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어글리 06화

어글리 06 세 여자와

by 햇빛투게더

해령은 로비에서 장관을 배웅했다. 거대한 출입문이 닫히는 순간까지 홀에서 들리는 두 남매의 연주소리에 정신이 아득해졌고 노여움이 치솟았지만 어쩌겠는가. 클레어 인생이 내 인생이니 일단 지금은 할 수 있는 일을 할 밖에. 이럴 때 주의해야 하는 것은 기분의 노예가 되지 않는 것. 그러나 30초도 못 가는 인내다. 아 어쩌지... 일단 장관을 보내야 한다.


“귀한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장관님.”

“괜찮으십니까.”

“네?”

“안색이 창백하세요.”

“아, 체기가 있어서요. 일간 연락드리겠습니다.”


해령은 서둘러 장관을 보내고는 한숨 쉬며 돌아섰다. 아닌 게 아니라 해령에겐 두 개의 분노 포인트가 즉각 생성됐다. 은호, 그리고 선호다.

먼저, 은호. 이 나쁜 기집애. 내 인생은 은호의 성공을 위해 불살라졌다. 누군가에게 보은을 하고 공식적인 감사를 해야 한다면 그것은 응당 나여야만 해. 그런데 이제 와서 제 앞길 열어준 게 선호의 희생? 기막힐 노릇이다. 이 모욕감 어쩌지? 속으로 불길이 났다. 언제나 그렇듯 최고의 치명타는 피붙이가 시전 하는 법. 망할 년, 혼구녕을 내주겠어.

그때, 홀의 출입문이 열리고 현정이 뛰쳐나왔다. 그 뒤로 청중들이 술렁이며 나오는데..


“여사님!!”

“무슨 일이야.”

”클레어 쓰러졌어요.”


사색이 된 해령은 밀려 나오는 청중의 무리를 거칠게 뚫고 홀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현정이 나직이 말했다.


“그이가 대기실로 업고 갔어요. 이쪽으로 가시죠.”




VIP 대기실 안에서 선호는 실신한 은호를 흔들어 깨웠다.


“은호야!! 한은호, 정신 차려!!!!”


문이 벌컥 열리고 해령과 현정이 뛰어 들어왔다.

해령은 선호의 뒷덜미를 잡아채 은호에게서 떼어냈다. 선호는 뒤로 벌렁 자빠졌다. 해령은 차가운 눈초리를 은호에게 돌렸다. 은호가 미워죽겠지만 안타까운 그 눈동자에 선호는 왠지 모를 억울함이 밀려왔다. 이상한 사람이지만 은호 너에게는 엄마가 맞구나..


“아무나 들이면 어떡해!!”


아무나.... 그 한마디에 선호는 모욕감을 느꼈다.

보다 못한 차대표가 머쓱한 얼굴로 선호를 데리고 나갔다.




“은호.. 어디 아픈가요?”

“가끔 쓰러져요.”

“네?!”

“끼니 거르는 거 다반사예요. 특히 공연 전엔. 지금까진 공연이 끝나고 쓰러졌으니 조용했던 거고. 오늘은 좀 유난하네요.”

“병원에 안 가도 됩니까.”

“....”

“이런 일이 빈번하군요.”

“깨어나면 클레어가 연락할 겁니다.”

“마지막 공연이라고 해서 온 겁니다. 그리고..”


선호는 은호가 일방적으로 건넨 명품가방을 차대표에게 내밀었다.


“저 안에 제 가방이 있어요. 바꿔주시죠.”

“은호가 공들여 고른 거예요. 오빠 분 준다고.”

“이딴 거 필요 없다고 전해주세요. 아깐 상황이..”

“직접 만나서 돌려주세요. 그 성격에 또 다른 핑계 만들어 연락할 거예요.”


문이 벌컥 열리고 현정이 고개를 내밀었다.


“여사님이 들어오래.”


차대표는 꾸벅 인사하고 들어갔다.





한은호 답지 않다. 아무리 공연이 끝난 시점이라도 관객 앞에서 그런 모습을 보이다니. 어디 아픈 것도 아니고 끼니 걸러 자주 쓰러진다고? 아마추어도 아니고.

아니, 그래놓고 그렇게 신나게 선호를 무대로 이끈 은호다.




