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그만해 좀!! 별거 아니야. 낼 공연 아무 문제없다고.”
그러나 이미 해령의 눈은 돌아있었다. 그녀는 벌떡 일어서더니 다짜고짜 선호의 뺨을 후려친다.
“감히 술을 먹여? 이 중요한 공연 망칠 셈이니?”
우리 클레어란다. 그게 지금 선호에게 할 소리인가... 여덟 살 코흘리개 버리고 간 엄마라는 작자가 그 오랜 세월 건너뛰고 내뱉은 일성이 겨우 그거라고? 제정신인가 이 말이다. 버려지고 억지 상봉한 시간이 무색하게 저 여인에게 중요한 건 그저 클레어, 클레어, 공연, 공연이다.
“하고 싶은 말이 그거밖에 없습니까.”
선호 딴에는 충분한 변명 시간을 다시 준 거다.
“듣고 싶은 말이 있었나 보구나. 잘 지냈니? 미안하다? 그런 거 기대했나 본데..”
“병세가 깊으신 모양입니다.”
선호에게 긁혔는지 다시금 뺨을 치려는데 해령의 손목을 척하고 잡아내는 선호다. 울며 불며 매달리던 코흘리개는 이제 없다는 뜻이다. 해령은 잡힌 손목을 뒤틀어 거칠게 뺐다.
“넌 늘 이런 식이야. 할 줄 아는 거라곤 남의 앞길 막는 거.”
뭐지, 이 싸잡아 당하는 기분은? 선호는 날카롭게 노려봤다.
“어느 대목에서 남의 앞 길 막았는지 모르겠지만... 그거 하난 맞네요. ‘남’.”
“한선호, 너도 그만해.”
선호는 그쯤에서 멈추려 했다. 그러나 돌아서는 선호의 등 뒤로 해령의 비아냥이 꽂혔다.
“너만 끼어들면 일이 생겨. 일이 꼬인다구. 불길해. 아주 불길해. 노인네가 애를 어떻게 키운 거야, 대체. 경우도 없고 매너도 없고!”
선호는 서늘하게 뒤를 돌아본다.
“누구만 할까.”
“뭐?”
“두 번 다시 내 할머니 모욕하면..”
“모욕하면, 뭐!!”
“궁금하면 해보세요.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기막혀!”
“애초에 그리움 따윈 없었지만 혹시나 일말의 죄의식을 확인하고 싶었나 봅니다. 다행입니다. 먹고 죽을래도 없어서.”
“.........”
“내가 불길.. 하다 하셨나요? 좋습니다. 그쪽 남은 인생 쭉~ 불길하게 해 드리죠.”
“그쪽?”
“그럼 뭐죠? 생모라 할까요? 이해령 씨라 할까요?”
해령은 부들거릴 뿐 대답하지 못했다. 무섭게 쏘아보고 돌아서는 선호를 은호가 막아선다.
“야, 한선호!! 이렇게 가면 어떡해!!”
선호는 은호를 물리치고 저벅저벅 걸어가는데..
“할 말 있으면 지금 다 하고 가. 뭘 또 따로 만나니, 번거롭게.”
물론 선호도 같은 생각이나 말로라도 그녀의 뜻을 박살내고 싶었다.
“따님한테 오늘 일.. 사실관계부터 따져보시죠. 악담을 퍼붓든 용서를 구하든 그 후에 해도 늦지 않으니.”
선호는 주먹 불끈 쥐고 돌아섰다.
잔뜩 골이 난 얼굴로 호텔 스위트룸에 들어온 해령이 신경질적으로 핸드백을 소파에 던졌다.
“내가 불러냈다고 몇 번을 말해! 한선호는 매번 전화번호 바꿔. 우리랑 엮일까 봐.”
은호는 따라 들어오며 해령에게 쏘아붙였다.
“도대체 한선호한테 왜 그래? 뭐 하나라도 해준 게 있어? 미안하지도 않아? 어떻게 다짜고짜 손찌검이야.”
“손이 그래서 공연은 어쩔 거야?”
해령은 드레싱 된 은호의 손을 힐끗 봤다.
“또또.. 말꼬리 홱 돌리지. 문제없다고 했잖아.”
“니가 의사야?”
“오버하지 마. 손등 살짝 스친 거야. 공연하는 데 지장 없거든?!”
“손등에 반창고 붙이고 연주를 해? 그게 얼마짜리 공연인데!!!”
차대표는 두 여자의 신경전에 죽을 맛이다.
“그나마 젊은 사람들 반응이 뜨거우니 다행이죠. 오히려 잘됐어요. 홍보도 저절로 됐고.”
굳이 잘 포장하는 차대표의 의견을 해령이 물어뜯는다.
“홍보는 신예 나부랭이 얘기지. 그깟 것들이 티켓 사서 공연 온답니까?”
“잠재관객입니다.”
“나는 즉각적으로 지갑 여는 부자관객을 원해요.”
“엄마, 그만해!! 쪽팔리니까.”
은호의 꽥 소리에 해령은 기막혀 보다가 방문을 쾅 닫고 들어간다. 한숨 쉬고 소파에 앉는 은호의 곁으로 다가오는 차대표다.
“연고 다시 바르자.”
“됐어. 병원에서 알아서 했겠지.”
