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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롱쌤 Mar 14. 2024

선배맘의 반성문


“선생님, 어제 배웠던 ‘행감바’ 돌봄교실 가서 2학년 언니한테 말했어요.”

“진짜? 그래서, 2학년 언니가 사과했어?”

“사과는 아니고 ‘알았어’ 한마디 했어요.”

“너가 뭐라 했는데?”

“언니가 ‘하지 말라’고 한 거 기분 나쁘다고 친절하게 얘기해달라고 했어요.”

“아~~ 그래, 잘했어. 아마 2학년 언니가 사과하는 법을 몰라서 그냥 그렇게 말했을거야.”

하나를 가르쳐주면 고대로 해보려고 모습, 사랑스럽다.


 이번주 두 번째 그림책은 ‘무지개 물고기’다. 대부분의 아이들이 벌써 읽어봤다며 다 아는 얘기라고 했다. 선생님은 좋아하는 책은 또 읽고 또 읽는다고 했다. 이내 그림과 이야기 속으로 쏙 빠져드는 아이들. 

“선생님, 멋진 비늘로 뒤덮인 물고기보다 화려한 비늘 다 나눠주고 친구들과 어울리는 모습이 더 아름다워요.”

“선생님이 문어 할머니 목소리가 진짜 할머니 같아요.”

“우리가 만든 대왕문어가 책에도 나왔어요.”

 기부 천사 김밥 할머니 얘기도 해줬다. 평생 김밥 한 줄씩 팔아서 한 푼 두 푼 모은 큰 돈을 돈이 없어 공부를 못하는 학생들을 위해 아낌없이 기부 했다고 하니

“아, 물고기가 무지개 비늘을 나눠 주고도 행복했다고 하더니 그 할머니도 그랬나봐요.”

“선생님, 그래도 내가 먹을 건 남겨 놓고 다른 사람 줘야 하는 거죠?”

갑자기 웃음이 나온다. 아끼는 걸 친구들에게 줘야 한다고 생각하니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가보다. 

“그럼~ 친구들이 뭘 달라고 할 때도 너 껀 빼놔야지.”

이제야 안심하는 눈치다. 

 물지개 물고기 이야기의 한 장면을 색칠하며 금박지 은박지로 꾸며보라 했다. 물고기를 좋아하는 **이는 아침부터 흥분 상태다. 어제부터 보조 선생님이 코로나 확진으로 출근을 못하고 계시다. 그 빈자리를 친구들이 훌륭하게 채워주고 있다. 꼭 동생을 챙기듯이 어르고 달래면서 말이다. 날마다 아이들은 쑥쑥 자라고 있다. 


수업이 끝나면 아이들 절반 정도는 돌봄으로 간다. 나머지 친구들은 교문까지 보호자께 인솔한다. 아이들은 차분하게 줄 서서 잘 나가다가도 엄마 아빠 얼굴을 발견하면 바로 달음박질이다. 몇시간도 안되는 짧은 이별을 보상이라도 받으려는 듯 얼굴 가득 환한 미소를 띠고서는 품에 와락 안긴다. 할머니, 할아버지 손을 잡고 가는 친구도 더러 보인다. 긴장 가득한 학교 적응기간을 늦은 시간까지 돌봄교실에, 그리고 조부모님의 손에 맡기는 부모님 마음은 또 얼마나 안쓰러울까.


 나도 직장맘으로 연년생 두 딸을 키웠다. 출산휴가도 법적으로 보장되지 않았던 시절이라 두 달만에 일터로 끌려 갔다. 목도 제대로 못가누는 핏덩이들은 아래층 아주머니에게 맡겨졌다. 그러다 두 돌 후부터는 줄곧 놀이방과 어린이집, 유치원 종일반을 전전했다. 두 딸은 어린이집에서도 늘 마지막까지 남아 있었다. 퇴근 후 서두른다고 서둘러도 맨날 꼴찌로 집에 가기 일쑤였다.

어느 날이었다. 퇴근시간이 훌쩍 지났는데 부장이 업무지시를 또 내렸다.(당시 난 교직이 아닌 일반 회사에 근무하고 있었다.)

“선배, 저 지금 퇴근해야 하는데요.”

묵묵부답. 무심한 남자 부장이 애 키우는 후배의 마음을 알 턱이 있나. 결국 1시간 30분이나 늦게 갔다. 허둥지둥 어린이집으로 달려가 보니 작은 딸은 현관문에 매달려 엄마를 찾으며 엉엉 울고 있고 큰딸도 동생이 우니까 소리는 못내고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퇴근 시간을 훌쩍 넘긴 선생님께 연신 죄송하다며 허리를 굽신거리고 나오는데 나야 말로 두 다리 뻗치고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날 진지하게 퇴사와 이직을 고민했다. 결국 큰딸이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 회사를 그만두고 교대를 다시 들어갔다. 30대 늦깎이 대학생이 되어 공부에 바빴던 시절. 큰딸과 작은딸의 초등학교 1학년 뒷바라지는 남편이 했다. 부서까지 바꿔가며 딸의 학교 숙제를 봐줬다. 1학년한테 해오라는 것들이 왜 이리 많냐며 이런 건 모두 부모 숙제라고 남편은 투덜거렸다. 점심시간 양복차림으로 학교로 달려가 급식 퍼주고 교실 청소까지 했던 얘기, 엄마들 사이에서 청일점 보호자로 활약하던 일을 지금도 무용담처럼 한다. (당시엔 학부모가 교실에서 급식 배식을 하고 청소도 학부모들이 번갈아 했다)


 교대 졸업 후 교사가 됐지만 별반 달라진 것은 없었다. 딸들은 엄마 퇴근시간에 맞춰 늘 학원을 돌았다. 늦은 퇴근은 없었지만 집에서 까지 컴퓨터 앞에서 수업 준비 하는 마누라 뒤통수에 대고 남편은 외쳤다. “자기 자식은 내팽개치고 지금 누굴 가르치겠다고 하는 거야!” 들어본 말 중에서 젤 아픈 말이었다.


 세월이 많이 흘렀다. 우리 반 아이들을 본다. 그리고 또 부모님들을 본다. 학교 돌봄은 충분치 않고 지역 돌봄 센터도 턱없이 부족하다. 여전히 많은 아이들이 학원으로 공부방으로 헤맨다. 양육과 교육은 여전히 부모 몫이다.  우리 사회의 더딘 변화가 미안하다. 선배로서 변화와 개혁에 앞장서지 못함을 절실히 반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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