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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우처럼 옷입기

아홉살 홀리기 작전

by 포롱 Mar 09. 2025

“선생님 예뻐요!”

“당당해요!”

“따뜻한 선생님 같아요.”

“무지 곱다고 엄마한테 말했어요.”

3월 첫 주가 끝나는 날, 아홉 살에게 선생님의 인상과 느낌을 묻자 이런 말들이 쏟아졌다. 예쁘다,  당당하다, 따뜻하다는 말에 미소가 지어졌다. 분명 나의 옷차림 때문일 것이라 생각했다.      

첫날 입었던 벨벳 원피스

매년 아이들과 첫 만남은 벨벳 원피스로 시작한다. 언뜻 보면 까만색이지만 환한 햇빛 아래에 서면 짙은 보라색인데 깜장과 보라를 넘나드는 그 신비로운 느낌이 좋다. 어깨에 살짝 들어간 퍼프는 귀여운 느낌을 주고 까만색 밴드로 잘록한 허리를 강조한 디자인은 통통한 체형을 제법 날씬하게 보이게 할 것이다. 무릎까지 내려간 여성스러운 플레어 주름은 1년을 함께 할 담임선생님이 차분하고 지혜로운 사람일 거라는 기대를 주기에 충분하다. 기다란 사각 목도리가 가슴 위로 늘어뜨려져 포근한 느낌의 이 원피스를 3월 첫날엔 늘 고민 없이 입는다.


둘째 날엔 귀여운 아이보리 원피스였다. 치마 끝자락이 장난꾸러기 꽃봉오리처럼 밖으로 튀어 나갔고 길이는 무릎 위까지 올라간 미니에 가깝다. 뒤 지퍼를 올릴 때면 어깨와 옆구리가 꽉 끼고 배까지 볼록 튀어나오는 타이트 형이라 하루 종일 긴장하고 힘을 줘야 한다. 하지만 아이들과 두 번째 만남을 앞두고 망설임 없이 이 옷을 집었다. 첫날 교실을 찾지 못해 교감선생님 손을 잡고 울면서 들어왔던 **에게 다가가 물었다. “선생님 이 옷 어때?”라고. **는 당황한 듯 쭈뼛거리다 모기 만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귀여워요.” 그 말에 ** 손을 덥석 잡았다. 그리고 귀에 대고 속삭여줬다. “귀엽다고 말해줘서 고마워. 그런데 사실은 네가 훨씬 더 귀여워.” 아이가 처음으로 웃었다. 둘째 날의 선생님이 귀여웠다면 이 옷도 대성공이다.


3일째 되던 목요일, 옷장 앞에 서있는 시간이 좀 길었다. 바지를 집으려다 또 치마를 꺼냈다. 어두운 감색에 모직 소재로 딱딱한 느낌이다. 오늘은 작정하고 엄해질 예정이다. 학기 초 적응 친교 활동을 하며 친해진 아이들이 교실과 복도를 뛰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아직 1학년 티를 벗어나지 못한 어린이지만 규칙과 약속을 우습게 봤다간 무서운 선생님을 만날 수 있다는 걸 알게 해야 한다. 목소리 크기도 줄이고 톤도 가라앉혀야지. “선생님은 두 얼굴을 가지고 있어요. 자상하고 친절하고 따뜻한 선생님도 있지만, 화내고 무서운 선생님도 숨겨져 있거든요. 여러분에게 늘 웃어주고 싶어요. 그럼 어떻게 하면 예쁜 선생님만 볼 수 있을까요?” “우리가 잘해야 해요!” 어딜 가나 선생님의 의도를 찰떡처럼 읽어내는 아이들이 있다. 오늘 입은 옷, 딱딱한 감색이지만 자세히 보렴, 커다란 꽃 몇 송이가 시원하게 그려져 있단다. 엄격한 선생님의 모습에서 너희들을 바르게 가르치고픈 예쁜 큰 그림도 봐줬으면 해.

만난 선생님 중 최고란다.  이제 2학년인데 얼마나 선생님을 만났다고ㅋㅋㅋ

서로를 탐색하며 긴장했던 첫 주의 마지막 날이 왔다. 일 년에 이 옷을 몇 번이나 입을까. 한쪽 구석에 숨겨져 있던 옷을 꺼냈다. 차분하고 단정해 보이지만 보석이 박혀 다소 화려해 보인다. 이 옷도 유난히 짧은 길이 탓에 남편이 늘 태클을 건다. 마누라가 아직도 자기가 소녀시대인 줄 안다고. 흉을 보든지 말든지 그래도 꿋꿋하게 입고 나갔다. “선생님 결혼했어요?”라고 물으며 한 아이가 다가왔다. 오호라! 이런 효과, 남편은 생각도 못 할 것이다. “음~ 했을 것 같아? 안 했을 것 같아?” 자기들끼리 실랑이를 벌였다. 한 아이가 그런다. 자기 엄마와 비슷해 보이고 머리가 짧은 거 보면 당연히 결혼을 했을 것이라고. 그러자 옆에 있던 아이가 반박했다. 얼굴에 주름이 하나도 없는 거 보면 안 한 것 같다고. 나도 모르게 웃음이 실실 나온다. 그때다. 지나가던 남자아이가 무심한 듯 한마디 툭 던졌다. “선생님 옷 보면 알아. 이런 옷 입는 사람은 분명 안 했어!” 나도 모르게 빵 터졌다. 매일 흡! 하며 배에 힘줘 가며 짧은 옷 입은 보람 충분하다.    

금요일 주말을 앞두고 입은 짧은 원피스

 

늘 첫인상이 중요하다. 1년을 함께 할 아이들을 맞이하기 위해 2월 준비 기간이 길었다. 그중에서도 첫날에 제일 공을 들였고 첫 주를 준비하는데 시간을 가장 많이 쏟아부었다. 아마도 첫 달을 최고로 열심히 살 것이다. 그래서 3월의 교사들은 매일 초주검이 돼서 퇴근한다. 물론 365일 아이들과 만나는 모든 순간이 소중하지만 시작이 좋으면 1년은 저절로 잘 굴러가게 돼 있다. 3월 첫 주, 옷장 앞의 내가 오랜 시간 고민의 고민을 거듭한 이유이기도 하다.

2025년 아홉 살과의 만남을 짧은 원피스로 시작했다. 순진한 2학년 꼬맹이들은 새로 만난 선생님이 젊고 예쁘고 따뜻하고 단단하다고 했다. 나의 여우 같은 시나리오는 계속 성공할 것인가. 다음 주는 어떤 옷을 입을까 벌써부터 고민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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