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숨은 '아이' 찾기

by 포롱

“영만이 언제 와요?”

아홉 살 아이들이 일주일 체험학습을 간 친구를 손꼽아 기다린다. 멀쩡한 본명을 두고 굳이 바꿔 부르는 건 또 어디서 배웠는지 모르겠다. 하긴, 대학 시절 우리도 친구들 이름에 ‘팔’을 붙여 곽팔이, 재팔이 하며 즐겨 불렀다.

“드디어 내일 영만이 온다!”
“선생님, 우리 영만이 깜짝 파티해줘요!”
“어떻게 영만이를 반기지?”

선생님의 긍정 신호에 아이들 눈빛이 반짝인다. 어딘가에 숨어서 놀라게 하자는 건 기본. 혼자 놀다 왔으니 삐친 척하자는 기발한 제안도 쏟아진다. ‘투명인간 작전’도 거론됐지만, 혹시 영만이가 마음 상해 울기라도 할까 봐 결국 단순한 숨바꼭질로 결정되었다.

KakaoTalk_20250713_131134904_03.jpg 정장 원피스 차림으로 쓰레기통 뒤에 누워서 동영상 몰카를 찍는 선생님을 상상해보시라.

다음 날 아침. 아이들이 하나둘 등교하며 교실은 이미 잔치판이다. 가방을 구석에 밀어 두고 숨을 곳을 찾느라 분주하다. 교실에 그렇게 많은 숨을 곳이 있었나 싶을 정도다. 사물함 안에 몸을 구겨 넣는 아이, 가방 아래 고개를 파묻는 아이. 머리통과 실내화가 훤히 보이는데도 아이들은 자신만만하다. 수진이가 불을 끄자 교실은 금세 마법처럼, 텅 빈 듯 조용해졌다.

“선생님도 얼른 숨어요!”

아차, 나도 숨어야 했다. 두리번거리다 교실 뒤편 쓰레기통 뒤로 몸을 납작 엎드렸다. 그런데 앞쪽에 숨어 있던 하연이가 킥킥 웃으며 교실을 가로질러 달려와 옆에 바짝 붙는다. 아이 손을 꼭 잡고 바닥에 나란히 엎드려 숨죽였다.

복도에서 신발장 여닫는 소리가 들린다.
“얘들아, 영만이 온다. 움직임 잠시만 멈춰!”

숨소리조차 사라졌다. 옆에 붙은 하연이의 콩닥거리는 심장 소리가 들릴 만큼 고요한 순간.
문득 ‘현타’가 왔다.

정장 원피스를 입고 먼지 가득한 교실 바닥에 납작 엎드려, 아홉 살 아이처럼 들킬까 봐 가슴을 조마조마해하는 중년이라니! 풋, 웃음이 났다. 그런데 어쩌랴. 이런 게 즐거운걸.

곧 앞문이 드르륵 열리고 영만이가 조심스레 들어온다. 텅 빈 교실을 두리번거리며 몇 발짝 걷는다. 가방을 내려놓으려던 그가 뭔가 낌새를 느꼈는지 선생님 책상 쪽으로 시선을 돌린다. 조심스레 발걸음을 옮겨, 아이들이 가장 많이 숨어 있는 TV 아래 구석으로 다가간다.

그 순간.
킥킥, 킬킬, 와르르!
사방에서 아이들이 쏟아져 나왔다.

누군가 불을 켰고, 웃음과 목소리, 깔깔대는 무용담이 환하게 퍼져나갔다.
잠깐이었지만 진짜 축제 같았다.


KakaoTalk_20250713_130755272_01.jpg
KakaoTalk_20250713_130755272_03.jpg 친구에게 들키자 우르르 쏟아져나온 아이들.



문득 오래전, 미국에서 보낸 할로윈이 떠올랐다.

낯선 가을. 시골 대학 마을은 온통 호박등으로 물들어 있었다. 슈퍼마켓엔 천사 날개, 해적 칼, 괴물 가면이 넘쳐났고, 집집마다 유령과 마녀, 해골 장식이 대문 앞을 지켰다. 아이들은 ‘트릭 오어 트릿’을 외치며 캔디 바구니를 들고 골목을 누볐고, 우리 집 거실에도 동네 아이들이 끊임없이 들락거렸다.

그날 밤, 놀란 건 아이들만의 열기가 아니었다.
근엄하던 옆집 할아버지는 슈퍼맨 복장을 하고 사탕 바구니를 들고 있었고, 단정하던 줄리 엄마는 유령 분장을 한 채 아이들 앞에서 “으악~!” 하고 소리쳤다. 어떤 집 마당에서는 안개 머신이 뿜어내는 연기 속에 좀비 분장한 주인이 웅크리고 있었다.

어른도 아이도, 모두 진심이었다.
아이들보다 더 아이 같은 어른들.
바쁘고 무거운 삶의 외투를 벗고, 오래전 서랍 속에 넣어두었던 동심을 꺼내 걸친 그들은 더없이 자유로워 보였다.

할아버지의 주름진 이마 위에도, 유령 복장의 엄마 얼굴 위에도
어린 시절의 웃음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동심은 어릴 때만 머무는 감정이 아니다.
우리 마음 어딘가에 아직도 숨 쉬며 웅크리고 있다.
다만 삶에 치여 꺼내는 법을 잊고 살고 있을 뿐이다.

정장 원피스를 입고 교실 바닥에 엎드려 숨죽인 채, 아홉 살 하연이 옆에서 들킬까 두근거리던 그 순간

아홉 살로 돌아간 내가 있었다.

어쩌면 교실은 작지만 깊은 마법의 공간이다.
배움만 오가는 곳이 아니라, 어른도 다시 아이가 되는 비밀 통로.
아이들과 함께 숨고, 웃고, 장난치며 그 통로를 다시 발견했다.


가끔은 ‘숨은 아이 찾기’를 해보자.
책상 뒤나 쓰레기통 옆, 혹은 마음 한 구석 어딘가에서
순진무구한 웃음 한 자락이 아직도 웅크리고 있을지 모르니.

그 짧은 숨바꼭질 끝에서
다시 웃을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지 않겠는가.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그림 한 장의 의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