 어깨와 어깨로 연쇄 대이동이 일어났다. 이런 배려는 보고 또 봐도 참 예쁘다. 놓칠 수 없다! 찰칵!    

 

두 시간을 오르자 하늘이 열리고 소백산 특유의 조망이 터졌다. 굽이굽이 포개진 산 능선들이 한폭의 그림같다. 그런데 어쩐지 이상했다. 철쭉이 만개해 붉은빛으로 가득해야 할 산등성이 우중충하다. 가까이 갈수록 이유를 알겠다. 피기도 전에 얼어 시들어버린 꽃봉오리들. 며칠 전 설악산에 눈이 왔다고 하더니 여기도 예외가 아니었나 보다.

“아이고, 망했네! 망했어. 올해 소백산은 볼 게 하나도 없겠어.”

절경을 기대하며 한껏 부풀었던 일행은 아쉬움과 안타까움에 탄식했다.

비로봉 정상에 올라 철쭉 대신 5월의 하얀 눈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평소 소백산의 정상은 바람으로 유명하다. 겨울엔 단 몇초도 버티기 힘들어 서둘러 하산하기 바쁜 곳이다. 그런데 오늘은 따사롭기 그지없었다. 정상 근처 풀밭에 앉아 봄눈을 바라보며 점심을 먹었다.  무릎이 안 좋아 유난히 힘들어했던 유섭씨, 배낭에서 2리터짜리 맥주를 꺼냈다. 저 무거운 걸 세 시간이나 짊어지고 오른 그의 다정함을 위하여 한 컷!.      


과일과 커피 등 맛있는 후식까지 먹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국망봉까지는 한 시간 반쯤 더 걸어야 했다. 원래 이 구간이 철쭉 터널로 기가 막힌 코스지만 오늘은 별 볼 일 없다. 그런데 그때! 일행의 눈길을 사로잡은 것이 있었다. 등산로에 수줍게 핀 작은 꽃이었다.


애기나리

“어머, 애기나리 꽃이네.”

꽃 박사 혜경 언니가 이름을 불러주기 시작했다. 요건 ‘연영초’, 저건 ‘풀솜대’…. 그때부터 작고 귀엽고 앙증맞은 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우리는 연신 허리를 숙여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었다.

“별처럼 생긴 저건 무슨 꽃이야?”

“개별꽃!”

개별꽃

십수 년 산을 누볐지만, 오늘처럼 땅바닥에 붙어있는 풀꽃을 자세히 들여다보긴 처음이다. 진달래과 연분홍 철쭉에만 마음을 빼앗겨 들꽃의 존재조차 모르고 걸었다. 그런데 오늘은 이 수수한 것들이 "나도 여기 있소!"라고 시위라도 하는 듯 했다. 예고도 없이 불어닥친 강추위를 어찌 견뎌내고 꽃을 피웠는지 신기하고 대견할 따름이었다.  

국망봉까지 이어진 소백의 능선은 그야말로 야생화 천지였다. 다섯 개의 하얀 꽃잎에 핑크 점이 박힌 별 모양의 ‘개별꽃’을 쳐다보고 있노라면 저쪽 풀숲에선 손톱보다 작은 노란 ‘양지꽃’들이 자기들도 봐주라 손짓했다. 길쭉한 보라색 꽃 ‘벌깨덩굴’이 으스대고, 핑크솜 모양의 ‘엉겅퀴꽃’도 고개를 들었다. 이파리 하나 없는 ‘큰앵초’는 어찌나 사랑스러운지 절로 탄성이 터졌다. 수줍게 고개 숙인 ‘할미꽃’ 도 소곤소곤 말을 걸었다.

할미꽃
엉겅퀴꽃
큰앵초

“언니, 이 꽃 이름은 뭐예요?”

“은방울꽃!”

하얀 방울이 대롱대롱 달린 게 방울꽃 맞네, 맞아. 이름도 어쩜 이렇게 잘 지었을까 싶다. 작고도 앙증맞은 야생화를 봄날의 주인공으로 눈에 자꾸 담았다.     

은방울꽃

드디어 두 번째 봉우리 국망봉에 도착했다. 슬슬 다리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이 지점부터는 평탄한 하산길만 남았겠지. 물 한 병 달랑 들고 왔던 현진씨가 물을 찾았다. 더운 날 산에서 물 얻기는 하늘의 별 따기다. 그런데 역시 친구가 좋다. 여기저기서 물병을 건넸다. 그 모습도 앵글에 담았다.       


늦은맥이제에서 원점 어의곡 탐방지원센터까지 하산길이 만만찮았다. 돌멩이가 많은 너덜길이 끝도 없이 이어져 자칫 방심하면 넘어질 것 같았다. 산길에서만 6시간을 넘기자 점점 일행들은 입을 닫았다. 즈음 수진 언니의 가방에서 시원한 방울토마토가 나왔다. 그리고 상헌 씨의 가방에서 직접 농사지은 사과 열두 알이 쏟아졌다. 달콤하고 시원한 과일을 먹으며 생각했다. 사람도 참 인정스럽구나.

양지꽃

“머리 위 나무요.”

“흙 미끄러워요.”

뒤따라오는 이가 혹여 다칠까 습관처럼 외치는 나.

“신경 쓰지 말고 가이소.”

쾍!! 저 무뚝뚝한 희백씨. 누가 경상도 남자 아니랄까 봐. 그런데 이상하게 맘이 상하지 않았다. 딴 데 신경 쓰지 말고 앞만 보고 조심히 가라는 배려의 말처럼 들렸다. 다정한 풀꽃과 자상한 사람들에게 중독돼 뭐든 다 사랑스럽게 보이는 게 분명했다.     

 

지루한 하산길에 물소리가 없었더라면 정말 힘들었을 것이다. 계곡에서 발도 씻고 손도 씻으며 피로를 풀어가며 어느덧 원점으로 돌아왔다. 아침 9시에 시작한 등산이 오후 5시가 넘어서 끝났다. 장장 8시간이 걸렸다. 원점회귀 지점에서 단체 사진 한 컷 다시 찍었다.      

화려한 봄꽃을 보러 간 소백산에서 들꽃을 선물로 왕창 받았다. 하얀 눈을 뚫고 마침내 꽃을 피운 풀꽃들!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라는 어느 책 제목처럼 꽃도 사람도 다정함이 전부다.


다정한 사람들과 소백산 봄 소풍을 다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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