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어글리 07화

어글리 07 _용의자들

by 햇빛투게더

출입문을 서서히 여는 선호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곳엔 엄마.. 아니 이해령이 서있다. 어릴 땐, 저 문을 열면 엄마가 서있으면 좋겠다... 울면서 기도한 적도 있지만 키가 훌쩍 자란 이젠 안다. 그녀는 목적 없이 움직이지 않는다.

목놓아 울어도 오지 않던 엄마가 제 발로 찾아왔다는 건 비정상적인 상황이 벌어졌다는 것이다. 따져 물을 게 있거나 화풀이하거나 뒷목 잡게 할 썸띵..

오늘의 방문 목적은 추정컨대 은호가 아직 깨어내지 못했다는 뜻? 그마저도 내 탓을 하려는 건가...

해령의 등장으로 머리 위 어디쯤 ‘로딩 중’ 아이콘이 뜬 선호였지만 현실감각을 되찾곤 날카로운 눈초리로 변했다.


“니가 가져온 커피에서 치사량의 수면제가 검출됐어. 어떻게 그런 짓을 해?!”


하아... 다짜고짜 이건 또 무슨 상황인가. 그러니까.. 은호가 쓰러진 건 다량의 수면제 때문이고 범인이 나다?

해령은 신경질적인 말투와 감정을 잔뜩 실어 선호에게 무차별 주먹질을 했다. 정작 선호를 무너뜨린 건 이 우악스러운 몸짓과는 별개로 해령의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이었다. 은호만을 향한 모정이랄까. 그래 저건 진심일 거다. 편애하는 아이에 대한 애정이 차별하는 아이에 대한 혐오로 터져 나오는 순간이었다.


“행여 나에 대한 반감으로 저지른 일이라면..!”


더 이상 지지 않아!! 다짐한 선호는 마구 휘두르는 해령의 두 손을 제압했다.


“그랬다면 다른 방법을 썼겠죠. 멍청하게 내가 들고 간 커피에 탔겠냐구요. 이렇게 단번에 의심받을 텐데. 안 그래요?”

“이거 놔!!! 놓으라구!!!”


해령은 수선스럽게 잡힌 손목을 빼내며 악 소리 질렀다.


“언제나 니가 사달이야!! 니가 니가!!!”


이 말 또한 그녀에게만큼은 진실로 보였다. 이자의 머릿속에 박힌 한선호라는 생명체는 평생 ‘사달’ 일뿐이다.

“여사님, 언성 낮추세요.”


해령은 눈물을 수습하며 볼멘소리를 했다.


“내가 가만있게 생겼어, 차대표?!!”

“은호 문제로 왔습니다. 한선호 씨, 잠시 말씀 나누시죠.”




선호, 해령, 차대표는 소파에 둘러앉았다.


“마지막 기회를 주는 거야. 이 일 이대로 안 넘어가. 그러니 기회 줄 때 솔직하게 말하라구.”

“아예 범인이 나라고 낙인찍고 계시네요? 본인이 판사라도 되나요, 도대체 무슨 근거로!!”

“말했잖니, 니가 가져온 커피가 물증이야.”

“내가 한 짓이어야 하는군요, 진실이 뭐든.”

“그런 뜻은 아닙니다. 여사님은 그저.. 은호가 걱정되셔서..”


선호는 기가 막혔다. 역시 하기 싫은 일은 하지 말았어야 했다. 평생 은호 모녀와 마주치기 싫었고 그 공연에 가고 싶지 않았다. 커피 따위 사다주기 싫었고 그들과 엮이기 싫었다. 싫어하는 것들을 거절하지 못한 결과가 이거다. 동생 사다 준 커피에 치사량의 수면제를 넣은 졸렬한 범인.


“솔직하게 인정하면 조용히 넘어가줄 수도 있어!”

“아니죠, 커피가 물증이라면 내가 커피에 섞었다는 증거가 있어야죠. 조용히 넘어가준다 했나요? 아뇨, 그쪽에서 입증하지 못하면 제 쪽에서 문제 삼을 겁니다. 최대한 시끄럽게.”

