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두 살 성호가 내게 귓속말을 했다. 그것도 친구들과 중국집에서 저녁을 먹기 시작하기 직전이었다.
“와~~ 진짜? 잘됐다.”
옆에 있던 아이들이 무슨 일이냐고 눈을 똥그랗게 떴다. 비밀이에요,라는 표정으로 성호가 나를 보고 찡긋 웃는다. 성호는 짜장면을 먹으며 속삭이듯 새아빠 자랑을 했다. 성호가 이렇게 마음속 이야기를 달콤하게 털어놓는다. 짜장소스 아깝다며 공깃밥까지 추가 주문해 쓱싹 비벼 말끔히 해치우는 아이의 모습에 자꾸만 미소가 지어졌다.
성호는 우리반 금쪽이 넘버원이다. 키도 덩치도 제일 크다. 몸집만 큰 게 아니고 소리도 수시로 꽥꽥 질러 귀청 터질 것 같다고 친구들이 수시로 하소연을 했다. 성호는 싱글맘인 엄마와 외조부모와 외삼촌과 함께 산다. 엄마가 바빠져 함께 보내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했고 그 스트레스를 학교에서 터트렸다. 지나가는 아이들을 이유 없이 툭툭치고 비아냥 거리는 말투로 말꼬리를 잡았다. "성호가 때렸어요", "성호 때문에 힘들어요." 잇따르는 아이들의 민원에 혼이라도 낼라치면 ‘내가 뭘 잘못했냐’는 표정으로 나를 더욱 열받게 했다. 성호는 친구들이 생트집을 잡는다고 억울해하다가도 따로 상담을 할 때면 180도 달라진 순한 양의 모습을 보였다. 할머니와의 갈등, 그리고 엄마를 못 보는 날도 여러 날 됐다는 말을 하며 눈물을 뚝뚝 흘렸다. 단단히 혼을 내줘야겠다는 마음은 어느새 온데간데 사라졌다. 마음 붙일 곳 없는 외로운 12살만 보였다. 과한 터치와 공격적인 말투를 친구들이 힘들어하니 너도 노력하라는 말로 상담을 마치곤 했다. 성호는 자기가 더 애쓰겠다며 너무도 공손하게 약속을 하곤 했지만 늘 도돌이표 일상이었다.
그러다 2학기가 되고 성호는 진짜 넘버원이 됐다. “회장이 되면 이유 없이 아이들을 툭툭 건드리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수업시간에도 절대 분위기 안 흐리겠습니다.”라는 야심찬 공약을 내걸어 2학기 회장에 당선됐다. 친구들의 간절한 기대를 받고 우리반 넘버원이 된 성호. 동화 속 주인공처럼 한때 빌런이었던 아이가 친구들의 지지를 받고 개과천선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현실의 성호는 여전히 어깨빵(어깨를 일부러 툭툭 치기)을 일삼았고 친구들을 조롱하는 말로 반 아이들의 분노를 샀다.
“회장 되면 바뀌겠다며?”
“이럴 줄 알았으면 너 안 뽑았어.”
친구들의 불만에도 '어쩌라고' 라며 약을 살살 올렸다.
“회장 탄핵하면 안 돼요?”
급기야 아이들의 입에서 ‘탄핵’이라는 말이 아무렇지도 않게 나왔다. 참, 어쩜 아이들은 이렇게 어른들을 쏙 빼닮고 자라는지 모를 일이다.
사실 성호가 노력을 아예 안 하는 건 아니었다. 교실에서 힘쓸 일이 있으면 앞장서기도 했고 친구들을 도와주려는 모습도 나름 꽤 보였다. 친구들과 놀다가도 중간중간 내 눈치를 살폈다. 몸터치는 안 돼라는 수신호를 하면 고개를 끄덕이며 걱정 마 라는 신호를 보냈다. 하지만 잠시만 방심하면 꼭 문제가 터졌다. 수년동안 몸에 붙은 행동과 말이 일순간 바뀔 수는 없었을 것이다. 11월 말은 나의 인내심도 동이 났는지 성호에게 여러 번 소리를 질렀다. 언제까지 선생님이 너를 기다려야 되냐, 너를 뽑아준 친구들에게 미안하지 않냐고 더 이상 실망 시키지 말라고 상처되는 말을 수시로 했다. 이 영악한 녀석이 마음 약한 나를 이용해 먹는 건 아닌지 하는 의심도 들었다.
