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누구일까? 아마 최초의 인류도 이 질문을 던졌을 것이다. 390만 년 전, 인류가 스스로 생각하기 시작한 이래로 2024년에 이른 오늘날까지도 우리는 여전히 이 질문을 던지고 있다. 그렇다면 이토록 오랜 질문의 끝이 보이지 않는 이유는 나라는 존재가 정의될 수 없는 것이라는 의미일까? 어쩌면 '나'는 단일한 정의로 규정될 수 없는 유동적인 존재인지도 모른다.
같은 지구, 같은 서울에서 똑같이 20년을 살아왔더라도, 사람마다 경험과 목적이 다르다. 누군가는 꽃을 사랑하지만, 누군가는 꽃을 사치품으로 여긴다. 이처럼 각자의 삶이 다르게 정의된다고 할 때, '꽃'이라는 대상도 각자의 시선에서 다르게 해석될 것이다. 정의된다는 것은 결국 하나의 관점에서 고정되는 것을 의미하기에, '나'를 정의하려는 시도는 끝없이 변화하는 내 삶을 고정하려는 무의미한 노력이 아닐까?
나는 이 정체성 탐구의 과정을 하나의 '수식어를 찾아가는 여정'이라고 생각한다. 게임 속 캐릭터는 서로를 구분하기 위해 이름을 가지고, 더욱 개성 있는 표현을 위해 별명을 붙인다. 예컨대 "보라맛 콜라색 xxx 소환사"와 같은 이름이 주는 의미는 크지 않지만, 자기 자신을 특별하게 표현하는 하나의 수단이다. 그러나 현실의 삶에서 의미 없는 수식어는 신뢰를 떨어뜨린다. 현실에서는 ‘사실에 근거한 수식어’를 가진 사람이 신뢰를 얻는다. 회사 명함에 적힌 "xx기업 팀장 xxx"처럼, 현실의 수식어는 우리의 지위와 역할을 객관적으로 보여주는 일종의 증명서다. 나라는 사람을 남들과 구별하기 위해, “신입사원”보다는 “경력 있는 신입사원”과 같은 수식어가 필요해 보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러나 이처럼 사실에 근거해 살아가는 현실은 때로 회의감을 준다. 누구나 성공한 삶을 살고 있지는 않기 때문이다. 성공과 성공하고자 하는 마음은 다른데, 사실에만 근거한 삶이라면 성공하고 싶다는 열망조차도 현실에 반하는 희망에 지나지 않게 보일 수 있다. 이 때문에 우리는 실수를 하거나 우울감에 빠질 때마다 방향을 잃고 혼란에 빠지는지도 모른다. 그 누구도 "우울한 사람 1"이라는 수식어를 가지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내 인생의 수식어는 무엇일까? 나는 미술로 시작해 입시 과정을 거쳐 디자인을 전공했고, 지금도 디자인을 하고 있다. 하지만 내가 창조한 디자인에는 내가 원하는 의미가 담기기보다는, 클라이언트의 요구가 주된 의미로 담겨 왔다. 그래서 종종 나는 클라이언트의 도구로서 존재하는 느낌을 받는다. 그렇다면 나는 그저 "클라이언트의 도구 xxx"인가? 아니면 연봉 "xxxx만 원을 받는 디자이너"인가?
세상이라는 비교 대상으로 보면 나는 80억 명 중 한 명일 뿐이며, 우주라는 거대한 틀에서 보면 1천7백억 개 은하에 속한 1천7백억 개의 행성 중 한 행성에서 살아가는 80억 명 중 하나일 뿐이다. 이토록 거대한 스케일 속에서 나는 어떤 수식어를 지닌 인간이어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