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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롱쌤 Oct 04. 2024

'불가근불가원'은 글렀다

우리반 첫 학부모독서모임

AI가 그려준 그림

새 학기 들어 호기롭게 시작한 학부모 독서 모임. 나까지 포함 다섯 명, 단출하다. 담임선생님과 이런 모임은 처음이라 긴장되고 걱정된다는 어머님들. 속으로 그랬다. 나만 하겠어요?


진행도 그렇지만 40분짜리 온라인 화상 회의 프로그램이 고민됐다. 유료를 생각했지만 한 달에 한 번 하자고 2만 원 내는 건 말이 안 된다. 40분씩 끊어서 두 번 진행하는 것으로 양해를 구했다. 어리버리 무대책 무대뽀 교사지만 마음 넓은 학부모님들께서 빈틈 잘 메워주겠지?      


금요일 저녁 일찌감치 밥을 먹고 안방 문 앞에 ‘출입금지!’라고 써 붙였다. 엄마는 ‘스불재’의 전형이라며 큰딸이 혀를 찼다. 옆에 있던 남편이 ‘스불재’가 뭐냐고 묻는다. ‘스스로 불러온 재앙’이란다. 너네 엄마한테 딱 들어맞는 표현이라며 부녀가 나란히 앉아서 낄낄거렸다.     


첫 책은 양귀자님의 ‘모순’으로 정했다. 그녀의 소설은 1990년대부터 인기가 대단했다. 그런데 요즘 다시 서점가를 휩쓸고 있단다. ‘원미동 사람들’,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 등 꽤 유명한 것이 많은데 특히 ‘나는 소망한다….’는 대학생 시절에도 파격으로 다가왔다. 유명한 남자배우를 납치하여 조련하고 길들이는 과정을 통해 여성 억압의 현실을 뒤집어서 보여줬던 게 참 통쾌했다. 대학생 두 딸도 이 책을 재밌게 읽는 걸 보니 아직 우리 사회는 그때와 지금이나 별반 다르지 않나 보다.      


소설 ‘모순’과 만난 학부모님들은 어떤 이야기 보따리를 풀까. 한 어머니께서 퇴근이 늦어져서 헐레벌떡 달려오고 있다는 문자를 보내셨다. 이게 뭐라고 그녀의 일상을 뒤흔드나 싶어 부담감이 몰려왔다.
줌으로 간단한 인사를 나눴다. 모두 책이 재밌어 단숨에 읽으셨다고 했다. 다행이다.     

 

패들렛을 공유하며 본깨적(본 것, 깨달은 것, 적용할 것)을 썼다. 잡담을 위한 근황 사진도 하나 올리시라 주문했다. 잔잔한 음악이 흐르는 가운데 10분이 흘렀을까. 얼핏 계산해 보니 화상 미팅 시간이 20분이 채 남지 않았다. 순서대로 한 분씩 돌아가며 책을 읽은 소감을 말하고 질문거리 등을 나눴다.      


소설 속 등장 캐릭터를 잘 분석하신 어머니도 계셨고, 주인공이 인생은 실수를 되풀이하는 ‘모순덩어리’라며 결국 살아가면서 탐구하는 것이라는 말에 큰 공감을 표하는 분도 계셨다. 아이들을 키우며 공부가 최선은 아니라고 하면서 제발 잘해줬으면 간절히 바라는 이율배반적인 자신의 모습도 본다고도 하셨다. 좋은 엄마인 척하는 나도 성인이 된 큰딸을 울린 얘기를 들려주며 사람 사는 모습은 다 똑같다고 고백했다.     


언론사 선배들이 그런 말을 자주 했었다. 취재원들과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의 원칙을 꼭 지켜야 훌륭한 기자가 될 수 있다고 말이다. 간을 빼줄 것처럼 살가웠다가 여차하면 바로 뒤통수를 때리는 경우를 수도 없이 봤으므로 살벌한 현장에서 맘을 주지도 받지도 말라는 것쯤으로 이해했다. 담임교사와 부모님들과의 관계도 그러하다 생각했다. 아이를 가운데 두고 만나는 시선이야 그래 봐야 1년에 두세 번을 넘지 않는다. ‘불가근’은 기본값이다. ‘불가원’은 관심 아동에 해당하는 것이라 여겼다. 그런데 학부모 상담 때면 여지없이 이 원칙들이 무너졌다. 특히 부모님이 가슴속 깊은 곳, 내밀한 이야기를 꺼내놓을 때면 나도 그만 경계가 무너져 콧물 눈물 찍었다. 그러면서 한숨 없이는 못 들을 나의 이야기를 마구마구 쏟아냈다. 돌아가는 학부모님을 복도까지 배웅하고 뒤돌아서서는 머리 쥐뜯으며 후회했다.


