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어글리 05화

어글리 05 _폭풍전야

by 햇빛투게더

로스팅 맛집답게 대기 줄이 길었다. 생크림 더블에 시럽 세 바퀴.. 얘가 이렇게 기호가 뚜렷한 아이였던가..


어릴 때 한은호는 무조건 오빠 따라쟁이였는데.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먹고 싶었댔다가 선호가 초코를 고르면 냉큼 자기도 초코라고 했다. 카레를 먹다가도 아빠가 선호에게 라면을 끓여주면 먹던 카레 집어던지고 라면 냄비를 끌여당겼다.

허긴 기호라는 게 관심과 성향의 변화에 따라 달라지고 어릴 때의 성향이라는 것은 미숙함의 베이스이니 달라진들 이상할 것도 없다. 잠시 귀찮았지만 이 정도는 해줄 수 있는 일이니 그저 짧은 한숨에 얼마든 내어줄 수 있었으니까..

그건 아마도 엄마아빠의 전쟁을 숨죽여 지켜보던 두 남매의 전우애랄까. 거실에서 들려오는 엄마 아빠의 고성에 선호는 은호의 귀를, 은호는 선호의 귀를 막아줬다. 네 개의 고사리 손이 서로의 귀를 막아주면 그래도 스르륵 마음이 안정되면서 잠이 들만 했다.


에휴, 이제 와서 그런 게 다 무슨 소용이랴. 선호는 커피를 건네받고 휴대폰 시간을 확인했다. 공연시간 15분 전!!



사람들로 바글대는 로비에는 장관으로 보이는 노신사와 해령이 인터뷰를 하고 있다. 해령을 외면하고 비상구로 향하는 선호다.


대기실 앞에는 사설 경호원 둘이 지키고 서있다. 문자로, [왔다] 하니 문이 삐걱 열리고 은호 또래의 여자가 나왔다. 윤실장이다. 그녀는 경계의 시선으로 보다가


“클레어 한 만나기로 하셨어요?”

“네, 뭐..”

“들어오세요.”


현정은 선호를 들여보낸 후, 문 안을 향해 말했다.


“5분 후에 나가야 돼.”




으리으리한 VIP대기실 한가운데 은호가 앉아있었다. 은호는 고마움 1도 없는 삐딱한 시선으로 선호를 바라본다.


“여왕님 납셨지.”

“거기 텀블러 좀.”

“그냥 마셔, 모양 다 망가져.”

“약으로 먹는 거야. 달라고.”


선호는 못마땅한 얼굴로 바로 앞 협탁에 놓인 핑크색 텀블러를 건넨다. 은호는 빨대로 선호가 사 온 커피를 쉐이킹 한다. 예쁜 크림커피가 거뭇한 커피와 섞이며 마구 뭉개졌다. 그리고는 조심성 없이 콸콸 핑크색 텀블러에 커피를 옮겨 담았다.


“그 멀쩡한 걸 왜 망쳐. 누구 딸 아니랄까 봐 유난스럽기는..”

“멀쩡한 거 뭐. 오빠 너?! 아님, 나?!”

“희한하게 사람 멕이는 재주가 있구나. 가볼게, 연주나 잘해.”

“잠깐!!”


선호가 곱지 않은 얼굴로 돌아봤다.


“왜, 또, 뭐.”


은호는 맨발로 걸어 문 앞 테이블에 놓인 명품 쇼핑백을 건넸다.


“필요 없어. 이딴 거.”


은호는 멋진 빅백을 꺼내 선호의 낡은 합성피혁 가방 속 내용물을 쏟아부었다. 선호가 손쓸 틈도 없이 라벨을 제거해 버리고는


“이제, 교환 환불 못하겠다. 그치. 이 못생긴 가방은 압수.”

“야! 할머니가 사주신 거야. 내놔.”


은호는 출입문을 열고는 우락부락한 경호원에게 말했다.


“손님 가신다네요.”


경호원들은 경계태세로 선호를 바라보았고 은호는 선호의 등을 그들에게 떠밀었다. 은호는 얄밉게 메롱하고는 문 쾅.

선호는 미간이 접혔다. 내 가방 버리기만 해!






대극장의 VIP석으로 향해가는 선호는 공간의 위용에 압도되었다. 내 평생 이런 무대에 설 수 있을까. 아니, 관객으로라도 또다시 올 수 있을까.

VIP석에는 이미 자리 잡은 해령이 옆의 귀빈과 얘기하고 있었다. 과장된 제스처, 과한 웃음, 화려한 드레스, 뭐 하나 맘에 드는 게 없었다. 설마 하고 티켓좌석번호를 시선으로 헤아려 봤다. 한은호가 정상이면 저 여자 옆좌석은 아니겠지.. 했는데 진짜 바로 옆자리였다. 또라이 새끼..

선호는 인상 구기고 홱 돌아 나왔다. 이대로 나가자, 봉이랑 술이나 먹자.. 했는데 마음속에서 은호의 목소리가 반복재생 되었다.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어쩌면 은호의 목소리를 반복재생 시키는 건 선호 자신이 아니었을까. 솔직히 직관하고 싶었다. 은호가 얼마나 대단한 주자인지.

