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백컨데 저는 주중에 비 예보가 있으면 웃음이 납니다. 아니 웃음 정도의 단어로는 충분치 않습니다. 물개박수 치는 제 모습을 상상하면 적당할 것 같습니다. 안개비나 보슬비 정도로는 충분치 않습니다. 흙이 홀딱 젖어 철벙철벙 할 정도의 비다운 비라야 합니다. 장대처럼 쏟아지는 빗소리를 즐기는 낭만파냐고요? 천만에요. 걸어서 출근하는 저에게 그런 게 반가울 리는 없지요. 그 이유가 뭐냐고요?
바로 업계 용어로 ‘아나공’(아놔, 여기 공 있다) 교사이기 때문입니다.
체육시간 공만 던져줘도 즐거워하는 아이들을 보면 흐뭇하지만 교사로서 직무유기를 하고 있는 건 아닌지 늘 괴로워한답니다. 그래서 차라리 비라도 쏟아져라 기도하게 된거죠.무책임한 교사 아니냐고요? 맞아요. 아이들이 손꼽아가며 간절히 기다리는 시간을 교사가 제대로 주도하지 못하고 있다는 죄책감과 자괴감에 늘 가슴 한편이 무겁습니다.
사실 저는 움직이는 걸 무지 좋아합니다. 가만히 있으면 우울감을 느껴 일을 만들어 밖으로 나도는 편이라 식구들은 제게 역마살이 있다고 해요. 신체 능력이 엄청 뛰어나냐고요? 아뇨, 슬프게도 그 반대입니다. 교직원 체육대회대회라도 있으면 무조건 손들고 나가서 선수 역할을 자처하지만 그 결과는 창피하기 그지없습니다. 부상도 꽤 입어 치료도 자주 받습니다. 그런 제가 ‘아나공’ 교사가 돼 체육을 싫어하게 된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습니다.
교과서를 뒤척일 때마다 한숨이 나옵니다. 차시별로 수업을 충실하게 진행이라도 할라치면 아이들은 재미없고 지루해서 미칩니다. 운동기능을 3-4차시에 걸쳐 익히고 마지막 수업 차시쯤에야 재밌는 게임이 설계되어 있으니 아이들 입장에선 참 감질날만하지요. 숏폼에 숏츠에 익숙한 아이들이 긴 호흡을 버거워하며 ‘그냥 우리 피구 하면 안 돼요?’ ‘발야구나 해요.’하며 매번 저를 졸라 죽을 지경입니다.
제가 운동장에 나가기 싫은 큰 이유 중의 또 다른 하나는 사춘기 여학생들입니다. 물론 모든 여자친구들이 절대 그렇지는 않아요. 하지만 고학년 여학생의 대다수가 체육시간을 괴로워하지요. 푹푹 찌는 한여름이나 매서운 바람 불 때면 어김없이 제게 애원합니다. 선생님, 교실체육해요. 날씨와 상관없이 뛰쳐나가고 싶어 하고 승패에 목숨 거는 남자아이들을 외계인 쳐다보듯 하지요. 드센 남학생들 틈에서 위축돼 있는 아이들을 달래 움직이게 하려면 평소 에너지의 두 세배는 더 퍼부어야 하는 저의 고충을 상상하실 수 있으시려나 모르겠습니다.
그렇다고 절대 오해는 말아주세요. 체육시간만은 빠뜨리지 않고 철석같이 지킵니다. 특히 고학년 담임을 할 땐 강박처럼 철저하게 지켜줍니다. 교실 천장이라도 뚫을 기세의 사춘기 남자아이들의 에너지를 운동만큼 감당 가능한 게 없다는 것쯤은 경험상 깨달은 지혜이지요. 그리고 이 녀석들을 구워삶기엔 이만한 카드가 없습니다. 학년말 연말 보너스처럼 운동시간을 던져줄 때면 ‘우리 선생님, 최고!’라는 엄지 척이 여기저기 난무하거든요. 하지만 심판 역할에 충실한 교사인 저의 그림자는 의 그림자는 참 왜소하게만 느껴집니다.