집 앞에 도착한 선호는 시동을 끄다가 멈칫했다. 명품 가방에서 달랑거리는 야광 키링이 보였다. 그래서 그렇게 억지로 가방을 바꿔버린 건가. 선호가 어디 있는지 한눈에 확인하려고. 도대체 왜.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걸까. 도대체 뭘 하려고.


선호 차 옆에 끽하고 누군가의 차가 섰다. 옆 차에서는 살랑거리는 원피스를 입은 최봉이가 보였다. 저 자식은 왜 또 저래. 안 하던 짓을 하네. 그때 옆 차의 운전석에서 웬 남자가 튀어나왔다. 으잉? 저 자식은 또 뭐고.

“봉이 씨. 즐거웠습니다.”

“...”

“또 연락드려도 될까요?”


뭐 대에충 이런 얘기들이 차창 너머 들렸다. 봉이 저거 지금 수줍어하는 거야? 시선도 떨구고 헤실헤실 웃고 있다.

봉이는 남자에게 꾸벅 인사하고 돌아서다 차에서 나오는 선호와 마주쳤다. 이런 제길.. 남자는 한껏 웃으며 차창 너머 봉이에게 손을 흔들고 갔다.


선호는 집으로 들어가 버렸다. 아무렇지도 않아? 내가 예쁘게 입고 다른 남자랑 만났는데? 봉이는 마음이 상해 선호네 집으로 따라 들어갔다.




선호는 복잡한 하루에 지쳐 소파에 벌렁 누워버렸다. 그때 벌컥 출입문이 열리고 봉이가 들어왔다. 어쩐지 선호 눈치를 보는듯하다.


“뭐야, 그 꼴은.”

“남자 만난 거 봤잖아?”

“어.”

“왜 아무 말도 안 해? 화났어?”

“화나야 돼?”


봉이의 그 표정은 분명 서운함이다.


“진심이지?”

“사기야.”

“뭐가 사기야. 니가 화가 안 난다고 한 게, 아님..”

“그런 옷 입고 여성스러운 척 호호호 했을 거 아니냐고. 그게 사기지. 최봉이! 암만 급해도 본질은 잊지 말자.”

“내 본질이 뭐.”


선호의 말 문이 막힌 건 사실이다. 그리고 피할 수 있을 때까지 피하고 싶은 주제이기도 했다. 봉이는 베프이자 고마운 존재이지만 봉이가 원하는 대답을 당장엔 해줄 수 없었다. 솔직히 지금의 심경이 뭔지도 모르겠고 아직 정립되지 않은 감정을 말 몇 마디로 규정지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냥 도망치고 싶고, 언어화시키고 싶지 않았다. 설령 봉이를 잃는다 해도.


“봉아, 나 오늘 지쳤어.”

“그러는 나는 괜찮아 보여?”

“나중에 얘기하자.”

“뭘.”

“.......”

“난 뭔데, 난 너한테 누군데?”

“....”


봉이는 내 대답을 기다리다가 깊은 한숨을 포옥.. 내쉬었다.


“봉이야, 나 오늘은 머릿속이 뒤죽박죽이야. 오늘만 좀 봐주라. 너랑 싸울 기운 없어.”

“어, 그래. 얘기하지 마. 한마디도 하지 마. 대신 내 말 들어. 나 그 남자 맘에 들어. 성실하고 솔직해. 누구랑 다르게."

"......"

"전국 프랜차이즈 하는 국밥집 아들 이래. 내가 이상형이라네. 진지하게 만나보려고.”




쾅 닫히는 문 소리와 함께 나간 건 봉이였지만 정작 선호는 멘털이 나가버렸다. 맞다. 솔직히 선호는 화가 났다. 제멋대로인 은호 때문인지 변함없이 뻔뻔한 이해령 때문인지 살랑이는 원피스를 입고 전국 프랜차이즈 국밥집 아들과 잘해보겠다는 봉이 때문인지 모르지만 정말 세 겹의 분노로 심장이 타버렸다. 그런데 당사자들에게 화내지 못하고 또 이렇게 혼자 쭈그려 앉아 빈정대고 있다. 또 이렇게 넘어진 이유를 그녀들에게 전가하고 있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선호는 한동안 울리지 않는 휴대폰을 들여다봤다. 봉이가 다시 장난쳐주길, 은호가 깨어났다는 소식이 들려오길, 이해령이 용서를 구하길.. 기대하는 걸까. 뉴스홈에는 클레어 한의 성공적인 공연뉴스와 그리고 짧게 처리된 실신 해프닝과 이제 괜찮다는 이야기. sns도 선호와 은호의 짧은 연주가 올려졌을 뿐 비교적 잠잠했다.

