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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롱쌤 Jun 03. 2023

손녀 국어책으로 한글 공부하시던 시어머니

요양병원 어머니와의 옛추억...막내 며느리와 비밀 공유

  처음 상견례를 하던 날, 예비 시어머니 표정은 굳어 보였다. 사돈끼리 만나 예식 날짜와 장소를 정하는 자리, 진주 어느 허름한 식육식당에서 먹는 쇠고기가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몰랐다. 상견례를 마치고 오는 길에 친정엄마가 걱정 섞인 한마디를 하셨다.

“바깥 시어른 참 점잖아 보이시네. 시어머니는 어찌 보면 좀 깐깐하시려나….”


 시어머니를 두 번째로 만난 자리는 예식을 올리던 방송국 로비에서였다. 파란 한복을 곱게 차려입으신 어머니의 얼굴이 상기돼 있었다. 신부 대기실로 오셔서 옅은 미소를 띠시길래 나도 웃어 보였다.      


 신혼여행을 다녀온 후 5시간을 달려 도착한 시댁. 이름도 촌스러운 경남 산청, 생초 옆 오부 양촌리. 이제 막 결혼한 스물여섯 살 신부가 한복을 차려입고 큰절을 하는데 몸이 기우뚱했다. 고모님, 이모님, 큰어머니들, 사촌 형님들, 동네 아지매들, 저마다 구수한 경남 사투리로 한마디씩 하는데 같은 경상도 출신이지만 억양이 달라 못 알아듣는 말이 태반이다. 모두 만 쳐다보는데 ‘나는 왜 여기에 지금 이 차림으로 있는 걸까’, ‘시간아 빨리 가라’, ‘엄마 보고 싶다’… 속으로 중얼중얼 거렸다. 하지만 행여 시댁 식구들에게 밉보일까 생긋생긋 웃느라 볼에서는 경련이 일어날 지경이었다.

그때 어디선가 소곤대는 목소리.

“키가 쫌 작네.”

“......”

분명 이쁘다 참하다 뭐 이런 말도 하셨던 것 같지만 ‘키가 쫌 작네’, ‘키가 쫌 작네’, ‘키가 쫌 작네’ 그 말이 귓가서 메아리 되어 맴돌았다. 분명 시어머니 목소리는 아니었다. 그런데 나는 벌써 그곳의 모든 친척들이 시어머니처럼 보였다. 신방에는 신랑 각시가 먹을 음식들이 상다리가 휠 정도로 차려져 있었다. 시어머니가 밤잠 설치며 몇날 며칠을 준비했을 그 음식을 눈물을 삼키며 먹었다.

 ‘아들이 방송국 다니니까 탤런트 같은 며느리를 데려올 줄 알았나 보지? 시어머니는 날 싫어하셔.’     


 낯설고 서먹했던 시어머니가 마술처럼 친밀하게 느껴진 건 큰딸이 태어난 후였다. 내 뱃속으로 낳은 딸이 어쩜 그리 시어머니를 똑 닮았는지 신기했다. 얄쌍한 눈에 나지막한 코. 갸름한 얼굴, 길다란 팔까지 판박이였다. 키 크고 늘씬한 탤런트 같은 며느리를 꿈꿨던 시어머니도 첫 손녀를 본 후 조금씩 살갑게 내게 다가오셨다.

 “서현아~(어머니는 나를 한동안 이렇게 불렀다), 뭐 좀 줄까. 양파 한 망 가져가라, 감자도 가져가고.”     

 

 어머니와의 본격적인 화해는 큰딸 첫 돌 무렵 목동 집에 오셨을 때다.

“어머니 국수 말아 드릴까요?”

“니가 그런 것도 할 줄 아나?”

“그럼요! 얼마나 잘한다고요.”

“그럼 한번 해봐라.”