“오, 그래. 니가 원하는 게 이거지? 일 시끄럽게 만들어서 내 앞 길 막고 망신 주고 복수하는 거?”

“우린 지금 은호 얘기하는 건데요? 왜 본인 문제처럼 얘기하시죠? 은호 인생이 당신 겁니까.”

“기막혀... 차대표 얘 말하는 거 봤지?”

“저, 한선호 씨.. 은호의 텀블러에서 치사량의 수면제가 검출된 건 사실입니다. 믿고 싶진 않지만 오해를 받을 만한 분은 현재로선 한선호 씨뿐이고 워낙 큰 사안이라 일이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찾아뵌 건 만에 하나 한선호 씨와 관계된 일이라면...”


그래, 지금이 상당히 선호에게 불리한 상황인 건 알겠다. 그렇다고 이렇게 맥없이 용의자가 될 순 없다.


“신고하셔야죠, 그럼.”

“공개적으로 우리 은호한테 오물 바가지 씌울 셈이야?”

“어쩌라구요, 그럼.”

“자수해. 그럼 조용히 덮어주마.”

“우습네요. 법 위에 서계신가요? 덮는다고 하면 덮어집니까? 당신이 지목하면 범죄자가 되냐구요. 이 나라가 그렇게 허술해 보여요?”

“뭐야?”

“내가 범인이 아니라는 걸 입증해야 한다면 세 분도 마찬가지죠. 나는 은호와 마주친 게 고작 5분 남짓이지만 24시간 은호와 밀착해 있는 건 세 분 아닙니까.”

“그게 뭐? 설마 엄마인 내가 딸에게 그랬겠니? 말이 되는 소릴 해야지.”

“아들에게 한 짓은 말이 되고?”


해령은 입을 다물었다. 한동안의 정적이 불편할 만큼..

그때 현정이 나섰다.


“여사님이 은호한테 스트레스 준 건 사실이잖아요.”

“야!!! 넌 또 왜 나서? 그러는 넌? 니 신랑 문제로 우리 클레어 심기 건드렸잖아. 그러네, 너도 용의자 중 한 명이네!! 우리 클레어랑 맨날 으르렁댔던 걸 잊었네, 내가!!”

“지금 뭐라는 거예요? 내가 뭘요? 은호랑 저이 떨어뜨리려고 날 이용한 건 여사님이세요.”

“그 덕에 짝사랑했던 남잘 얻었잖니.”

“그 덕에 가난한 유학생 떼어냈으니 여사님도 대단한 걸 얻으신 거죠. 이 사람 이렇게 번듯하게 성장할 줄도

모르고 이제 좀 아까우시겠어요. 근데 뭐 아직 은호 젊으니까 그토록 원하는 재벌 사위 가져보시든가요.”


차대표는 두 사람 때문에 얼굴이 화끈거렸고 선호는 이들의 관계는 무얼까 생각했다. 분명 저들은 범인을 선호로 규정짓고 떠보러 왔음에도 서로를 믿지 못한다. 언제든 등 돌릴 수 있는 사이- 웃프다.


“모친 가스라이팅에 스타일리스트와는 앙숙관계. 그리고 차대표님은 전 남친.. TMI를 한 번에 알게 됐네요.”

“가스라이팅이라니?!”

“겨우 그 말에 억울하세요? 그럼, 뜬금없이 나타나서 용의자 몰이 당한 제 기분 아시겠네요? 누구를 의심하려면 본인들도 의심당할 준비를 해야 하는 거 아닌가..”


또 이어진 침묵..

문득 선호는 궁금해졌다. 이들 가운데 수면제에 접근이 쉬운 사람은 누구였을까.


"차대표님, 그날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은호 쓰러지는 일이 빈번하다고. 그래서 병원에 가지 않은 거 아닌가요?"

