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치원 때 선생님이 내 꿈을 물어본 적이 있다. 당연히 유치원생이었던 나에게는 꿈이라는 말조차 생소했고, 그 의미 역시 알지 못했다. 그저 되고 싶은 것이라고 설명을 들은 기억이 있는데, 이 되고 싶어 한다라는 말 자체는 너무나 어려웠다. 무엇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무엇을 잘하는지 등등 헤아려야 할 것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제일 어려웠던 것은, (물론 지금도 어렵지만), 내가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아는 것이다. 그렇게 나는 꿈을 적지 못했다. 꿈을 말하지 못했다. 꿈을 가지는 게 꿈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초등학생 때는, 장래 희망이라는 단어가 날 힘들게 했다. 마찬가지로 그런 건 없었다. 내가 하고 싶어 하는 것들은 그때그때 바뀌고, 하고 나면 하고 싶었던 마음이 사라지기도 해서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냥 엄마가 적으라는 걸 적었다.
외교관.
그래도 그때에 난 엄마가 영어 학원은 꾸준히 보내는 편이었고, 나도 그렇게 싫어하지는 않았다, 영어를. 그래서 나의 장래 희망은 외교관이 되었다.
그 일이 무슨 일인지도 모르고 말이다. 그래도 뭐라도 적어낼 게 있어서 다행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대한민국의 교육은 계속해서 꿈으로 나를 괴롭혔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나의 꿈을 물어보지 않은 곳이 없었다. 꿈이 마치 일종의 입장 자격인 것처럼 말이다.
그래도 초등학생 때보다는 머리가 점점 커지기 시작해서 나름 생각이라는 것을 해봤다.
초등학교 고학년이었을 때는, 운전하는 사람이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특히나 택시 기사분들을 보면 사람들을 자주 만나고, 이 커다란 기계를 조종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정말 멋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택시 기사, 대리 기사를 꿈이라고 적었다.
중학교 때는 회사원이라고 적었다. 주위 친구들의 부모님들이 모두 회사원이셨으니까. 그때는 당연하게 어른이 되면 나는 회사원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솔직히 반대로도 생각했다. 회사원이 되어야 어른이 되는 것이라고. 그래서 장래 희망으로 회사원을 적었다.
중학교 2, 3학년 때는 그래도 재밌는 것들에 대해서 생각하기 시작했다. 물론 하고 싶은 것은 여전히 헷갈렸지만, 적어도 지금까지의 경험을 통해 내가 특정 활동을 할 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하는 것들을 생각해 보았다. 농구였다. 나름 농구를 오래 해오기도 해 왔고, 제일 행복했다. 어디서든지 농구공 튀기는 소리가 들리면 그 즉시 가슴이 설레었으니까. 그래서 농구 선수를 생각해보기도 했지만, 그것은 확실히 재능의 영역이었고, 객관적으로 나는 그 정도의 재능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 포기했다.
그래서 농구를 운동의 한 영역이라고 생각했기에 체육에 관심이 생겼다. 그러던 도중, 친해진 반 친구, 공부를 상당히 잘하는 친구 덕에 한국체육대학교라는 곳을 알게 되기도 했었다.
솔직히 이제 와 생각해 보면, 그렇게 한체대를 준비하는 것도 지금의 내가 보았을 때는, 스스로의 인생을 선택하는 것이기 때문에 칭찬해주고 싶고, 응원해주고 싶지만, 그때의 나에겐 뭐랄까, 대부분의 분야에서 평범했고, 대부분의 것들을 귀찮아했다. 나의 목표마저. 그래서 사실 목표 수준도 아니었고, ‘그런 방향도 있네’라고 인지하는 정도에 불과했다.
그렇게 고등학교에 들어왔다.
고등학교 역시 입장 티켓인 나의 꿈을 묻긴 했었다. 다만 초등학교 중학교와 다른 점은, 성적에 따라 그 티켓의 크기가 작아지기도, 커지기도 한다는 점이다. 물론 이 티켓은 남에게 보이는 것이 아니라 자신만이 볼 수 있는 티켓이다. 그리고 그 티켓의 관리는 오직 스스로에게 맡겨진다.
나는 그렇게 티켓을 잘 관리하는 학생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티켓을 함부로 하는 학생도 아니었다. 아마 그랬던 이유에는 티켓을 잘 관리하지 않으면 나중에 추운 곳에서 춥게 일하고 더운 곳에서 덥게 일하고 힘든 일만 한다고 귀가 빠지도록 들었던 것이 큰 영향을 끼쳤을 테다. 그리고 그 기회는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고 들었다. 그래서 무서웠다. 남들 하는 만큼이라도 하지 않으면, 남들은 학원을 다니니까 나도 다니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학원은 일종의 안전장치였다. 그래도 100%는 아니더라도 0%도 하지 않은 건 아니라는 의미도 없는 정신적 위로.
그래서 꿈이 의미가 없었다. 아니 정확히는, 나의 꿈은 사라졌다. 누군가에겐 꿈이 큰 동기가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더욱 티켓을 열심히 관리했을 테니까. 실제로 그런 친구들은 있었고,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한편으론 궁금했다. 저 녀석이 되고 싶어 하는, 하고 싶어 하는 것에 저 녀석은 스스로 확신이 있을까? 난 없는데. 부러웠던 것 같다.
