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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롱쌤 Jan 22. 2024

취준생 딸에게 (1)

한라산을 오르며 엄마가 들려주는 인생 이야기

“가만히 있어도 추운 이 겨울에 무슨 한라산이야!”
 겨울 산을 오르겠다고 등산 가방을 챙기는 나에게 네가 그랬지?

그러게.

사람들은 왜 얼어붙은 산을 그리도 기를 쓰고 오르고 내릴까.      


이번 겨울 한라산 산행에서는 유난히 우리 큰 딸 생각이 많이 났어.

아마도 네가 취업 준비에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어서가 아닐까 싶다.

대학 입학한 지 엊그제 같은데 벌써 졸업이 코앞,

이런저런 걱정이 많지?

인턴 6개월 끝나고 졸업 유예를 한 학기 더 하겠다고 했을 때

너의 고민이 읽혀서 마음이 아주 아팠어.

26년 전 스물넷의 엄마는 어땠나 기억도 더듬어 봤다.

현아, 앞날이 막막하고 두렵지?

너의 삶이 어찌 흘러갈지 불안하지는 않니?

인생 선배지만 어떤 조언도 하기 조심스럽구나.

대신 엄마 한라산 이야기 한번 들어볼래?


겨울 한라산을 8시간 동안 오르내리면서

어쩌면 인생도 산행과 같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단다.      


숙소에서 5시 기상,

새벽 장사하는 해장국집서 뜨끈한 국물 한 그릇 먹고

성판악에 도착하니 벌써 7시가 지났더구나.

이남에서 제일 높은 산 한라산(1947m)은 500m 고지에서 시작하지만

등반시간만 8~9시간이 걸리는 난코스야.

성판악 주차장에서 차 문을 열자마자 바람이 무시무시 불더라.

갑자기 겁이 확 났어.

정상 기온이 체감 영하 20도라는 말에 긴장이 많이 되더라.

며칠 전부터 아니 한 달 전부터 계획하고 준비한 산행이지만

산아래에서 신발 끈을 조일 때면 늘 한숨이 나온단다.

내가 잘할 수 있을까.’

그럴 때마다 쓸데없는 상념의 끈은 싹둑 자른다.

그냥 첫발자국 내디뎌 보는 거지 뭐!’

이렇게 말이야.

뭐든 하지 않을 때가 두려움이 큰 법이거든.

막상 내디뎌보면 뚜벅뚜벅 어떤 길로든 걸어가고 있게 마련이란다.      


겨울 산은 설산이야.

아이젠과 스패치 없이는 정말 위험해.

신발 밑 아이젠과 눈 들어가지 말라고 스패치까지 차고 본격 산행을 시작한다.

그런데 참 신기한 일이지?

그렇게 세차게 불던 바람이 산속에 들어서면

거짓말처럼 잔잔해진다.

심지어 고요해져 평안한 기운이 온몸을 감싸 안도감을 준다.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을 땐 겁 나고 두려운 건 당연해.

하지만 목표와 길이 명확해지면 힘든 산행마저도

신나는 여행처럼 느껴진단다.


앞사람 숨소리와 뒷사람의 스틱 소리만 들리는 조용한 산속을

한 시간쯤 말없이 걷다 보면 서서히 열이 난다.

땀이 등줄기를 타고 줄줄 흐르고 이마에도 송골송골 맺혀.

그러면 두꺼운 외투를 벗고 가벼운 옷으로 옷차림을 바꾼단다.

무거웠던 다리 근육도 풀리면서 몸이 훨씬 가볍게 느껴진다.

흐릿했던 주위가 완전히 밝아지며 햇살이 나뭇가지 사이로 비칠 때면

눈 덮인 나무와 돌, 조릿대 같은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아, 내가 제주도 한라산에 왔구나.

비로소 일행이 보이고 주변의 모든 것들이 제대로 느껴져.

고개 들면 앙상한 나뭇가지 사이로 파란 하늘도 보이고

새소리 비슷한 것도 들리는 것 같아 기분이 막 좋아져.

이때쯤 되면 혈기왕성한 젊은이들이 우리를 휙휙 추월한다.

나도 이유 없이 자신감이 충만해진다.

발걸음을 좀 빨리해서 앞사람을 제쳐볼까?

현아, 하지만 이 순간을 조심해야 한다.

산행하며 체득한 자기만의 속도가 있어.

컨디션이 좋다고 욕심을 내다가는 긴 호흡의 산행이 한순간에 힘들어질 수가 있거든.

그런데 재밌는 건 엄마를 추월했던 그 젊은이들

얼마 못 가서 눈밭에 푹 주저앉아 헉헉거려.

오버 페이스로 결국 산행 내내 애먹는 수가 있어.

누구나 비슷한 속도로 산을 오르지 싶어.

우리 인생의 속도도 그러지 않을까.      

산 아래는 눈이 별로 없다.


조금만 올라가도 눈이 쌓여 있는 등산로. 햇살이 비춘다.