그런데 우리반 넘버원의 드라마틱한 변화는 1주일 전부터 시작됐다. 사연은 이렇다. 1학기부터 학급 경매를 통해 선생님과 학교밖 데이트를 진행 중이었는데 마지막 기회는 농구장 관람이었다. 4명씩 총 6번을 기획해 야구장, 영화관, 쿠킹클래스, 치킨데이, 떡볶이 만남 등을 거쳤다. 성호는 그동안 모은 통장(우리반은 경제교실을 운영 중이고 아이들은 매달 월급을 받고 있다.)을 탈탈 털어 경매에 도전했고 당당히 티켓을 거머쥐었다. “평화롭게 잘 지내보자. 농구장에 너랑 꼭 가고 싶으니 친구들 잘 챙겨줘.” 선생님의 경고성 축하멘트에 성호는 눈치껏 행동했다. “저 오늘 애들 한 명도 안 건드렸어요.” “오늘 우리 교실 평화로웠죠?” 덩치는 산만한 녀석의 멘트가 귀여워서 자꾸 웃음이 나오는 날이 많아졌다. 참, 별것도 아닌 이벤트가 아이를 이렇게 변하게 하나 싶었다.
학교밖의 성호는 사랑스럽고 의젓했다. 중국집 메뉴 선정도 척척 해냈다. 짜장면을 먹고 농구장으로 가는 길. 지하철을 처음 타는 친구들을 챙겼고 길치 방향치인 나를 대신해 길도 앞장섰다. 역시 아이들의 진면모는 학교밖이다. 생전 처음 가본 농구장에서 아이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평일 저녁시간이었음에도 경기장엔 가족, 친구, 연인, 동료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가득했다. 아이들도 어느새 분위기에 동화돼 갔다. 묘기에 가까운 3점 슛이 터질 때면 아이들도 환호성을 터트렸다. 쿼터 사이사이 치어리더들이 신나는 노래에 맞춰 춤을 출 때면 아이들의 엉덩이도 들썩였고 예쁜 누나 좋아하는 반 친구의 이름을 들먹였다. 성호의 가방에서는 초콜릿과자, 젤리, 스낵 이 줄줄이 사탕처럼 나와 친구들에게 전달됐다. 팀파울이 뭐냐, 몇 개 이상이면 자유투를 주냐, 쿼터당 10분 경기가 왜 이리 기냐, 선수교체는 무한정이냐 는 등 성호는 끝도 없이 질문을 쏟아냈다.
“버스 정류장 내리자마자 엄마 만나 같이 집에 들어갔어요.”
“밤 10시 넘어 집에 들어간 건 생전 처음이었어요.”
“선생님, 저 어제 씻자마자 기절했어요.”
다음날 등교한 성호는 묻지도 않은 말을 속사포처럼 쏟아냈다. 그리고 선생님 단골집에서 먹은 탕수육 진짜 맛있었다며 또 귓속말을 했다. 내년에 어쩌면 새아빠 있는 미국에 갈 수도 있다고 했다. 반항기 가득한 우리반 넘버원은 요즘 연일 나를 감동시키고 있다. 아직도 관심과 사랑이 부족한 마냥 어리기만 한 소년의 모습을 보여주며 나를 한없이 너그럽게 만들고 있다. 농구장과 탕수육 약발일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다음 주면 또 날 열받게 해서 헤어질 날을 카운팅 하게 만들 수도 있다. 하지만 늘 믿는 도끼에 발등이 찍히더라도 정신 차리라고 냉수 한 바가지 뿌렸다가 달콤한 영양제도 꽂아주며 기다려주는 게 나의 숙명 같다.
한 아이의 변화와 성장은 그리 쉬이 오는 게 아님을 안다. 휘청거리지만 뿌리박고 있고, 삐뚤삐뚤 하지만 위로뻗고 있다. 그 속도와 방향을 불안해하고 흔들리는 건 어른들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