그저 남들이 하는 행동을 따라만 하는 시늉. 티켓을 잘 닦고 관리하고 이쁘게 꾸미는 척. 그렇게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나는 애매해졌다. 목표 없이 그저 해류의 방향대로, 군집의 방향대로 움직이는 해조류. 그게 나였다.
당시의 내 유일한 낙은, 아니 어쩌면 당시의 유일하게 나의 존재감이 존재하던 시간은 학원이 끝난 후 친구들과 2,30분 동안 편의점에서 컵라면과 삼각김밥을 먹는 시간이었다. 그 2,30분은 살아있는 시간이었다.
물론 알고 있다. 그래도 나름 열심히는 티켓을 관리한 편이고, 더 열심히 성실히 관리를 하는 친구들에게 당연히 우선권이 부여되어야 한다는 것을. 그것이 공정한 것임을.
그래서 나처럼 방향이 없는 화살은 그 어느 곳에도 그 점수를 기록하지 못하고 바닥에 떨어져 버리고 만다는 것을.
애초에 화살이 아니라 종이비행기였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내 고등학교 시절의 꿈은 없다. 내가 애매하게 가꾼 티켓의 크기, 깨끗함의 정도에 따라 정해지는 꿈도 꿈이라면 꿈은 있었다. 하지만 그 꿈은 내가 생각하는 꿈의 본질은 아니었다.
나름 불만도 있었다. 왜 이렇게 티켓을 병적으로 관리하라고 하는 지를 몰랐다. 다만 그것을 하지 않았을 때의 상황을 겁주다 보니 하게 되었을 뿐.
당시의 나를 요악하자면,
반항은 하고 싶지만 그럴듯한 이유도, 결론도 없는 혼자만의 반항 심리,
논리적으로 불평, 불만하고 싶지만 그러기엔 너무나 빈약한 논리,
동시에 티켓을 잘 관리하는 녀석들에 대한 부러움.
반항적인 척하는 순응주의자,
그게 나였다.
이제와 좀 생각이 달라지긴 했다. 물론 어떤 모습의 내가 되었으면 하는 질문도 꿈을 파악하기엔 좋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꿈은 ‘귀찮지 않은 것이 무엇인지’가 중요하다. 지극히 주관적인 생각이자, 경험이지만, 꿈이라고 생각했던 거창한 것들은 생각보다 현실의 귀찮음한테 아주 쉽게 그 기세가 부러진다. 그래서 귀찮음을 극복할 정도로 하고 있는 행동들이 무엇인지 묻는 것이 중요하다.
만약, 꿈의 정의가 ‘미래의 내가 되고 싶은 모습’이라면, 나 역시 꿈이 꽤나 있었던 놈이었다.
요리사도 재밌을 것 같았고, 패션 MD도 재밌을 것 같았다. 운동선수도 재능만 있으면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 어떤 거에도 재능이 없음을 알았다. 그리고 그 재능 없는 것들이 귀찮음을 이기는 것은 상당히 힘들었다.
그렇게 평범하게 살고 있다.
그렇다면 묻고 싶다.
누군가에게는 도망친 사람의, 실패한 사람의, 나태한 사람의 비겁한 변명이자 궤변으로 들릴 수 도 있겠지만, 지금 나는 정말로 궁금하다.
우리 모두는 재능이 있어야 할까? 애당초 모든 사람이 재능이 있다는 것이 말이 될까?
당연히 특정 부분에서는 평균보다는 앞에 있을 수 있지만, 그 외 분야 대부분들은 아닐 확률이 높다.
평범하게 살면 안 되는 걸까?
멋있어 보이는 목표.
멋있어 보이는 계획.
부럽다. 당연히 시기 질투가 아닌 박수를 받아야 함이 마땅하다.
그렇다면 그 계획과 목표가 없다면
끌어 내려져도 되는 것일까?
박수는 바라지도 않는다.
관심? 없는 걸 알지만 더욱 없었으면 좋겠다.
누군가는 리더가 되겠지만
이끌릴 다른 부품들도 필요한 법인데
대한민국은 평범한 것들을 마주하면
‘아..’ 하는 경향이 있다.
내세울 목표와 계획은 없지만 나름대로 현상 유지라도 하려 노력 중인데 말이다.
우리는 기준을 좋아한다.
상 중 하
앞 중간 뒤
인서울 대학교
우리는 숫자도 좋아한다.
상위 몇 %
하위 몇 %
우리는 줄 세워지는 것을 좋아한다.
우리는 우리가 그것들을 싫어한다 해도 내심 평균보다 높으면 안도의 한숨을 뱉는다.
줄 앞의 맨 첫 번째 사람에게는 경외의 박수를 쳐주고 싶다.
녀석은 그런 대우를 받을 만하다.
줄 뒤의 맨 마지막 사람에게는 압도적인 무관심을 주고 싶다.
그게 녀석에 대한 존중이니까.
지금의 우리들에겐 서로 무관심해져야 할 필요가 있다.
꿈이 없어 보여도, 목표가 없어 보여도, 계획이 없어 보여도.
우리는 우리도 모르게 우리의 경험과 배운 지식들을 통해 남들을 “설득”하려 한다.
참 오만도 하다. 우리가 뭐라고.
그렇기에 난 앞으로의 모든 것들, 사람들에게도 그 어떤 가치 평가도 하지 않고 싶다.
그 무관심이 되려 최고의 존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