옆반 선생님이 며칠째 분주하다.
방과 후엔 학부모 상담이 이어지고, 교실 복도에서는 낮은 목소리가 오간다. 짐작컨대, 학폭 문제가 생긴 듯하다.
이제는 초등 고학년이 아니라, 저학년에서도 ‘학교폭력’이라는 단어가 일상처럼 들려온다.
하지만 정작 교사들이 가장 힘들어하는 건 아이 그 자체보다도, 학부모와의 관계 맺기다.
처음으로 자녀를 학교에 보내는 부모는 아이의 말 한마디에 마음이 오간다.
나 역시 그 시절엔 그랬다.
하지만 교사가 되고 나니 분명해졌다. 문제를 겪고 해결하는 주체는 결국 아이들이며, 그 곁을 지키는 건 담임교사와 학부모다.
이 세 주체가 신뢰를 바탕으로 완벽한 삼각 공조를 이룰 때, 아이는 건강하게 자란다.
며칠 전, 수아 어머니가 학급 소통방에 사진 한 장을 올리셨다.
수아가 그린 그림이었다.
그림 속에서 ‘나영’이라는 친구가 수아의 허벅지를 발로 밟고 있었고, 수아는 “발로 누르지 말아 줘!”라고 외치고 있었다.
나영이의 말풍선엔 “흥! 난 안 했는데!”라는 말이 적혀 있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사실일 수도 있고, 아이의 입장에서 과장된 장면일 수도 있다.
하지만 분명한 건, 시작은 늘 작고 사소하다는 것.
그래서일수록 처음부터 세심하게 살펴야 한다.
나영이에 대해서는 학기 초부터 유난히 마음을 쓰고 있었다.
1학년 시절 다툼이 잦았고, ‘싸움꾼’이라는 별명까지 있었던 아이.
새 학년 선입견 없는 교실을 만들기 위해 애썼고, 나영이에겐 새 출발을 할 수 있다며 용기를 주려 노력했다. 아이도 손과 발이 먼저 나가는 습관을 고치려는 노력을 보였다.
나영이 부모님도 나를 신뢰하신다며 적극적으로 협조해 주시겠다고 하셨고, 나영이를 경계하며 걱정하시는 다른 학부모들에게도 “지켜봐 주시고 도와달라”라고 부탁드렸다.
나영이가 조금씩 변하고 성장하고 있다고 믿고 있었는데 혹여 담임의 눈을 피해 여전히 친구를 힘들게 하고 있는 건 아닐까,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직접 캐묻는 대신, 먼저 설문을 진행했다.
원래는 고학년 대상으로는 매달 학급살이 되돌아보기용으로 하던 건데 저학년이지만 이 시점엔 꼭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아이들은 예상보다도 진지하게, 자기 생각을 또박또박 써 내려갔다.
그중 1-3번 문항은 ‘칭찬 릴레이’.
“예전에는 친구를 힘들게 했지만, 지금은 달라진 친구가 있다면 써보세요.”
놀랍게도, 나영이를 언급한 아이들이 꽤 많았다.
“나영이가 정말 많이 달라졌어요.”
“화를 내거나 발로 차지 않으려고 애써요."
“요즘은 친구들이랑 잘 지내요.”
반 아이들 절반 이상이 나영이의 긍정적인 변화를 구체적으로 적었다.
수아 역시 나영이가 많이 달라졌다는 걸 인정하며,
힘들게 하거나 우리반에 도움이 필요한 친구를 써 보라는 4-6번 문항에 “그날 나영이에게 허벅지를 밟혔는데 미안하단 말을 안 해서 속상했다. 사과를 받고 싶다”라고 썼다.
그 일이 반복된 폭력이나 괴롭힘이 아닌, 일회성 사건이었으며
나영이의 변화가 교사 혼자만 느낀 것이 아니었다는 것에 사실에 안도감이 들었다.
먼저 나영의 변화에 대해 공개적으로 칭찬했다.
그리고 수아와는 따로 면담을 가졌다.
이후 두 아이가 서로의 감정을 전할 수 있도록 조심스럽게 자리를 만들었다.
수아가 하고 싶었던 말, 나영이가 몰랐던 감정들, 그리고 그날의 진심이 오갔다.
나영이에게는 따로 진심 어린 격려를 건넸다.
너의 노력을 아이들도 알고 있다는 걸,
그리고 그걸 선생님도 정말 자랑스럽게 여긴다는 걸 말해주었다.
그날 저녁, 수아 어머니와 소통했다.
그림 한 장에 담긴 걱정이 얼마나 크셨을지, 충분히 짐작된다 말씀드렸다.
어머니께서도 “세심하게 살펴주셔서 감사하다”라고 전하셨다.
작은 불씨 하나를 겨우 껐다.
교실이라는 공간은 언제든 다시 불이 붙을 수 있는 곳이니까.
그래서 교사는 늘 긴장을 늦출 수 없다.
아홉 살, 이제 막 사회생활을 시작한 2학년 아이들.
실수도 하고, 다투기도 한다.
하지만 그 안에서 스스로 풀어보며 배우는 과정이야말로 진짜 성장의 시간이다.
교사의 역할은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아이들에게 문제를 풀 수 있는 기회를 열어주고, 그 곁에서 지켜보며 도와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
그게 교사다.
혹여 누군가는 ‘학교폭력’이라는 말로 조급히 개입하고 싶어 질지 모른다.
하지만 단순한 갈등에도 어른이 감정적으로 개입하면, 아이들은 더 혼란에 빠진다.
그런 의미에서, 그림 한 장을 받고도 당장 달려오지 않고
조용히 사진 한 장만으로 신뢰를 전해준 수아 어머니께,
깊이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