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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곰 Nov 27. 2024

누구나 틀릴 수 있다면서 왜 난 완벽해야 할까?

어릴 적부터 미술에 재능이 있었던 나는 처음에는 남들의 기대에 부응하고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부모님의 인정과 미술 선생님의 칭찬을 받으면서 나는 미술을 계속 이어갔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그림은 단순한 기쁨의 대상이 아닌, 외부의 평가를 받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했다. 어느 순간, 미술은 예술의 순수한 형태를 넘어 직업적 도구로 변화하기 시작했고, 즐거운 창작은 뒷전으로 밀려나 타인의 평가와 인정에 맞춰지는 괴로운 작업이 되어버렸다. 이러한 변화는 내게 큰 압박감과 함께 점점 더 깊은 갈등을 불러일으켰다.


미술로서의 완벽함을 이루기 위해 나는 스스로를 더욱 혹독하게 다루었다. 야근과 지속적인 배움을 강조하며 스스로를 채찍질했고, 누구에게도 무시받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나를 몰아세웠다. 미술은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라고 생각했기에, 그 분야에서 완벽해야만 한다는 압박감은 더욱 강했다. 완벽해야 한다는 내 자신에 대한 요구는 내 삶을 지배하는 강박으로 자리 잡았고, 마치 내가 다른 사람들의 기대에 맞춰 완벽을 이루지 못하면 나의 가치가 없다는 듯이 느껴졌다.


완벽주의는 심리학적으로 세 가지로 나뉜다고 한다.  

    자기 지향적 완벽주의: 이는 지나치게 자신을 강요하며 극단적인 자기비판과 결함을 용납하지 않는 성향으로, 스스로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면 가혹한 비난과 경멸, 비하를 자신에게 쏟아붓는다. 쉽게 말해,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는 완벽주의이다.  


    사회 처방적 완벽주의: 타인에 의해 완벽함이 강요되고, 그 기준에 도달하지 못할 경우 남에게 버려질 거라고 믿는다. 사회 처방적 완벽주의는 타인이 해당 기준을 쉽게 충족하는 반면, 나는 못 미친다고 스스로를 질책하며 자신을 작게 느끼게 만든다.  


    신경증적 완벽주의: 지나치게 높아진 기준으로 인해 목표를 달성할 수 없다는 느낌이 들게 하며, 실제로 성공했을 때도 좌절감을 느끼게 한다. 항상 ‘모 아니면 도’라는 사고방식에 빠져 아예 아무것도 하지 않거나 극단적인 무기력에 빠지게 되며, 심한 경우 우울증이나 섭식장애, 자살 충동까지 초래할 수 있다.  


나는 대학교에 미술로 입학하지 못했을 때, 자기 지향적 완벽주의로 스스로를 비난하며 끊임없이 괴로워했고, 취업 후에는 사회 처방적 완벽주의로 인해 매사에 타인의 기대를 충족해야 한다는 압박에 시달렸다. ‘경력 있는 신입사원’이라는 수식어를 원했던 것도 남들에게 인정받고 싶어서였다. 이 모든 것이 결국은 나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닌 남의 시선을 위한 것이었음을 깨달았다.


하지만 지금 나는, 완벽하지 않아도 된다는 유동적인 사고방식을 배워가고 있다. 비록 완벽주의자에게는 익숙지 않은 개념이지만, 삶에는 정해진 길이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면서 스스로의 시선에 따라 삶이 달라질 수 있음을 느끼고 있다. 실패의 이유에만 시선을 맞추면 그것만 보이고, 성공에 초점을 두면 성공적인 면만 보이게 되는 것처럼, 우리는 보고 싶은 것을 보고 살아간다. 결국, 삶에는 하나의 정답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깨달음이 무섭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 유연함이 나에게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 주기도 한다.


꽃을 예로 들어보면, <꽃 해부 도감>에서는 식물에게 꽃은 단지 후손을 남기기 위한 생물학적 도구일 뿐이라고 말한다. 꽃은 우리가 느끼는 아름다움의 상징이 아닌, 식물이 생존하기 위해 애쓴 결과라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꽃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해 빨간 장미에 ‘사랑’과 ‘열정’을, 보라색 장미에 ‘영원한 사랑’과 ‘불완전한 사랑’을 부여한다. 생물학적 관점에서 꽃은 단지 식물의 한 부분에 불과할지라도, 우리는 꽃에 특별한 감정을 담아 선물하고, 그 꽃말 속에서 삶의 의미를 발견한다.


그러니 꽃을 ‘쓸모없는 선물’이라 말하는 사람의 시선도 이해할 수 있지만, 반대로 아무런 정답이 없다는 생각 속에서 꽃을 선물하는 것이 아무 문제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쓸모없는 꽃이라면 다른 선물을 주면 되는 것이고, 꽃에 의미를 두고 싶다면 더 아름다운 꽃을 고르면 된다. 마찬가지로, 성공하지 못한 내 삶에 대해 고민하고 의미를 찾는 것도 부정적인 과정이 아닌 자연스러운 자기 탐색의 여정이 될 수 있다. 미술이 나와 잘 맞지 않으면 다른 것을 찾아보듯이, 상황에 따라 나의 시선과 방향을 유동적으로 바꾸는 것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완벽주의자에게 ‘유동적’이라는 단어는 낯설고 어려운 개념이다. 여행을 계획하고 떠나는 사람과 무작정 떠나는 사람이 둘 다 훌륭한 여행을 할 수 있는 것처럼, 삶 역시 정답 없는 여정이다. 일에서 스트레스를 받는 사람도 있고, 성취감을 느끼는 사람도 있다. 이제는 정말 삶에는 정답이 없다는 사실을 조금씩 받아들이고 있다. 내가 무엇을 선택하든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면 그 선택은 문제가 없다. 민트 초코를 좋아한다고 해서 누군가에게 해가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결국, 나라는 존재가 너무나 작게 느껴지고 무의미하다고 여겨질 때, 내가 무엇을 바라보고 있는지가 내 삶의 방향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인이 될 것이다. 사소해 보이는 꽃 한 송이도 남과 나를 구분짓는 중요한 요소가 될 수 있다. 무의미해 보일 수 있는 나의 수식어들이 결국 나를 정의하는 중요한 결정 요소일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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