하물며 인생을 논하는 책을 읽고 뒤풀이하는데 ‘불가근’이 웬 말인가. 그 옛날 촌뜨기의 연애사가 줄줄이 사탕처럼 쏟아져 나왔다. 나처럼 겁 많은 이는 선을 조금이라도 넘는 사람은 무조건 피하고 도망 다녔던 황당한 이야기와 거절의 신호인 줄도 모르고 무지막지하게 대시한 지금의 남편이 아니었으면 아마 혼자 살았거나, 엄청난 노처녀가 돼서야 짝을 만났을 거라고 실토했다. 문득 내 패만 다 보인 것 같아 불안해졌다. 어머니들의 연애담도 듣고 싶다며 ‘모순’ 속 주인공을 들먹이며 젊은 적 사랑이 버겁진 않았냐고 넌지시 물어봤다.

그때 **이 어머니께서 그러셨다.

“저도 캠퍼스 커플이었는데 너무 한 사람만 오랫동안 사귀어서 4년 동안의 대학 생활이 그 사람, 그 연애밖에 기억이 없어요. 그래서 다시 돌아간다면 그렇게는 안 하고 싶어요.”

“아~~ 그분이 지금 **이 아빠군요.”

“아니요! 다른 사람인데요.”

순간 어머니들도 나도 빵 터졌다.      


소설 속 캐릭터 중에 가장 애정이 가는 인물들의 이야기도 나눴다. 발 냄새가 나는 형의 양말을 형수 몰래 빨아 널고 온다는 마음 따듯한 남자, 큰 사건이 끝도 없이 터지는 데도 늘 억척스럽게 해결해 내는 엄마, 해 질 녘엔 절대 낯선 곳에서 헤매면 안 된다면서도 오랜동안 집으로 돌아오지 않는 아빠, 술에 취해 집안 살림을 부수는 아버지의 망나니짓에는  일종의 품위가 느껴진다고 슬퍼하는 주인공까지 다양했다. 세상엔 이해 못 할 사람은 없다. 누구나 그럴 수 밖에 없는 자기만의 서사가 있는 법. 그걸 모르고 아니 외면한채 서로 악악거릴 뿐이다. 새삼 학원 가기 싫어하는 5학년 아들 딸도 일에 지쳐 주말에 누워만 있고 싶어 하는 남편도 보듬어주지 않을까 싶다.      


한참 얘기가 무르익는 순간 회의가 종료됐다.  무료 40분이 지났다.. 다시 열려고 하니 10분 뒤에나 가능했다. 미처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다. 얄밉게도 유료회원 가입하라는 광고까지 떴다. 그래 이 사람들이라고 땅 파서 장사하겠나 싶다. 안절부절 10분의 휴식 후, 못다 한 이야기를 이어갔다. 아줌마들의 독서 수다가 여차여차 흐르고 두 번째 40분 화상 미팅도 예고 없이 종료됐다. 또 그럴 거라 예고는 했지만 찝찝한 마무리가 아닐 수 없다. 뒷간 들어갔다가 뒤처리 제대로 못 하고 나온 느낌이랄까. 어머니들께서는 모두 즐겁고 뿌듯한 시간이었다며 우울해하는 나를 문자로 위로해 주셨다.     


첫술에 배부를 순 없지만 너무 많이 헤매서 죄송한 마음 가득했다. 패들렛 슬라이드쇼 공유도 제대로 안 돼 우왕좌왕했고, 어쭙잖은 책임감으로 온전히 즐기지도 못한 것 같다. 지금까지 몸담았던 모든 모임의 리더들은 이런 부담감으로 했겠구나 싶다.      


“쉬고 싶은 황금 같은 주말 시간 당신이 뺏은 거 아냐? 아무리 봐도 담임쌤 갑질이야.”

허탈한 모습으로 터덜터덜 나오는 마누라에게 재를 한 줌 뿌리는 남편. 뭐래, 그래도 난 내 갈 길 간다. 아무리 봐도 올해도 ‘있어 보이는’ 신비주의 교사되긴 글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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