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엉~ 엉~ 내 샤인머시깽이! 나 그거 먹을 생각에 신나게 집 왔는데, 그거 먹으면서 자소서 쓰려고 뛰어 왔다고!! 아침에 출근하느라 못 먹었는데~~ 내 샤인머시깽이 내놔~~!!!”
샤인머시깽이? 우리집에서는 샤인머스캣을 그렇게 부른다. 명절 앞두고 도착한 과일상자에 샤인머시깽이가 딱 한 송이 들어있었다. 전날 작은딸이 반 먹고 반 남은 걸 큰딸은 퇴근 후에 먹으려고 했던 것 같다. 요즘 큰딸은 하반기 공채 지원으로 한껏 예민하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인턴 일 하랴, 퇴근 후엔 자소서 쓰며 취업 준비하랴 눈코뜰 새 없이 바쁘다. 얼굴은 반쪽인 딸이 그깟 샤인머시깽이 때문에 지금 무지 서러운 것 같다.
“내 샤인머시깽이~~ 내놔!~~”
큰딸은 아예 다리를 뻗쳐놓고 생떼를 부린다. 다 큰 애가 이게 무슨!! 순식간에 벌어지는 광경에 남편과 나는 어이가 없다. 대여섯 살도 아니고 스물넷씩이나 먹은 딸이 지금 맛있는 거 동생이 다 먹었다고 투정을 부리고 있다.
“언니, 처음부터 얼마 없었어. 한 송이가 고작이었다고. 나도 억울해.”
한 살 어린 동생도 언니의 돌발행동에 기가 막히나 보다.
“그걸 지금 너 혼자 다 먹은 거잖아. 몰라, 내 샤인머시깽이 내놔!!”
가짜울음을 어찌나 실감 나게 터뜨리는지 누가 보면 진짜 큰일 벌어진 줄 알겠다.
옆에서 지켜보던 남편, 한달음에 딸에게 달려가 어르고 달랜다.
“딸, 울지 마~ 아빠가 그 샤인머시깽이 당장 사줄게. 뚝 그쳐!”
“진짜?”
바로 정색하는 큰딸. 남편은 운동나가려는 나를 세운다.
“마누라, 우리 걷지 말고 장 보러 가자! 그것도 걷는 거잖아.”
생각해보니 샤인머시깽이 투정은 순전히 우리 부부 탓이다. 고급이라는 후광 때문인지 다들 맛있다고 난리지만 난 별로다. 터무니없이 비싼 것도 이유겠지만 뭣보다 과일 특유의 상큼함이 없다. 어릴 적 산을 쫓아다니며 따먹었던 산머루의 투박함도 없고, 한 알 넣으면 입안의 침을 불러 모으는 청포도의 새콤함도 없다. 영 과일답지 않다. 찬사 일색의 달콤함은 내게는 설탕물에 오랫동안 담갔다가 빼낸 것처럼 느껴진다. 뭔가 혀끝만 유혹하는 얕은 맛이랄까. 무릇 여름을 난 과일은 가뭄도 비바람도 천둥도 다 견디고 마침내 아침저녁 선선한 공기를 머금은 채 가을의 전령사 풀벌레 소리마저 담은 오묘함이 있어야 한다. 뺀질뺀질한 얕은 수작으로 덤비는 호사스러운 그것이 영 마뜩잖다. 알맹이는 또 어찌나 큰지 몇 개 집어 먹으면 배가 부르다. 껍질째 먹을 수 있고 씨도 없고 식감도 아삭아삭 좋아 열광하는 사람들에게 한 마디 하고 싶다. 포도라 함은 쫄깃한 과육을 씹는 맛 아니겠냐고, 귀찮을 정도로 씨를 발라가면 먹어야 더 소중한 귀한 맛 아니냐고.
“비싸다고 안 사줘서 딸들이 저러나?”
남편은 근처 마트에서 한 송이 만원이라는 포도를 망설이지도 않고 집었다. 그리고는 딸 앞에 바로 대령했다.
“큰딸, 실컷 먹어. 이거 너 혼자 다 먹어.”
딸이 씩 웃는다. 그러고는 한마디 더 한다.
“아빠가 씻어줘.”
기가 막힌 남편이 나를 쳐다봤다. 이럴 땐 어깨 으쓱하며 모른 척하는 게 상책이다. 딸은 아빠를 졸졸 쫓아다니며 조른다.
“아빠가 씻어줘, 씻어줘. 씻어줘. 안 그러면 안 먹어.”
너털웃음 터뜨리며 남편은 결국 수도꼭지 열어젖힌다. 샤인머시깽이 알알이 더 영롱해졌다. 예쁜 접시에 담아 딸 코앞에 대령하는 남편. 헤헤거리며 과일 한 송이 품에 안는 딸. 남편은 그런 딸을 흐뭇하게 쳐다본다. 그러다가 나를 툭 친다.
“도대체 쟨 누굴 닮은 거야? 응?!!!”
기가 막힌다. 저 딸내미는 날 닮은 게 아니고 당신이 저렇게 키우고 있다고! 하려다 말았다.
딸의 순진무구한 웃음을 본다. 큰딸은 지금 바늘구멍 같은 취업 전쟁을 치르는 중이다. 매일 두 석 장의 자소서를 쓰며 탈락과 도전을 반복하는 중이다. 인생에서 가장 빛나야 할 젊음의 절정에서 불안과 두려움으로 잠 못 드는 딸. 샤인머시깽이를 핑계로 ‘엄마아빠, 희망은 있겠지요?!’ 라며 부모 앞에서 투정하는 것 같다.
딸아, 힘들 땐 언제든 다리 뻗쳐가며 울어라. 설령 그게 거짓 울음이라도 기꺼이 속아줄게. 그깟 샤인머시깽이, 원한다면 얼마든지 사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