그래 나만 또 이렇게 혼자다. 또 이렇게 혼자 남겨졌다.




은호는 여전히 대기실 소파에 누워있고 해령과 차대표, 정민이 소파에 둘러앉아 이야기 중이다.


“무슨 소리야, 차대표! 공연엔 아무 문제없었어. 정식 앙코르도 다 했고. 안 해도 되는 보너스 연주하다 사고 난 거잖아! 근데 뭔 환불? 미쳤어?”

“아니요, 관객이 공연장을 나갈 때까지가 공연입니다. 클레어도 그걸 원할 겁니다.”

“클레어 컨디션 정상화 되려면 몇 개월 걸릴 텐데 영국, 벨기에, 스웨덴.. 줄줄이 공연 펑크는 어떡해~ 뿐이야? LA에 별장 짓고 있는데 당장 현금투입 해야 된다고. 클레어가 회복할 동안엔 무슨 수로 충당을 하냐고.”

차대표는 해령의 막무가내에 고개를 절레거린다. 클레어가 쓰러졌는데 그녀의 엄마는 결국 돈걱정부터 쏟아

낸 거다.


“여사님. 경과를 지켜보시죠.”

“얘 오늘 누구 만났어?”

“공연 전에 오빠 분이 왔어요. 커피 사들고.”

“뭐야?”

“공연 전에 갤 만났다고? 누가 아무나 들이래?”

“아무나는 아니죠. 오빤 대.”


해령은 애먼 현정에게 눈을 흘겼다.


“클레어가 불렀어요. 그분이 안 온다는 걸 굳이 불러냈다구요.”

“가만, 커필 사들고 왔어?”


해령은 여기저기 들춰보다가 쓰레기통까지 뒤져 컵바닥에 찐득한 과당이 들러붙은 투명용기를 꺼내 들었다.

현정과 차대표는 히스테릭한 해령의 뒷모습을 어이없이 바라보았다.


“뭐 하시는 겁니까.”

“성분검사라도 해봐야지.”


현정은 흥미로운 얼굴로 말했다.


“텀블러에 옮겨 담았을 거예요. 클레어 루틴이잖아요. 성분검사하려면 둘 다 해봐야죠.”


차대표는 한숨이 절로 났다.


“성분검사는 그냥 합니까. 공식 절차에 따라야겠죠. 그럴수록 시끄러워지는 거구요. 은호가 친오빠라고 선언을 해버렸는데 그 사람이 가져온 커피에 문제가 있다? 남들 떠들어대기 딱 좋은 소재네요. 그걸 원하세요? 누구에게라도 책임을 묻고 싶은 겁니까? 그게 아들이라도?”

“누가 내 아들이야?”

“그 문제는 그 가족이 알아서 해결하세요. 대표로서 말씀드립니다. 내 아티스트는 누구에게도 원한 살 일 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불미스러운 일에 원인도 아니고 책임도 없어요.”


해령과 현정은 다른 포인트에서 놀랐다.


“은호가 깨어나면 해결될 일입니다. 제발 일 만들지 마세요. 그리고 당신.. 부화뇌동하지 말고.”


그러나 은호는 깨어나지 못했고 결국 해령은 은호를 입원시켰다.





선호도 며칠 동안 비활성 모드가 되어 집에만 있었다. 창 밖으로는 봉이에게 들이대는 그 녀석의 차가 거의 매일 주차되어 있다. 평소 같았다면 봉이가 문 박차고 들어와 늘어져있는 선호의 귀를 잡아당겨 깨우고 요란스러운 음악을 들으며 근처 맛집에 끌고 갔을 텐데 봉이는 며칠 째 고요했다. 봉이가 없는 일상이 묘하게 헛헛하다.

일 해야지.. 바이올린 동호회 강습도 들어왔지만 어쩐지 이 컨디션으로는 아무것도 못할 듯했다.

선호를 일으켜 세운 건 벨소리다. 여느 때 같지 않고 어쩐지 불길한 그 소리.. 출입문을 여는 선호의 두 눈이 휘둥그레지는데...

keyword
이전 05화어글리 05 _폭풍전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