그래서 올해 큰맘 먹고 1년짜리 체육 연수를 신청했어요. 매월 1회, 3시간 동안 학생처럼 강당, 운동장에서 직접 뛰어보며 배우는 프로그램이었습니다. 왕복 3시간, 3시간 러닝타임의 꽤나 고된 수업이어서 집에 돌아오면 밤 9시가 훌쩍 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번의 결석도 없이 모범 출석한 연유는 뭘까요. 아마도 작년에 이어 올해도 고학년을 맡은 영향도 있었지만 가장 큰 매력거리는 여교사들만 모여 배우는 수업이었기 때문입니다. 왜 여교사만 이런 특혜를 주냐고요? 그건 우리반 여학생들의 고민을 들여다보면 충분히 이해하실 겁니다. ‘남자들 앞에서 왠지 주눅 들어요.’,‘우리 때문에 졌대요.’, ‘여자끼리 평화롭게 수업하고 싶어요.’ 맞아요. 우리 여교사라고 다르겠습니까. 성인 축구클럽, 야구클럽만 봐도 여성 참여 기회는 참 없잖아요.
‘액티브 모두’라는 이 프로그램은 체육현장에서 소외되기 쉬운 여학생 체육활동 지원을 위한 사회공헌 차원의 일환이었습니다. 나이키코리아가 초록우산 어린이재단, 위밋업 스포츠와 파트너십으로 여자코치육성을 목적으로 교사 연수 기회를 제공했던 거죠. 참여하고 보니 내용이 너무 우수해서 올해 해야 할 일 1순위에 놓고 1년을 보냈습니다. 기존의 교육청 주도의 교사 연수와는 차별화된 분위기도 인상적이었습니다. 대기업이 후원해서인지 환경이나 제반 조건이 훌륭했죠. 시원한 음료가 제공되고 간식도 훌륭했어요. 젯밥에 더 눈먼 교사 아니었냐고요? 물론 그런 면이 없지 않았지만 먹는 거에 초연해지는 나이쯤은 됐습니다.
코치선생님께 배운 수업 아이디어와 팁은 너무 요긴해서 그걸 하나씩 풀어내가며 수업에 써먹어보는 재미가 쏠쏠했습니다. 더군다나 모든 강사가 축구, 농구, 배구, 핸드볼 등 여자선수 출신이어서 기량도 월등했어요. 아이들을 이해하고 체계적으로 지도하는 코칭기법도 훌륭해서 혀를 내두를 정도였습니다. 아이들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며 소통하며 지도하는 모습은 감동적이기까지 했고요. 신체능력이 다른 아이들을 모두 끌고 수업을 진행하고, 승부에 집착하지 않고 함께 땀을 흘리는 긍정적인 신체 경험을 체육시간의 목표로 삼는 것도 평소 나의 교육지론과도 딱 맞았습니다.
물론 배운 걸 우리반 체육시간에 적용하면 기대만큼 원활하지는 못했습니다. 교사의 안내를 찰떡처럼 잘 알아듣지도 못해서 시간도 꽤 걸렸고 게임 승패에 흥분해서 돌출행동도 많았거든요. 그래도 신체적인 능력 향상과 재미라는 두 토끼를 다 잡아내며 아이들은 즐겁게 참여할 수 있는 한 시간짜리 수업을 진행할 수 있었죠. 드디어 제가 ‘아나공’ 교사로의 생활을 마침표를 찍은 거죠.
지난주에는 풍선 하나를 가지고도 열두 살 아이들을 쥐락펴락했습니다. 대여섯 정도의 친구들과 손을 잡고 원을 만들어 풍선을 띄우는 활동이었는데 협동, 배려, 의사소통을 신체활동을 통해 길러 볼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었거든요. 손으로 띄워보고, 머리로도 올려보고, 발로도 차 봤습니다. 서로 이름을 불러주며 순서를 정하고 숫자를 함께 외치면서 즐거워하는 아이들 모습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습니다. “선생님, 이것도 연수에서 배워온 거예요?”라며 아이들이 물었습니다.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려 줬지요.
그동안 온라인게임, 유튜브 좀 작작하고 나가서 운동해라라고 맨날 말로만 잔소리했더랬지요.
체육수업만은 전문가가 필요하다며 책임전가를 하는 찌질한 교사였습니다. 하지만 올해는 그 창피한 모습에서 아주 조금 탈피했습니다. 아이들이 사랑스러울 때요? 조용히 책 속에 몰입하는 모습도 좋지만 운동장 떠나갈 듯이 친구들과 웃고 소리 지르며 뛰어다니는 모습도 최고입니다. 우리 아이들이 몸도 마음도 건강하게 자랐으면 좋겠어요. 적극적인 신체활동이 자신감을 향상시키고 활동적인 어른으로 키워낸다는 믿음으로 저 좀 더 분발해야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