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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롱쌤 Jan 25. 2024

취준생 딸에게(2)

한라산을 오르며 엄마가 들려주는 인생 이야기 

한라산 정상석 인증샷을 찍기위해 줄 서 있는 등산객들.  사실 지금 이순간 바람과 추위가 엄청나다. 
산 꼭대기에 올라선 기분은 어떨까.

뿌듯하고 가슴 벅차 표현을 할 수 없을 정도 아니냐고?

아니! 

네가 실망할지도 모르겠지만 

겨울산의 정상은 칼바람과 강추위에 절경을 오래 감상할 여유가 전혀 없단다. 

사진을 많이 찍고 싶어도 장갑을 벗으면 

손가락이 찌릿찌릿해지고 얼얼해져

후다닥 몇 방 찍고 하산길로 접어드는 게 보통이야. 

그나마 오늘은 운이 좋았어.

늘 안개와 구름으로 희뿌연 산 정상이 

눈부시게 맑은 날씨 덕분에

선명한 백록담의 모습을 볼 수 있었거든.

그 한 가지 만으로도 감동이었어. 

네댓 시간을 걸어 올라온 대가 치고는 너무 허탈하고 허무하다고?

지나 보니 사는 게 다 그렇더라

십여 년 공부의 레이스 끝 대학 합격의 기쁨은 한 달도 못 갔잖아.

몇 개월 준비한 재즈 공연도 순식간에 끝나고

며칠을 준비한 면접도 10분 만에 종료되는

그런 허탈한 기분과 비슷하지 않을까?

인생의 정점은 언제일까?

음~~ 엄마의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사춘기 두 딸과 우당탕탕 거리며

치열하게 하루를 보내던 때가 아닌가 싶다. 

몸과 마음이 사정없이 휘청여도 

뒤돌아보면 훌쩍 자란 너희들의 모습만으로도 흐뭇했던 그때가 

인생의 황금기가 아니었나 싶다.      


백록담과의 짧은 만남 후 관음사 방향 하산길로 접어든다. 

바람을 등지고 햇빛 내리쬐는 평온한 내리막길이 

엄마는 참 마음에 든다. 

사실 산을 오를 때는 꼭대기만 쳐다보고 앞만 보고 걸었거든.

하지만 하산길 여정은 여유롭고 행복하다.

오늘도 참 잘했다는 안도감이 들면서 하늘도 나무도 돌멩이도 새삼 사랑스럽다.

눈폭탄 한라산도 멋지지만 속살 훤히 드러내는 나무들과 함께 하는 이런 날도 좋다

나뭇잎 하나 달지 않았지만 강인한 생명력의 표상을 마음속에 담고 또 담는다

나이 50줄에 올라선 엄마가 여유로워진 이유 이해할 수 있겠니?

아마 60줄이 되면 더 편안해지고 넓어질 거라는 기대 해본다.     

구름이 산 아래에 뭉게뭉게 떠 있다. 

어깨를 짓누르던 배낭의 무게도 이제 줄여하는 때가 왔어.

햇볕 잘 들고 바람 안 부는 전망 좋은 곳에 자리를 잡았다.

아픈 다리 제멋대로 펼치고 앉았다. 

젊은 날엔 상상도 못 할 포즈다.  

배낭에서 끝도 없이 물건이 쏟아져 나온다. 

바람막이와 오리털 파카, 장갑, 양말까지.

뜨끈한 컵라면과 빵조각을 한 입 베어문다. 

칼로리 폭탄 양갱과 달달한 커피 한잔의 사치도 부려본단다.

그깟 뱃살 처져보라지. 

빼가 빵빵해졌다.

땀이 식으며 순식간에 한기가 느껴져. 

그럴 땐 옷을 하나씩 껴입고 양말도 바꿔 신으며 보온에 신경을 쓴다. 

감기도 부상도 대부분 오르막보다는 내리막길에서 얻는단다.

산행의 마지막까지 긴장을 너무 늦춰서도 안 되는 이유지.

어느 날 네가 그런 말을 했지?

‘유종의 미’를 생각해야겠다고!

인턴 6개월의 마지막에 느슨해지는 자신을 보고 한 말이었지?

맞아, 늘 끝맺음이 좋아야 다음번 첫 단추도 잘 채울 수 있는 거란다. 

실무경험도 익혔지만 사람을 상대하는 법, 업무를 대하는 자세 

이런 것들을 더 많이 배웠다는 말이 기억에 남는구나. 

잘하고 있어 우리 딸!     

삼각봉 대피소에서 푹 주저앉아 컵라면을 먹고 있다. 꼭 이런 꼴로 먹었어야 할까. 

작년엔 아빠랑 단 둘이 올랐던 한라산을 올해는 동네 오랜 지인들과 함께했다.

산행의 즐거움을 혼자만의 시간과 고요한 걸음을 꼽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엄마는 주변 사람들과 함께 하는 산행이 더 즐겁더라

비슷한 듯 다른 삶과의 만남은 나를 되돌아보게 하고 

앞길을 비춰주기도 하거든.

사람에 대한 호기심은 너 삶을 더 풍성하게 할 거라고 믿어.

이번 산행에서 최고의 화젯거리는 띠동갑 선배의 퇴직이었어.

여전히 에너지 넘치는 선배 부부의 삶이 존경스럽고 부러웠단다.

엄마도 아빠도 우리만을 위해 시간을 쓸 수 있는 때가 올까?

열심히 살아온 삶의 내리막길을 그려보고 미소 지어 본다.      

3시간이 넘는 하산길의 고비를 꼽으라면 마지막 1시간이란다. 

아래로 내려올수록 질척한 길이 걷기 힘들고 

풍경도 볼 게 없어 아주 지루하거든.

인내심 바닥난 아빠가 작년에 엄마를 버리고 도망간 

마지막 코스를 터벅터벅 걷는다. 

보폭 짧고 어기적거리는 엄마가 얼마나 답답했으면 줄행랑을 쳤겠나

이해가 되다가도 또 괘씸한 마음이 든다. 

인생의 내리막길에서는 추억을 곱씹는 재미도 크다고 하더라

추억이 많은 사람이 부자라는 생각을 늘 하는데 

우리 딸들도 부자가 됐으면 좋겠다     

8시간의 한라산 산행이 끝났다. 

무거운 배낭을 휙 던졌다.  

어깨가 홀가분하다.

다리는 땡땡하고 발바닥은 불이 나서 온몸은 만신창이지만 

마음만은 날아오를 것 같다. 

함께 걸어준 모든 분께 눈물 날 정도로 고마운 마음이 들더라

아주 먼 훗날 이야기지만 

인생의 마지막의 순간 이런 기분이 아닐까.

세상 소풍 한 번 잘했다. 

함께 해서 즐거웠고 행복했다

그리고 고마워.’     


현아,

스물다섯 살은 인생의 가장 찬란한 시절이란다.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은 불안함에

혹여나 걱정과 우울이 가득하지 않을까 싶어 이런저런 얘기가 많았구나.

백문이불여일견이고 백견이불여일행이라고 했지?

너의 한걸음 한걸음을 매 순간 응원한다.

우리 딸이 가장 듣고 싶은 말,

잘하고 있어~!!

라는 말과 함께

이만 엄마 한라산 이야기는 마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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