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어글리 08화

어글리 08 _울고 싶은 건 나야

by 햇빛투게더

차 안의 해령, 현정, 차대표는 말이 없었다.

굳은 얼굴로 운전 중인 차대표는 며칠 전 새벽, 호텔 산책로에서 은호와 나누었던 얘기가 떠올랐다.


[그때 나 데리고 도망가지 그랬어.]

[못 간다고 한 거 너야.]

{말이 그렇다는 거였지. 어떻게 엄마 버린단 소릴 입 밖으로 내겠냐고. 근데 나 은근 기대했나 봐. 차정민 등에 업힐 준비 되어 있었다고.]

[지금 업고 튈까?]

[아니, 이제 당신 별로야.]


‘별로’라는 말에도 빙글 웃을 수 있었던 건 은호식 농담이었기 때문이다. 고백을 받을 때, 선물을 받을 때, 꽃을 받을 때, 여행을 갈 때, 파인다이닝에서 식사할 때도 항상 ‘별로’라고 하면서도 세상 행복한 미소를 주었다. 그 연장선상이라고 넘겼는데 은호의 의도가 있었던 건가... 내가 캐치 못한 건가...

차대표는 갓길에 차를 세웠다. 거친 제동에 해령과 현정의 꺅소리가 났다.

“여사님, 숨기는 거 말씀하세요.”

“숨기다니.. 내가 뭘.”

“은호 건강상태부터 공유해 주세요. 검사결과는 직계에게만 공개됐잖아요. 그 이후 한마디도 없으셨어요.”

“은호 프라이버시야.”

“아뇨. 지금 들어야겠어요. 은호는 개인이 아닙니다.”

“깨어나면 은호가 얘기하겠지. 본인 판단을 기다려. 그 정도는 할 수 있잖아.”

“은호에게 프라이버시면.. 여사님한텐 뭡니까.”


차대표의 질문에 해령이 우물거리는 사이 현정이 끼어들었다.

“생존이지, 뭘 물어.”

“야! 아까부터 너 왜 이상한 소릴 하고 난리야!”


해령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높아졌다.


“난 얘기 할 의무 없고. 은호 깨어나면 듣게. 그리고 현정이 너! 작작 까불고.”

“반말, 막말 계속하시면 저도 더 이상 예의 지키지 않습니다. 분명히 말씀드렸어요!”


‘기막혀...’ 하며 해령은 핸드백 챙겨 들고 차 문을 열고 나갔다.


“왜 저러셔? 진짜 수상하네.”

“현정아.”


막상 불러놓고 하고 싶은 말 못 하는 차대표다. 뭔가 눈치를 챈 듯 현정은 차창 너머로 시선을 돌렸다.


“하고 싶은 말이 뭐든 하지 마.”

“........”

“내가 여사님을 어떻게 대하든 재갈 물리지 말고. 또 사람들 앞에서 날 가르치는 말투도 자제해 줘.”

“그 얘기 아니야.”


이 남자가 현정에게 하고 싶은 말이 뭘까. 여사님 문제가 아니라고 콕 찍어 얘기하는 걸 보니 역시 그것인가.

“이혼은 내가 결정해. 할지 말지도, 시점도, 범위도. 그러니까 당신은 내 처분 기다려. 그러기로 했잖아. 우리 결혼할 때.”

“.......”


아, 저 남자.. 부정하지 않는다. 진짜 그 얘길 하려던 걸까, 현정은 울컥해졌다.


“내려.”


차대표는 대답 없이 운전석에서 내렸다. 가란다고 가는 남자.. 잡는다고 잡힐까. 대외적으론 남편이지만 실상은 쉐어하우스, 룸메이트에 가깝다. 이런 결혼생활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지만 현정 스스로 자초한 일이라 원망할 담벼락도 없다.






외출준비를 마친 선호가 차에 오르려는데 봉이네 아저씨가 식당 문 앞에서 고갤 빼꼼 내밀었다.


“아들내미! 딴 식당 뚫었어? 왜 통 안 와.”


선호는 머쓱하게 웃었다.


“한술 뜨고 가.”

“갈 데가...”

“에헤이. 후딱 먹고 가. 혼자 먹기 적적해서 그래. 봉이도 없고. 칼칼하게 육개장 끓였어. 아들내미 좋아하잖아.”




봉이네 아저씨는 기어코 선호를 테이블에 앉히고는 푸지게 뜬 빨간 육개장을 내왔다. 이쯤 되면 주린 사람 그냥 못 보내는 집안 내력이려나..


“봉인 어디 갔나 봐요?”

“이런 일이 다 있다잉.. 남자 만난다고 정신없네.”

“.......”

“우리 봉이가 이상형이라나~ 서글서글하니 성품도 좋고. 집안도 방구 좀 뀌는 거 같고.”


봉이네 아저씨는 어쩐지 그 녀석이 흡족한 모양이다. 칫... 별로더만...


“봉이는 뭐래요?”

“신나 보여. 챙겨주는 사람 생겨 그런가~”


챙겨 주는 사람.. 봉이가 내게 그런 사람이었듯이.. 근데 왜 내 마음이 가장자리부터 사르르 무너져 내리지? 왜. 이제 와서 왜.

그때, 봉이의 웃음소리가 들리며 문이 열렸다. 봉이는 샬랄라 원피스에 예쁜 화장을 하고 들어왔다. 봉이를 살뜰히 챙긴다는 그 녀석과 함께.


“아빠, 재근 씨가 장어구이 해준대.”


봉이와 선호는 서로의 등장에 당황해 시선이 마구 헝클어졌다.


“인사해, 이쪽은... 니들 말로 봉이 남사친.”


선호는 왠지 남사친.. 그 말이 왠지 서운하게 들렸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오재근입니다.”


무슨 말씀을 했을까, 봉이는...

선호와 재근은 어색한 인사를 나누었고 봉이는 왠지 표정이 굳었다.


“잘 먹었습니다. 이만 가볼게요.”


봉이네 아저씨에게 꾸벅 인사하고 봉이와는 타인처럼 스쳐 지나갔다. 아.. 이 더러운 기분은 뭐지. 빙수 위에 팥 대신 쌈장 토핑을 얹은 것처럼 어색하기 짝이 없다.




식당 앞에서 선호가 차문을 여는 순간 가게 내부에서는 봉이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왜인지 알 수 없지만 선호는 다시 여덟 살 그날이 떠올랐다.

그건 있을 수 없는 상실감.. 있어서는 아니 될 배신감..

뭔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 분명...


운전석 헤드쿠션에 애먼 뒤통수 팡팡 부딪는데 차 문이 벌컥 열리고 누군가 탔다. 식겁해 조수석을 보는데 머쓱하게 웃는 인간 하나..


“야, 한은호!!!!!!! 이 미친 새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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