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새벽 은호는 호텔 산책로를 걸었다. 하루 중 그나마 자유로울 수 있는 시간이다. 엄마의 참견도, 현정이의 견제도, 차정민의 미련에도 오롯이 벗어날 수 있는 이 짧은 자유를 만끽한다.
되도록이면 주변 사람들로부터 벗어나려 하지만 어제 큰 일 때문에 이리 휘둘 저리 휘둘 하는 은호다.
한선호가 아니라 자신이 엄마의 초이스가 된 것도, 사랑했던 남자 차정민을 떠나보낸 것도, 절친에서 불편한 스탭이 된 현정이도... 그 모든 면면에 은호의 선택은 단 하나도 없었다. ‘선택당했다’는 죄로 입은 막히고 발은 묶였다.
특히 한선호는 이렇게 생각할 테지.. ‘어쨌든 선택된 것은 너이니 입을 다물라’. 그놈의 선택, 누가 해달랬나. 과잉과 결핍은 한 끗 차이라는 거 한선호가 알기나 할까. 끝까지 넌 억울하기만 할 테지.
은호의 걸음 뒤로 누군가의 기척이 느껴졌다. 굳이 돌아보지 않아도 안다. 차정민이겠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 채 차대표는 은호의 안전을 지킨다. 은호가 뒤를 홱 돌아보니 역시나 차대표가 멈칫 섰다.
“신유민 알지?”
생뚱맞은 질문에 차대표는 “응?” 한다.
“신유민이면 걔잖아, 하이틴 탑티어 연주자.”
“우리 회사로 오고 싶대. 뭘 어떡해야 할지 모르겠나 봐. 퍼포먼스도 좋고 비주얼도 팬덤도 아이돌급이니 회사도 나쁠 거 없고.”
“안 그래도 눈여겨보고 있었어. 그 친구.”
“한번 만나봐. 연락처 링크할게.”
“그러자.”
잠시 침묵에 두 사람은 서로를 응시하는데 차대표의 눈빛이 헝클어졌다.
“빨리 들어가. 현정이 신경 곤두섰을 거야,”
“신경 쓰지 마.”
“쓰여.”
“다 알고 결혼했잖아. 그렇게 옹졸한 사람 아니고.”
“그럼 내가 옹졸한가부지.”
“들어갈게, 너무 멀리 가진 말고.”
차대표는 천천히 돌아섰다. “정민 씨.” 하는 은호의 목소리가 차대표의 발을 묶었다.
“그때 나 데리고 도망가지 그랬어.”
"못 간다고 한 거 너야."
"말이 그렇다는 거였지. 어떻게 엄마 버린단 소릴 입 밖으로 내겠냐고. 근데 나 은근 기대했나 봐. 차정민 등에 업힐 준비 되어 있었다고."
"지금 업고 튈까?"
"아니. 이제 당신 별로야."
별로야, 소릴 듣고도 차대표는 체념도 뭣도 아닌 미소를 지었다. 은호는 무너져내리는 표정으로 돌아섰다. 그래, 그대에 대한 미련은 여기까지.
선호의 새벽도 어수선하긴 마찬가지다. 봉이가 다녀간 직후에 눈을 뜨고는 뒤척이길 4시간째. 속은 울렁거리고 머린 뱅뱅 돌고 마음엔 하릴없는 통증이 느껴진다. 루틴대로 창문을 활짝 열고 바깥공기로 인공호흡 해본다.
우울한 생각에 침잠될 때마다 선호가 생각의 방향을 바꾸는 유효키를 떠올렸다.
[도려내자. 어차피 내 인생에서 오래갈 관계성 아니다.]
엄마라는 사람은 어차피 선호 인생에서 고작 8년 머물렀던 ‘하나의 이름이자 하나의 현상’에 불과하다. 그 빈자리는 아버지의 추억이, 할머니의 무한 애정이, 이웃의 미소가 야무지게 채워줬다. 이 또한 지나갈 테고. 그럼에도 들쑤셔진 상처는 물리적인 시간이 필요하고 분명 그 회복 시기를 인정해야 한다.
그때 톡 수신음이 들렸다.
