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상계엄령 발표 후 두근 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느라 힘들었다. 뉴스특보라는 이름으로 숨쁘게 전개되는 상황들이 실시간으로 보도됐고 그걸 지켜보고 있으면 괜히 불안해지고 초조해졌다. 하지만 아침마다 지하철서 쏟아지는 출근길 행렬속의 사람들의 발걸음이 묘하게도 안도감을 줬다. ‘밤새 안녕’이라는 말이 요즘처럼 실감나게 다가왔던 적도 없었던 것 같다.
교실에 들어서면 아이들은 우르르 내 곁으로 몰려와서는 텔레비전에서 본 뉴스를 쫑알쫑알 풀어놨다. 그날 엄마아빠 옆에서 무서워 죽을 뻔했다고 했고, 할머니 할아버지께서 새벽에 전화로 안부를 걱정해 주셨다고 했다. 어떤 아이는 10시에 잠들어 아무것도 모르고 잘 잤다는 말에 모두의 부러움을 샀다. 담장을 뛰어넘는 국회의원 이야기를 무협지 속 주인공처럼 재밌게 전했고 쉬는 시간마다 탄핵! 탄핵!을 외치는 아이도 등장했다. 사회 시간을 잠시 빌려 ‘계엄령’이 뭔지, 그리고 우리 국민들이 계엄령의 역사를 왜 아픈 상처로 기억하는지 들려줬다. 들떠 있던 아이들의 목소리가 한순간 작아지며 표정도 심각해졌다.
국어시간 ‘행복한 우리반을 위해 필요한 덕목은 무엇일까’를 주제로 피라미드 토론 후 글똥누기에 글쓰기를 했다. 그냥 최근 계엄령 관련 글 쓰면 안 되냐고 한 아이가 물었다. 주제에 얽매이지 말고 쓰고 싶은 대로 써보라 했다. 눈알을 굴려가며 골똘히 생각하며 사각사각 써 내려가는 아이들을 보면서 새삼 이런 평온한 일상이 너무도 감사하게 느껴졌다. 간밤의 난리에 대해 열두살 수준의 분노와 황담함이 노트에도 고스란히 쏟아져 나왔다. 그 가운데 유독 내 눈길을 사로잡은 글이 하나 있어 잠시 소개해보겠다.
제목: 똥 못싸는 일이 가장 큰 일이었으면 좋겠다.
윤석열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했다는 뉴스를 들었다. 사실 윤석열 대통령보다 수방사랑 707 특수부대원 군인들이 더 힘들어 보였다. 아무튼 이렇게 정치가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 온 뉴스는 정치로 도배됐다. 모든 기자는 다 동원돼서 취재를 하는 것 같다. 세상이 온통 난리다.
그래도 우리집은 평화로운 편이었다. 아빠는 또 변비 때문에 끙끙 앓고 계시고 엄마는 오늘도 *벅스에 들러서 커피를 드셨다. 이 난리통에도 내가 우리 가족을 사랑하는 것과 우리 가족이 나를 변함없이 사랑하는 것처럼 말이다.
아빠는 헬스장을 가셨고 엄마와 나는 이번에 개봉한 ‘모아나2’를 보려고 영화관에 갔다. 텔레비전 방송에서는 우리나라가 정말 큰일 났다고 했지만 오리지널 엔드 갈릭 팝콘은 여전히 맛있었다. 생동감 있는 음악과 화려한 화면 덕에 영화 속에 홀딱 빠졌다. 아빠를 위해 오리지널 엔드 캐러멜 팝콘을 리필해서 집으로 돌아왔다.
바깥세상은 며칠 사이에 뭔가 불안하고 무서워졌지만 우리집은 여전히 따뜻하다. 다만 변한 것이 있다면 5일째 변비로 똥을 못 싸던 우리 아빠가 헬스장을 다녀온 쾌변을 누셨다는 것이다. 우리 아빠가 똥 못싸는 일이 가장 큰 일이었으면 좋겠다.
너무나 티 없이 맑은 아이의 고백에 괜히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아, 초등학생까지 나라 걱정하는 이 기막히면서도 웃픈(웃기면서도 슬픈) 상황이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