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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리법석 스승의날

아홉살들의 귀여운 이벤트

by 포롱

앞문이 드르륵 열리더니 *현이가 들어섰다. 매일같이 9시 종소리에 맞춰 허둥지둥 들어오던 녀석이 오늘은 유난히 일찍 도착했다. 나를 향해 씩 웃는 얼굴이 어딘가 수상하다.

“오늘 해가 서쪽에서 뜨겠다? 이게 무슨 일이야?”
지현이는 말없이 웃으며 가방에서 인쇄된 종이 뭉치를 꺼냈다. 주변 친구들도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몰려든다.
“선생님, 잠깐 나가주시면 안 돼요?”

아하, 감이 온다. 오늘이 스승의 날이다.
“그래? 그럼 선생님은 3층 회의실에 있을게. 다 되면 불러.”
말은 그렇게 했지만 속으로는 피식 웃음이 났다. 아홉 살 아이들이 준비한 이벤트라니. 안 봐도 눈에 선하다. 하지만 이 아이들에게는 이 모든 준비가 모험이고, 도전이고, 배움일 것이다.


10분, 15분이 지나도 소식이 없다. 혹시 다툰 건 아닐까 싶어 살짝 내려가 봤다가 문밖에서 딱 걸렸다.
“아직 안 됐어요!”
아이들이 몰려나와 나를 밀어 올린다. 도대체 뭘 그리 대단하게 준비하고 있는 걸까.

얼마 후, 다시 교실 앞에 섰다. 마침 *윤이가 문을 열고 말했다.
“선생님, 다 됐어요! 들어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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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문을 여니 교실은 어둑했고, 숨죽인 정적이 흘렀다. 오호, 제법이다. 분위기를 꽤나 잘 잡는다. 창가 밑, 의자 뒤, 교탁 아래에 재주껏 숨어 있지만 머리통이 다 보인다. 모른 척 소리쳤다.
“얘들아, 어디 있니? 다 어디 간 거니?”

그 순간, “와~!” 하는 함성과 함께 불이 켜지고, 사방에서 아이들이 튀어나왔다.
“어머,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야?”
“선생님, 칠판 보세요!”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선생님!’
칠판 가득 하트와 함께 그려진 글자. 아이들 얼굴에는 뿌듯함이 가득했고, 나도 감탄을 연발했다.
“와우! 이런 걸 그 짧은 시간에 다 준비했단 말이야? 완전 감동이야!”

꽃과 편지를 들고 나오는 아이들. 미처 준비하지 못한 몇몇은 종이를 찢고 접어 하트를 그려 내민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이 깜짝 파티를 두고 아침부터 찬반토론까지 벌였다지 않는가.


2교시에는 동요 선생님께 배운 ‘스승의 은혜’를 불러주었다. 요즘 아이들이 알 리 없는 이 노래를, 그 짧은 시간 안에 배워 꼬물꼬물 부르는데 어찌나 마음이 울컥하던지.
“스승의 은혜는 하늘 같아서…”
가사 한 줄 한 줄이 가슴에 와 박혔다. 그 순간, 엄마 생각이 났다.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벚꽃이 지고 민들레가 피기 시작한, 딱 이맘때였다. 연년생 두 딸을 키우며 교대를 다니던 막내딸을 돕겠다고 상경하신 친정엄마. 그런데 상경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말기암 판정을 받으셨다. 아파트 단지를 다니며 씀바귀와 민들레 이파리를 뜯으시던 엄마의 뒷모습이 아직도 선하다. 결국 넉 달 만에, 너무도 이른 나이에 엄마는 세상을 떠나셨다.

그땐 모든 걸 포기하고 싶었다. 하지만 엄마가 남긴 무언의 유언이 나를 버티게 했다. 눈물속에 2학기를 마쳤고, 그해 졸업과 동시에 임용시험에 합격했다.

사실 엄마의 꿈도 초등학교 선생님이었다. 고지식한 외할아버지로 인해 공부를 마음껏 하지 못했던 엄마는, 막내딸이 자신의 꿈을 대신 이루게 됐다며 무척이나 기뻐하셨다. 정작 교사가 된 딸의 모습을 보지 못하고 떠나셨지만.

KakaoTalk_20250521_172840768_03.jpg 3년전 제자들이 4학년이 돼서 찾아왔다.


5월, 어버이날과 스승의 날이 다가오면 늘 가슴 한편이 저릿했다. 환갑도 되기 전에 생을 마감한 엄마를 떠올릴 때마다 마음이 먹먹해졌다. 그 슬픔도 시간이 흐르며 조금씩 아릿한 그리움으로 바뀌어갔지만, 오늘 아홉 살 아이들이 불러준 노래 한 곡에 눈물샘이 터졌다.

고사리손으로 꾹꾹 눌러쓴 편지, 삐뚤빼뚤한 글씨, 색종이로 접은 하트들.
그 작고 서툰 마음들을 들여다보다 문득 그런 상상을 했다. 저 먼 어딘가에서 엄마가 흐뭇하게 내려보고 계시지는 않을까. 껌딱지처럼 붙어 다니던 막내딸을 대견하게 바라보고 계시지는 않을까.


올해 아홉살 꼬맹이들이 축하해준 스승의 날이 유독 특별한 이유.
아마도 내 인생의 첫 번째이자,
영원한 스승이 엄마라는 사실을 이제야 깨달았기 때문일 것이다.

KakaoTalk_20250521_172840768_04.jpg 작년 제자 6학년이 내려와 동생들을 번쩍 안아 교실 한바퀴씩 돌고 있다.
KakaoTalk_20250521_173713322_01.jpg 2학년의 동시
KakaoTalk_20250521_173713322.jpg 6학년이 동생들에게 하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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