“내일 정말 괜찮겠어?”
차대표는 소파 아래 낮게 앉아 드레싱을 풀어본다.
“몇 년 만에 오빠 만난 게 그렇게 잘못이야?”
“덧나면 안 되는데..”
이게 차대표의 성향이고 방식이다. 은호의 푸념을 전혀 다른 말로 덮어쓰기 하는 것. 막무가내의 무시가 아니라 은근하게 생각의 방향을 바꾸는 식으로.
다정한 차대표의 뒤통수 내려다보던 은호가 그의 머리칼을 만지려는데
“늦었네?”
현정의 기척에 은호는 황급히 손을 거뒀다. 현정은 차대표가 쥐고 있던 은호의 손을 홱 가로챘다. 은호도 안다. 손을 뻗은 순간 이러면 안 되지.. 싶었으니까. 그럼에도 현정의 노골적인 영역표시에 자존심이 상했다.
“먼저 가서 쉬어. 자기, 피곤하잖아.”
현정의 다정한 척에 차대표는 머쓱해져 들어가고, 공연히 긁힌 은호는 다시금 현실감각을 되찾았다.
“다른 드레스 찾아볼까? 소매 긴 거.”
현정은 비즈니스 말투였지만 뉘앙스가 묘하게 거슬렸고 어쩌면 본심을 읽힌 은호 자신의 자괴감이겠다.
“피팅 다 끝났는데 뭐 하러.”
“손에도 메이크업하라할 게.”
현정은 오만 불만 가득한 얼굴로 괜한 말을 하고, 은호는 그런 현정을 빤히 보았다.
“왜 그렇게 봐?”
“겨우 이 정도도 거슬려? 니 신랑 머리칼에 뭐 붙어있더라.”
“떼어도 내가 떼. 예의 지켜.”
“뭐가 그렇게 불안하니? 자신 없는 사람처럼.”
“야!!”
“나를 못 믿겠으면 니 남자 믿으라구. 아니면!! 당신 성에 안 차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갈라놓는 우리 엄말 믿든지. 기어코 니 옆에 붙여놨잖아. 이제 와서 내가 뭘 어쩌겠어.”
“너, 재수 없는 거 알지?”
현정은 어이없는 눈초리로 바라보다 들어간다. 홀로 남겨진 은호는 짙어지는 열패감에 침울해진다.
늦은 밤, 봉이는 고개 쭉 빼고 동네 어귀에서 선호를 기다렸다. 전화는 안 받지 톡 확인은 안 하지.. 동생 은호랑 얘기 중인 건가.. 무슨 일이 있는 건가 애가 탄다. 팬카페 설립자이자 카페장으로서 급격히 늘어버린 팬가입수도 얘기해야 하고 염치없는 그 가족들 뒷담도 해야 하는데..
그때 저 멀리 휘적휘적 걸어오는 실루엣을 발견한다. 선호다. 봉이는 우다다다 달려간다.
“야, 한선호!!!!”
선호는 잔뜩 취한 눈으로 봉이를 반겼다.
“봉이다. 봉..이.”
긴팔을 휘적이다가 털썩 주저앉는 선호다.
“내가 못살아 증말..!!”
봉이는 선호를 일으켜 세웠다.
“무슨 일이야?”
선호는 그렁한 눈으로 환히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봉이는 풀어진 선호의 눈망울에 짜르르~ 아파왔다. 봉이가 너무도 잘 아는 저 눈빛. 힘들어도 힘들다 말하지 않고 선호는 겉으로 웃으며 속으로 운다. 선호는 그런 애다.
“최봉, 한 잔 더 하자, 응?”
“어허! 너 이미 꽐라야.”
“아닌데? 나 완전 멀쩡한데? 봐봐~”
선호는 양팔을 펼치고 한쪽 다리를 들어 균형 잡으려 하다 또 철푸덕 넘어지며 소리 내어 웃었다. 속상한 봉이가 얼른 선호를 일으켜 세웠다.
“한은호 때문이야? 아님 니 엄마?”
휘청하는 선호를 온몸으로 받아내는 봉이다. 봉이의 목덜미를 안은 선호가 힘겹게 말했다.
“들이박는다고 박았는데 왠지 진 기분이야... 나한테 그 여자 DNA가 있더라. 옹졸하고 치사했어. 쪽팔려..”
선호는 그 이상 말이 없었지만 맞닿은 심장이 서럽게 들썩였다. 이렇게 취해놓고도 마취가 안되나 보다. 이렇게 커버렸어도 여전히 아픈가 보다.
봉이가 선호를 부축한 채 방으로 들어왔다. 봉이는 헤롱거리는 선호를 침대에 눕히고 이불 덮어 토닥여준다. 선호를 보자니 한숨이 절로 나는 봉이다.
행여 깰까 조심스러운 문소리가 들리고서야 어둠 속에서 선호의 낮은 울음이 터졌다. 혼자 있을 때조차 엄마로 인한 눈물은 수치스러운 거였다.
엄마란 사람이 그 오랜 세월의 단절에 어떤 변명도 없이 폭언과 폭력을 행사했다. 그 장면은 반복재생되며 선호의 심장을 긁었다.
도대체 뭘 기대한 거야.
이럴 줄 알았잖아..
마음의 준비..
충분히 했었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