 내가 누군가? 손맛 좋은 우리 엄마 딸인데 국수쯤이야! 늘상 하던 메뉴인데 시어머니 앞에선 이상하게 떨렸다. 애호박을 볶고 김치를 썰고 오이를 썰고 지단을 부치고. 멸치 다시마 육수에 국수를 넣고 갖가지 재료를 올리고 고명까지 올리니 그럴싸한 한 상이 차려졌다.

“어머니, 맛이 있을지 모르겠어요.”

어머니는 후루룩 국물까지 비우셨다.

“이런 거는 누가 가르쳐 주대? 제법이다”

 시어머니는 키 작고 평범한  막내 며느리 국수 한 그릇에 홀라당 넘어가버렸다.     


 첫 딸이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연년생 둘째까지 학교를 다니기 시작했을 무렵이다. 추석을 앞둔 어느날, 느닷없이 어머니께서 전화를 하셨다.

“서현 애미야, 내려올 때 서현이 1학년 때 공부하던 국어 교과서 좀 가져오이라.”

“네? 어머니??? 네!”

“내가 공부 좀 할라고 그런다.”

“아~ 네~.”

퇴근한 남편에게 어머니 얘기를 했더니 어머니는 초등교육을 받지 못해서 글자를 모른다고 했다. 며느리에게 부끄럽고 창피했을 법한데 어머니의 고백과 용기가 놀라웠다. 딸들의 국어 교과서와 열 칸 공책까지 챙기니 한가방이었다.

추석 때 만난 어머니는 멋쩍게 웃으셨다.

“어머니, 열심히 공부하세요. 음에 와서 받아쓰기 할거예요.”

“아이가, 야가 날 놀리네.”  


 들일, 밭일에 시부모 봉양하며 육남매까지 키우느라 숨 가쁘게 달려온 당신의 인생. 평생 일만 하시다 나이 일흔에서야 오롯이 자신을 쳐다볼 시간이 났을 것이다. 어머니께서 코흘리개 손녀들의 국어책으로 얼마나 글씨 공부를 했는지, 글자는 깨치셨는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평생 한이었을 배움에 대한 갈증을 조금이라도 풀었는지 궁금할 뿐이다.      

어머니가 아프신 후 고향집서 발견한 한글 노트.
어머니께서 손녀가 쓴 이 글을 읽었을까. (큰딸의 1학년 국어책)

 그날 이후 나도 어머니가 좋아졌다. 이따금 정체 모를 감정이 불쑥불쑥 튀어나와 힘들었는데 어머니와 비밀(?)공유로 그런 오해가 눈 녹듯 사라져버렸다.

“어머니 살결이 참 고와요, 서현 아빠가 어머니 닮아 속살이 저보다 좋아요.”

“그래? 함 볼래? 뽀얗지? 햇볕에 그을려서 그렇지 내 젖은 아직도 이쁘다.”

윗옷을 쓱 올리시는 어머니.

“어머니 한번 만져 봐도 돼요?”

“그래, 만져봐라.”

“아이구, 좋아라.”

어머니의 순박한 웃음을 보며 딸 같은 며느리가 되리라 다짐했다.      


 요양병원에 천정만 바라보고 누워계신 어머니를 볼 때마다 그날의 어머니가 생각난다. 국수를 맛있게 드시던 어머니, 한글을 또박또박 쓰며 공부하던 어머니, 웃옷을 올리며 내 손을 잡아댕기던 어머니.

 초겨울날 혼자서 김장 수백포기를 하지 않았더라면, 아니 고혈압약을 처방만 받았더라면, 한글을 줄줄 읽고 쓸 수 있어 병원을 혼자 갈 수 있었더라면, 우리가 그렇게 무심한 자식들이 아니었더라면......

 뒤늦은 후회와 슬픔으로 우울한 날이다.      


* 참고로 어머니의 실망, 화해, 비밀은 나 혼자만의 시나리오였을 것이다. 어머니는 늘 그 자리에 한결같은 모습으로 그렇게 계셨을 뿐인데, 나 혼자 오해하고 풀고 사랑하고 존경했음을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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