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산책을 합니다. 몇 개월째 애쓰는 일상의 시작입니다. 그런데 오늘은 유난히 마음이 가볍습니다. 주말의 시작이어서 그럴까요? 아니면 오랜만에 들은 김쌤의 목소리 때문일까요?
시원하게 불어오는 바람 한 줄기에 몸을 맡겨봅니다. 코끝으로 가을이 들어옵니다. 고개를 돌리다 꽃과 나비를 발견합니다. 노란색 코스모스에 살포시 앉아 있는 호랑나비 한 마리. 물길 따라 흐드러지게 핀 알록달록 꽃들 가운데 왜 유독, 이 노랑꽃이었까요? 호랑나비의 마음을 훔친 향기의 정체가 문득 궁금해집니다.
김쌤도 그랬습니다. 이 노랑꽃처럼 그윽한 향을 풍기던 사람이었습니다.
벌써 3년 전이었네요. 교육청을 바꿔 새 학교로 전입해 온 첫날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교장 선생님의 카리스마와 업무 분장을 둘러싼 살벌한 분위기에 잔뜩 위축돼 있던 제게 “유현미 선생님이시죠?” 하며 말을 걸어주던 사람. 환한 미소가 유난히 아름다웠습니다. 아, 이 선생님 덕분에 어쩌면 잘 지낼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생기던 순간이었습니다. 김쌤과 나란히 옆 반이 되었지요. 그해 행운의 여신이 저를 보고 웃었습니다.
김쌤에게 하나에서 열을 물어가며 낯선 학교 시스템에 적응했어요. 선생님의 정돈되고 우아한 모습이, 그리고 선생님의 차분하고 안정된 목소리가 조급하고 불안했던 저를 안심시켰습니다. 수업자료를 공유하고 반 아이들 이야기를 함께 하는 시간이 참 좋았습니다. 얘네들 원래 이런 거냐며 묻는 김쌤에게 저의 3년 연속 1학년 담임의 경험이 도움이 될 때 어찌나 기뻤는지요. 늘 부족하다 느끼는 저 같은 자아 성찰형 인간은 선생님의 ‘대단하다’, ‘잘한다’라는 한마디에 자신감을 가지니까요.
아마도 선생님에 대한 저의 애틋함은 ‘눈물’과 함께 한 시간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 딸들 이야기를 하면서 함께 많이 울었지요? 제가 놓쳤던 많은 시행착오를 선생님은 하지 말았으면 했답니다. 부모는 최선을 다할 뿐 자식은 맘대로 안 되는 거, 마음을 비우는 일이 왜 그리 어려운 일인지요?
그해 김쌤에겐 정말 너무 많은 일이 일어났지요. 시어머니와 갑작스러운 이별, 따님 문제로 여름방학 미국으로 날아갔던 일도, 얽혀 있던 집 문제도 어쩜 그리 현명하게 헤쳐나가셨는지요? 유약한 저라면 아마 진작 두 손 두 발 다 들었을 겁니다. 시부모, 남편, 자식 뒷바라지에 어찌 저렇게 최선을 다할 수 있을까 하고 놀랐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김쌤을 존경했습니다.
“현미쌤, 이상하게 너무 피곤해!”
“현미쌤, 힘들어서 한숨이 자꾸 나와!”
그 수많은 말들을 왜 허투루 들었을까 후회 많이 했어요. 그때 병원 가보라 할 걸, 무심한 저를 얼마나 탓했는지 모를 겁니다.
새 학교로 떠난 김쌤이 미쳐버릴 정도로 힘들다고 했을 때도 그냥 적응하느라 그런 줄 알았습니다. 김쌤의 1차 발병 소식 듣고 제가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늘 최악을 생각하는 겁 많은 저는 혹시나 선생님이 잘못될까 여러 날 밤잠을 설쳤어요. 김쌤은 담담히 별 것 아니고 수술만 받으면 낫는다는 말로 저를 안심시켰지요. 수술받으러 가다가 택시 안에서 건강검진 받은 또 다른 병원 전화를 받았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땐 정말 제 심장이 멎는 듯했습니다. 다른 부위서 발견된 병변이 더 급하다고 그것부터 해결하자는 의사 말에 황당했다고 하셨지요. 이건 또 무슨 신의 장난인지요.
김쌤~. 연락 많이 하고 싶었어요. 병원파업문제 터질 때면 우리 김쌤 치료 일정에 혹시나 영향 줄까 봐 가슴 졸였답니다. 방학이면 한달음에 달려가고 싶었어요. 머리 다 빠져 얼굴 못 보여준다고 하셨죠? 자존심 강한 김쌤 성격을 알기에 기다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도 조심스럽게 말 걸면 바로 전화 주시며 저를 안심시켜 주셨잖아요. 우리 김쌤은 그런 사람입니다.
그 힘들다는 치료 끝났을까. 연락 주신다 했는데…. 우리 만나기로 했던 여름방학이 그냥 소리 없이 흘렀어요.
두 번의 수술과 항암, 방사선 치료까지 무사히 마치고 제주 요양병원에 계시다고 하셨지요. 죽다가 살아나셨다며 유쾌하게 말하셨습니다. 다음 주면 상경한다고 어쩌면 내년에 건강하게 학교로 돌아갈 수도 있을 것 같다고 덤덤히 소식 전하셨지요. 힘든 시간 잘 견뎌내 주셔서 얼마나 고마웠는지 말로 다 제 마음을 표현을 할 수가 없음이 안타까웠습니다. 제가 참 주책이지요. 그 좋은 소식에 왜 자꾸 눈물이 흐르는지.
“현미쌤 이제 나만 생각할 거예요. 내 건강만 챙길 거야.”
김쌤, 제발요. 부디 그러셔요.
올겨울엔 머리카락도 생기겠지요? 우아한 긴 머리 스타일도 좋지만 김쌤 하얀 얼굴엔 쇼트커트도 꽤 잘 어울릴 겁니다. 겨울방학 땐 꼭 얼굴 보여주신다는 말 약속 지켜야 합니다. 꼭!!
오늘 아침 산책길에서는 김쌤 생각만 했어요. 제 휴대폰에 담긴 노란색 코스모스와 호랑나비의 다정한 한 컷이 우리 이야기를 이렇게 풀어낼지 몰랐습니다. 선생님과 함께한 1년이 제게는 너무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아직도 못 다 푼 우리 아이들 이야기, 교실 이야기 더 많이 나누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