[일어났지? 문 앞에 해장국 놔뒀어.
창문 열린 거 보이니까 자는 척 말고]
선호의 일거수일투족을 꿰고 있는 귀신. 성가시지만 고마운 최봉이다. 선호는 터덜거리며 현관문을 열었다. 과연 그 앞엔 텀블러가 놓여있었다. 해장국 국물이 뜨끈하게 연기를 내뿜었다. 커피마냥 한 모금 들이키니 세상 다정한 위로의 맛이다.
고2 때였나 난생처음 술을 마셨던 날 속을 게워내던 선호에게 매운 콩나물국을 끓어주셨다. 할머니는 불호령 대신 등을 쓸어주시곤 이렇게 말씀하셨다.
“우리 선호, 이제 어른 다 됐네. 세상 쓴맛도 알고.”
할머니의 헌신이 있어 이나마라도 사람 구실 하고 산다.. 생각하는 선호다. 다시금 생각의 얼개가 펼쳐지며 할머니를 모욕한 이해령이 떠올랐다. 절대 용서하지 않겠다. 절대 피하지 않겠다. 절대 그 여인이 원하는 대로 해주지 않겠다.
그때 문자가 툭 온다. 은호다.
[괜찮냐? 가방에 티켓 있어. 한국에서 마지막 연주회야. 꼭 와줘.]
선호는 휴대폰이 동생인 양, 툭 집어던졌다.
빙빙 돌아가는 천정을 보며 다짐해본다.
절대 용서하지 않겠다.
절대 피하지 않겠다.
절대 그 여인이 원하는 대로 해주지 않겠다.
여신 포스 뽐내며 붙어있는 클레어 한의 공연 포스터가 대극장의 전면에 아주 크게 붙어있다. 선호가 작은 꽃다발을 들고 들어선다. 로비는 사람들로 바글거렸고 실사 사이즈의 클레어 등신대가 포토존에 꾸며져 있다.
참으로 양가적인 감정이다. 부럽고, 자랑스럽기도 하고 꼴 보기 싫고 짠하기도 하다.
그때 한은호가 전화했다. 선호는 부러 시간을 들여 통화버튼을 눌렀다.
“시끄러운 걸 보니 로비네.”
“마지막 공연이라며.”
“커피 좀 사다 줘. 이 근처에 로스팅 죽이는 집 있대.”
짜증나...
“마지막인데? 카페 주소 보낼게. 오늘 한 끼도 못 먹었다고. 크림 더블에 시럽 세 바퀴.”
으휴... 말로만 듣던 현실 여동생 골질이 한 번에 몰아서 오는구나.
호화스러운 VIP 대기실 내부, 현정의 손길이 분주하게 클레어를 치장한다. 골드빛 튜브 드레스가 멋스럽다. 텀블러를 들고 들어오던 해령은 은호의 드레스가 탐탁지 않은 눈치다.
“왜 바꿔 입혀? 1부 곡 편성 분위기에 블랙드레스가 어울린다고 말했잖아.”
“이러시는 거 월권이세요.”
“이봐요, 윤실장.”
“내가 내 아티스트랑 상의를 했으면 그걸로 끝이라구요.”
“블랙으로 입혀!”
현정과 엄마의 공방에 은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둘 다 그만해! 내가 결정할 문제야. 연주자가 입겠다는데 뭐가 문제야?”
해령은 자기 뜻이 관철되지 않자 싸늘해져 은호를 쏘아봤다.
“여사님은 그만 나가주시죠.”
현정의 말에 해령은 제대로 긁혔다.
“윤실장, 우리랑 연장 계약 하기 싫은 가봐? 누구 덕에 클래스가 바뀌었는데?”
“여사님이야말로 따님 그늘에서 셀럽 흉내 내고 사시잖아요?”
“야!!!”
차대표가 들어오다 기민하게 분위기 파악을 한다.
“여사님, 장관님 오셨습니다. 나가시죠.”
해령은 열불이 나는지 손부채 하며 나갔다.
“내가 상전을 둘을 모시지.”
“너까지 보태지 마라, 죽어야 벗어날 수 있는 딸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