젊은이들이 중간중간 눈밭위에 앉아 휴식을 하고 있다.

겨울 한라산은 눈이 오고 쌓이고 얼고를 반복한다.

눈 쌓인 등산로는 생각보다 걷기 좋단다.

아이젠이 눈을 꼭꼭 찍으며 걸으니 미끄러질 일은 없는 거지.

겨울 산행의 필수품 중 또 하나는 스틱이란다.

스틱을 찍으며 산을 오를 때 무릎에 가해지는 부담이 훨씬 줄어든대.

그런데 오늘따라 엄마의 스틱이 자꾸 쭉쭉 미끄러진다.

왜 그럴까.

뒤따라 오던 선배가 무심히 한마디 조언해주더라.

스틱촉이 뭉툭해져서 그렇다고.

교체하라는 이야기지.

10여 년 넘은 등산경력에도 이걸 몰랐다니 좀 부끄럽다.

안전한 산행을 위해서 몸무게와 근육을 관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장비 관리의 중요성을 엄마가 간과한 거지.

이 지점에서 그런 생각이 드는구나.

우리 딸이 인생에서 자기관리를 소홀히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늘 몸과 마음을 다듬는 거지.

운동하고 책 읽고 주변을 정돈하는 그런 관리 말이야.      


언제쯤일지는 모르지만 네가 만약에

 한라산을 오른다면 말이야.

진달래 대피소에서 커피를 마시며 요런 생각이 들 수도 있어.

‘한라산 별거 아니네? 이런 난이도라면 온종일도 걷겠다.’

그랬다간 제주도 할망신의 노여움을 살 게 틀림없다.

진달래 대피소부터 급작스럽게 길이 확 변하거든.

지금까지 올랐던 길과는 차원이 다른 최상 난이도의 등산길을 만날 거야.

정상이 코앞인 것 같은데 급경사를 걸어도 걸어도 도무지 거리가 좁혀지지 않아.

10분도 안 돼 숨은 차고 종아리 허벅지 근육까지 뻐근해진다.

그러다 보면  멍한 상태로 다리를

기계적으로 옮기는 너 자신을 보게 될 거야.

현아,

그럴 때쯤엔 끝도 없는 오르막만 보지 말고 뒤를 한번 돌아보렴.

어때? 속이 탁 트이지?

저 멀리 푸른 바다가 보이고 옹기종기 집들과

초록 식물의 제주 풍광이 그림처럼 펼쳐있지?

그리고 지금까지 걸어온 너의 길이 뿌듯하게 펼쳐져 있을 거야.

살다 보면 숨이 턱턱 막힐 때가 있더라.

모든 게 언제 끝날지 막막하고

힘은 부쳐 앞이 깜깜해질 때 말이야.

그럴 때 심호흡 하면서 휴식을 해보는 것도 좋아.

눈밭 위에 마음을 탁 내려놓고 잘 올라온 내 어깨를 두드려 주는 거지.

가방 속 초콜릿 하나 입에 넣어본다.

숨겨져 있힘이 불끈 솟는구나.

진달래 대피소에 올라서면 한라산의 정상이 드디어 눈에 들어온다.
본격적인 오르막이 시작되면 가끔씩 뒤를 돌아보며 제주의 풍광을 감상해야 한다.

만만한 인생 없듯 쉬운 산은 세상에 없다고 해.

한라산도 정상의 위엄을 아무나에게 허락하지 않는구나.

오늘 최대 고비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상상도 못한 바람과의 싸움.

아래 계단에 올라서자마자 세찬 바람이 인정사정없이 휘몰아치더라.

몸이 날아가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들 정도의 강풍이 분단다.

옆 난간과 줄을 잡으며 반대쪽으로는 스틱을 찍어가며

말 그대로 견뎌야 하는 시간의 연속이었어.

귀가 얼얼해지고 얼굴은 빨개지고 모자를

두겹 눌러쓰고 눈만 빼꼼 내놓고 걷는데도

정신이 하나도 없더라.

인생에서도 그런 순간이 있겠지?

무서운 바람이 날 집어삼킬 것 같아

두려움이 엄습해 주저앉고 싶은 때.

딸아~~

설령 그 절체절명의 순간에도 

주저앉지는 말아라.

그냥 버티고 버티라는 말밖에 할 수가 없구나.

뚜벅뚜벅 바람을 맞으며 앞으로 가다 보면

정상은 어느새 내 눈앞에 있거든.

그럴 때 엄마가 옆에 있다면 널 조금 잡아주는 게 도움이 될까?

그런 순간이 언젠가 딸에게 온다면 꼭 엄마가 옆에 있어 줄 수 있기를 하나님께 빌어본다.      


딸아~ 정상이 멀지 않았다.     

오르막으 끝도 없이 걸었는데 정상이 아직도 멀다.

이 구간부터는 강풍과의 사투다. 바람이 장난 아니게 불어 몸이 휘청거릴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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