"보통은 깨어났는데 그날은 달랐습니다. 그래서 입원을 했고 다각도로 원인을 찾았어요. 그날 은호는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않았어요. 그 커피만 마셨어요, 반 정도."

"깨어나지 못하는 게 그 커피가 아닐 수도 있잖아요."

"말씀드린 대로 다각도로 원인을 찾고 있습니다."

“검출됐다는 수면제는 뭐죠?”

“정말 뻔뻔하구나. 니가 알 거 아니니! ”


선호는 더 이상 해령에게 반응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한국에서 유통되는 성분이래요? 검사기관은 알 거잖아요.”

“그러네요. 확인해 보겠습니다.”

"측근 중에 혹 처방받으시는 분 있나요?"


현정이 불쑥 말을 이었다.


“여사님 밖에 없잖아요.”

“야! 너 미쳤어?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야?”

“야라뇨. 매번 잊으시나 본데 엄연히 저 직책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 은호 재능으로 먹고살면서 유세는..!”

“누구만 할까요. 클레어 모친으로 핫셀럽 놀이 하는 거 세상 사람이 다 알아요. 오죽하면 그런 말까지 했을까.”

“무슨 말?”

“내가 여사님 갑질에 못살겠다 하니까 [죽어야 벗어날 수 있는 딸도 있다]고 했다구요. 은호가.”


해령은 그말에 분명히 흔들렸지만 인정할 수 없었다. 우리 은호가 그럴 리 없어!! 우겨대지만 현정의 그 발언 이후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은호가 했다는 말이 선호의 머릿속에 반복재생 되었다.


[죽어야 벗어날 수 있는 딸도 있다]

[죽어야 벗어날 수 있는 딸도...]


그 말이 사실이라면 은호는 어떤 삶을 산 것일까.. 빛으로 가득한 슈퍼스타의 삶이 아니었구나.. 문득 선호는 은호가 측은해졌다. 해령의 과잉애정과 간섭, 현정의 견제, 그리고 어미의 헛된 욕망으로 억지로 갈라놓은 차대표와의 미련,,, 그로 인해 극단적인 결심이라도 한 걸까.

그들이 산발적으로 풀어놓은 TMI 덕분에 선호는 스토리 개요를 한 번에 꿰게 됐다.

이들은 왜 여기 왔을까. 지금 이 순간에도 내게 말하지 않은 비밀이 더 있는 걸까. 내게 얻어내려는 것이 무엇일까.. 나를 범인으로 몰아가는 이유는 또 무엇일까...


“은호가 깨어나면 제 결백은 증명될 겁니다. 만에 하나 조사가 필요하면 응할 테니 이만 돌아가 주세요.”


해령, 현정, 차대표가 출입문으로 나가는데 선호가 물었다.


“숨기는 일이 혹 있나요?”


세 사람은 대답 없이 선호를 돌아봤다.


“중요한 얘기 스킵한 거 있냐구요. 은호에 대해서.”


해령과 현정은 먼저 나가버리고 차대표만 남겨졌다.


"제 질문에 답 안주셨는데요."

“일간 연락드리겠습니다.”


차대표 마저도 선호의 대답에 즉답을 피한 채 정중한 목례를 하고 나갔다.




이상한 일이다. 그들이 모두 돌아간 이후에 희한하게 허기가 졌다. 식욕감퇴 상황에 왜 배가 고플까.. 전투력 상승의 증거이려나..

옷을 갈아입고 나갈 준비를 하는 선호다. 허기도 채우고 생각 정리도 하자. 은호가 억지로 건넸던 명품 빅백이 발에 걸렸다. 꼴도 보기 싫다. 그 가방을 거꾸로 쏟아 소지품들을 걷어내는데 봉투가 툭 떨어졌다. 가방의 얇은 포켓 어딘가에 꽂혀있었나 보다.

서류를 펼쳐보는데 법적대리인이 쓴 은호의 유언장...! 이거구나.. 은호가 굳이 이 가방을 안긴 이유, 오늘 그들이 말도 안되는 이유로 나를 찾아온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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