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산을 오르며 엄마가 들려주는 인생 이야기
산 꼭대기에 올라선 기분은 어떨까.
뿌듯하고 가슴 벅차 표현을 할 수 없을 정도 아니냐고?
아니!
네가 실망할지도 모르겠지만
겨울산의 정상은 칼바람과 강추위에 절경을 오래 감상할 여유가 전혀 없단다.
사진을 많이 찍고 싶어도 장갑을 벗으면
손가락이 찌릿찌릿해지고 얼얼해져
후다닥 몇 방 찍고 하산길로 접어드는 게 보통이야.
그나마 오늘은 운이 좋았어.
늘 안개와 구름으로 희뿌연 산 정상이
눈부시게 맑은 날씨 덕분에
선명한 백록담의 모습을 볼 수 있었거든.
그 한 가지 만으로도 감동이었어.
네댓 시간을 걸어 올라온 대가 치고는 너무 허탈하고 허무하다고?
지나 보니 사는 게 다 그렇더라.
십여 년 공부의 레이스 끝 대학 합격의 기쁨은 한 달도 못 갔잖아.
몇 개월 준비한 재즈 공연도 순식간에 끝나고
며칠을 준비한 면접도 10분 만에 종료되는
그런 허탈한 기분과 비슷하지 않을까?
인생의 정점은 언제일까?
음~~ 엄마의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사춘기 두 딸과 우당탕탕 거리며
치열하게 하루를 보내던 때가 아닌가 싶다.
몸과 마음이 사정없이 휘청여도
뒤돌아보면 훌쩍 자란 너희들의 모습만으로도 흐뭇했던 그때가
인생의 황금기가 아니었나 싶다.
백록담과의 짧은 만남 후 관음사 방향 하산길로 접어든다.
바람을 등지고 햇빛 내리쬐는 평온한 내리막길이
엄마는 참 마음에 든다.
사실 산을 오를 때는 꼭대기만 쳐다보고 앞만 보고 걸었거든.
하지만 하산길 여정은 여유롭고 행복하다.
오늘도 참 잘했다는 안도감이 들면서 하늘도 나무도 돌멩이도 새삼 사랑스럽다.
눈폭탄 한라산도 멋지지만 속살 훤히 드러내는 나무들과 함께 하는 이런 날도 좋다.
나뭇잎 하나 달지 않았지만 강인한 생명력의 표상을 마음속에 담고 또 담는다.
나이 50줄에 올라선 엄마가 여유로워진 이유 이해할 수 있겠니?
아마 60줄이 되면 더 편안해지고 넓어질 거라는 기대 해본다.
어깨를 짓누르던 배낭의 무게도 이제 줄여하는 때가 왔어.
햇볕 잘 들고 바람 안 부는 전망 좋은 곳에 자리를 잡았다.
아픈 다리 제멋대로 펼치고 앉았다.
젊은 날엔 상상도 못 할 포즈다.
배낭에서 끝도 없이 물건이 쏟아져 나온다.
바람막이와 오리털 파카, 장갑, 양말까지.
뜨끈한 컵라면과 빵조각을 한 입 베어문다.
칼로리 폭탄 양갱과 달달한 커피 한잔의 사치도 부려본단다.
그깟 뱃살 처져보라지.
빼가 빵빵해졌다.
땀이 식으며 순식간에 한기가 느껴져.
그럴 땐 옷을 하나씩 껴입고 양말도 바꿔 신으며 보온에 신경을 쓴다.
감기도 부상도 대부분 오르막보다는 내리막길에서 얻는단다.
산행의 마지막까지 긴장을 너무 늦춰서도 안 되는 이유지.
어느 날 네가 그런 말을 했지?
‘유종의 미’를 생각해야겠다고!
인턴 6개월의 마지막에 느슨해지는 자신을 보고 한 말이었지?
맞아, 늘 끝맺음이 좋아야 다음번 첫 단추도 잘 채울 수 있는 거란다.
실무경험도 익혔지만 사람을 상대하는 법, 업무를 대하는 자세
이런 것들을 더 많이 배웠다는 말이 기억에 남는구나.
잘하고 있어 우리 딸!
작년엔 아빠랑 단 둘이 올랐던 한라산을 올해는 동네 오랜 지인들과 함께했다.
산행의 즐거움을 혼자만의 시간과 고요한 걸음을 꼽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엄마는 주변 사람들과 함께 하는 산행이 더 즐겁더라.
비슷한 듯 다른 삶과의 만남은 나를 되돌아보게 하고
앞길을 비춰주기도 하거든.
사람에 대한 호기심은 너 삶을 더 풍성하게 할 거라고 믿어.
이번 산행에서 최고의 화젯거리는 띠동갑 선배의 퇴직이었어.
여전히 에너지 넘치는 선배 부부의 삶이 존경스럽고 부러웠단다.
엄마도 아빠도 우리만을 위해 시간을 쓸 수 있는 때가 올까?
열심히 살아온 삶의 내리막길을 그려보고 미소 지어 본다.
3시간이 넘는 하산길의 고비를 꼽으라면 마지막 1시간이란다.
아래로 내려올수록 질척한 길이 걷기 힘들고
풍경도 볼 게 없어 아주 지루하거든.
인내심 바닥난 아빠가 작년에 엄마를 버리고 도망간
마지막 코스를 터벅터벅 걷는다.
보폭 짧고 어기적거리는 엄마가 얼마나 답답했으면 줄행랑을 쳤겠나
이해가 되다가도 또 괘씸한 마음이 든다.
인생의 내리막길에서는 추억을 곱씹는 재미도 크다고 하더라.
추억이 많은 사람이 부자라는 생각을 늘 하는데
우리 딸들도 부자가 됐으면 좋겠다.
8시간의 한라산 산행이 끝났다.
무거운 배낭을 휙 던졌다.
어깨가 홀가분하다.
다리는 땡땡하고 발바닥은 불이 나서 온몸은 만신창이지만
마음만은 날아오를 것 같다.
함께 걸어준 모든 분께 눈물 날 정도로 고마운 마음이 들더라.
아주 먼 훗날 이야기지만
인생의 마지막의 순간 이런 기분이 아닐까.
‘세상 소풍 한 번 잘했다.
함께 해서 즐거웠고 행복했다.
그리고 고마워.’
현아,
스물다섯 살은 인생의 가장 찬란한 시절이란다.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은 불안함에
혹여나 걱정과 우울이 가득하지 않을까 싶어 이런저런 얘기가 많았구나.
백문이불여일견이고 백견이불여일행이라고 했지?
너의 한걸음 한걸음을 매 순간 응원한다.
우리 딸이 가장 듣고 싶은 말,
잘하고 있어~!!
라는 말과 함께
이만 엄마 한라산 이야기는 마칠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