선호는 뒷좌석에 홀로 앉은 교복 여학생에게 다가가 티켓을 보여주고 바꿨다. 일생일대의 기회를 가진 소녀는 꾸벅 인사하고는 VIP석으로 달려가고 선호는 소녀의 맨 뒷좌석에서 은호의 등장 기다렸다.


바이올린 여신 ‘클레어 한’은 무대 위에서 만큼은 ‘제멋대로 한은호’의 면모가 1도 없었다. 선호의 눈망울에 담긴 은호는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피붙이의 자부심이고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다. 인정할 수밖에 없는 이 이상한 열패감은 조금 전 느낀 자부심 그 후에 스멀스멀 뿜어져 나왔다. 범접불가의 아우라.

한동안 은호의 연주가 이어지고 선호는 그야말로 동생의 선율에 빠져들었다. 세탁기에 들어가면 이런 기분이려나. 그냥 내가 졌고, 이 마음의 기계가 그저 멈춰지기를 바랬다.




앙코르를 위해 청중은 박수와 환호로 은호를 불러냈고 은호는 다시금 무대 위로 걸어 나왔다.


“제가 준비한 공연은 다 끝났구요. 지금부터는 보너스 트랙입니다. 바쁘신 분들은 이동하셔도 좋아요.”


그래 이 타이밍이다. 조금 더 지체하면 이해령과 마주칠 것이고 두 번 다시 피하지 않겠노라 다짐했지만 의기양양할 그 얼굴을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선호는 주섬주섬 가방을 챙겼다. 은호가 선물한 이노메 명품가방. 이 조차도 남의 물건처럼 낯설기는 마찬가지다.

선호는 슬쩍 일어서서 출입문으로 향하려는데.


“이 곡은 이분께 바치고 싶었습니다. 오늘의 제가 있도록 이끌어주신 분.”


VIP석의 해령은 자기 얘기로 예단하고 일어서는데


“저를 위해 기꺼이 희생해 준..”


해령은 감격스러운 얼굴로 박수받을 준비를 했다.


“제 오빠, 한선호 씨입니다.”


해령은 기막혀 냉큼 객석에 주저앉았다. 망할 기집애. 여기서 그 이름이 왜 나와!!



아직은 어둑한 객석을 바라보며 은호가 말했다.


“지금 출입문 앞에 있네요.”


선호가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봤다. 선호가 출입문을 연 상태라 외부의 불빛이 쏟아져 들어와 당황스럽기만 하다.


“SNS 길거리 공연영상 보신 분들은 아실 거예요. 그때 같이 협연한 어글리가 제 오빠, 한선호입니다. 앞으로 모실게요.”


공연 안내원들이 웃으며 선호를 무대 가까이 데리고 온다. 청중들은 환호하며 박수로 지나치는 선호를 맞이했다.


해령은 왠지 모를 배신감에 부글거린다. 나쁜 기집애, 내가 지한테 해준 건 희생이 아니고 뭐란 말인가. 말이나 빨리 하든지... 시간차로 지 에미를 망신시켜? 옆의 장관님한텐 뭐라 할 거야.



은호는 무대 위로 올라오는 선호의 팔을 잡고 중앙에 세운다. 여기저기서 박수와 환호가 터져 나왔다.

선호는 뭘 어째야 할지 몰랐다.


“일단 인사부터 하세요.”


은호의 재촉에 선호는 잠시 머뭇하다가, 청중석에서 가장 먼저 자리를 박차고 나가는 해령을 보고 마음을 바꿨다.


“좀 당황스럽긴 하지만 인사드리겠습니다. 저는 한선호이고... 거리의 악사입니다.”


청중들의 술렁이는 소리가 들렸다. 부정적이든, 아니든 어쨌든 놀라움의 탄성.


“활동명은 어글리래요. 나름 꽃미남인데, 그쵸?”


어쩐지 신나 보이는 은호를 보면서 선호는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저는 이만 내려가겠습니다. 좋은 무대 보여준 클레어 한에게 감사합니다.”


선호가 꾸벅 인사하면 박수가 터져 나온다. 선호는 무대 아래로 내려가려는데 은호가 슬쩍 말한다.


“그쪽으로 나가면 기자들한테 잡힐걸?”

“너 진짜..!! 장난도 정도껏 해야지.”


은호, 선호가 속닥속닥 하는 와중에 청중들은 박수를 보냈다. 은호는 웃으며 선호에게 말했다.


“엄마가 되게 싫어할 거야."

"...!!..."


그러네. 되게 싫어하겠네, 이 상황.


"저거 스페어야.”


은호는 일각의 바이올린을 턱으로 가리켰다. 이내 은호의 연주가 시작됐다. 그때 하필 출입문까지 걸어 나간 화려한 드레스의 해령이 보였다. 문득 선호는 이 상황이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결단코 그녀의 뜻대로 하지 않겠다던 그의 다짐이 심장을 뜨겁게 두드렸다.

무대 일각에 마련된 바이올린을 집어 들고 선호가 자리를 잡았다. 은호의 얼굴에 가득 미소가 번졌다. 은호는 시작하라는 눈짓을 하고 선호는 깊은 호흡을 내뱉고는 연주를 시작했다. 은호는 슬쩍 빠지고 선호의 독무대를 만들어줬다. 시작된 선호의 연주에 청중이 다시금 술렁이고 그 순간 출입문 앞의 해령이 분노의 얼굴로 돌아보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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