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어글리 09화

어글리 09 _악모

by 햇빛투게더

“도대체 왜 이러는 거야.”

“못생긴 가방이 또 있었네. 도대체 몇 개를 더 버려야 내가 준 거 들고 다닐 건대?”


얘 또 이런다, 또.. 헛소리로 질문을 피한다.


“가방에 이상한 거 있던데, 얘기해.”

“바다 가자.”

“말꼬리 돌리지 말고.”

“가서 할게. 각 잡고. 진지하게.”


거짓말 같진 않았다. 톤도 다소 낮았고.


“너 사라진 거 저쪽에서 알면 득달같이 나부터 찾을 거야.”

“그러니까 도망가자구. 이 기회 놓치면 나, 오빠 너랑 얘기할 시간 없을 거야. 당장 비행기에 처넣을걸. 알잖아. 엄마 캐릭터. 아니, 오빠 니가 아는 것보다 훨씬 더 이상해졌어.”


은호는 중앙 포켓에 놓인 선호의 휴대폰을 냅다 집어든다. 선호가 뺏으려 하는 동안 휴대폰 신호가 걸린다.


“나야. 이따 밤에 병원 갈 테니까 기다리고 있어. 엄마한테도 전해줘. 꼭 가니까 피곤하게 하지 말라고.”


하고 뚝 끊는 은호다. 휴대폰 전원까지 꺼버린다.


“됐지, 이제. 바닷물 보이면 깨워.”


차를 타고 가는 동안 은호는 자는지 생각 중인지 눈을 감고 갔다. 몇 날며칠을 깨지 못한 애가 뭘 굳이 저럴까 싶었지만 그냥 두기로 했다. 아마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을 하겠지. 묘수든 악수든 뭐라도 풀어놓겠지.


그나저나 몸은 괜찮은 건가. 아무래도 유언장이 걸린다. 어디가 아프든, 살고 싶지가 않든, 실제로 극단적인 상황에 몰려있든 좋은 시그널은 아니니까. 저리 씩씩하고 공격적인 게 오히려 더 서글퍼진다.





정민은 다소 황당해졌다. 분명 은호였다. 깨어난 거야? 근데 어딜 가겠다는 건가.. 일단 택시를 잡아타고 병원으로 향했다.


텅 빈 병실에서 정민은 은호가 깨어났다는 낭보에도 허탈감이 밀려왔다. 이런 순간에도 지켜주지 못하는, 아니 지켜줄 수 없는 제삼자. 가족이 아니면 은호의 상태를 알 수도, 알아서도 안 되는 비즈니스 관계자의 신분..


일단 의사를 찾아갔다. 모두가 선호에게 몰려갔던 그 사이 퇴원수속을 마쳤다는 것. 어쩌면 진작에 깨어나 모두가 나가길 기다린 걸까.

은호의 약속대로 밤이 되면 은호에게 들을 수밖에.


“저, 근데 검출됐다는 약물 말인데요.”

“네?”

“여사님이 병원 측에 의뢰했다고.. 텀블러 커피 성분 분석.”


의사는 생전 처음 듣는 얼굴로 차대표를 보았다.


“아뇨, 전 모르는 일입니다.”


허어.. 또 놀아난 건가.. 단순히 한선호를 찍어내기 위해서 아니, 그런 거짓말까지? 아니 왜 그렇게까지 하는 거지. 도대체 왜...! 왜 멀쩡한 아들에게 거짓누명을 씌워가며 범인으로 몰아간 거지?

더 심각한 문제는 본인의 거짓말로 나까지 졸로 세웠다는 것이다. 이번은 결단코 그냥 넘어가지 않겠다.



그 시각 해령은 호텔에 있었다. 모든 사달의 원인은 해령이지만 자신만 모른다. 그저 선호 그 애의 태도가 거슬렸고 이상한 셈법으로 꼴 같지도 않은 가짜 유언장을 남긴 은호가 미웠고 현정의 빈정거림이 짜증 났으며 자신의 발작으로 하게 한 이별, 허나 여전히 남자의 시선으로 은호의 주변을 맴도는 차대표가 싫었다. 귀국길 면세점에서 산 와인을 병나발 불며 핑핑 도는 천장에 대고 피식거린다.


해령이 남몰래 은호의 태블릿 비번을 푼 건 입원하던 날이다. 평소 은호가 태블릿에 매일 일기를 쓰고 있다는 현정의 말에 일단 저 물건을 열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은호의 성향상 관련자들의 생일은 아닐 것이고 그렇다면 선호?!


몇 번의 시도 끝에 태블릿이 열렸다. 비번은 과거, 그녀들이 선호를 두고 떠난 날짜였다. 보란듯이 풀리기 위한 비번을 걸어놓고 은호는 뭘 담아둔 걸까.


태블릿 사진첩에는 여전히 잊지 못한 차대표의 사진 몇 컷, 그리고 선호의 무대사진들이 저장되어 있었다. 기막혀, 그 와중에 지 에미랑 찍은 사진은 없네. 투덜대다가 사진첩을 넘기는데 거기서 문제의 유언장을 발견했던 것.

선호에게 보낸 유언장은 공시걱인 문서였지만 해령이 발견한 유언장은 일기처럼 쓴 은호의 손글씨 캡쳐파일이였다. 언젠가 템플스테이에 갔을 때도 미래의 유언장 쓰기 뭐 그런 거 했던 기억이 난다. 그런 차원의 유언장이려니 했지만 재산 분할까지 적혀있으니 갸웃하긴 했다.


어쩄든 유언장을 발견했다는 그 사실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괘씸한 기집애. 연주회에서도 지 에밀 엿먹이 더니... 유언장? 왜! 에미 죽는 꼴 보고 싶어서 이벤트라도 궁리 중인가?! 소위 ‘지삐모른다 (자기밖에 모른다)’의 전형답게 이 위중한 사안에서도 본인 위주다.


매년 정기검진에서도 별이상이 없었던 은호였으니 아마도 선호 문제로 나랑 싸우자 이거지, 싶었다.

그래, 미국에 있는 호화저택은 나한테 주고 예금, 주식 뭐 이런 거 50%는 선호, 25%는 엄마, 25%는 회사?

또 지 에미 뒷목 잡게 하려는 심산이겠지. 딸의 반항이라고 가볍게 여기는 해령이다. 그럼에도 은호의 마음에 25%에 불과한 자신의 처지가 씁쓸한 이상한 엄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해령이 이상하다는 것은 [본인만] 모른다.


태블릿을 들여다보며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웃기고 있네. 너한테 나는 고작 25%구나. 그 욕심에 미국의 호화주택은 당연한 거고 그 나머지 숫자에 분통이 터지는 해령이다. 내 평생을 갈아 만든 클레어 한 브랜드 점유율에서 내가 고작 25%라고?

그럼 일단 차대표를 내보내면 되겠구나. 25%도 내 거, 꼴도 보기 싫은 선호는 자격미달로 하면 되지. 어차피 100%가 내 거잖아? 너는 나야. 절대 잊지 마라, 은호야.

와인에 절여진 해령의 눈동자에 현정의 폭로가 차올랐다.


“죽어야 벗어나는 딸도 있다구? 아니, 넌 절대 못 벗어나! 내가 저승길까지 따라갈 거거든.”


안 그래도 지삐모르는 인간유형인데 만취가 되니 은호고 뭐고 서운함만 폭발했다.

해령의 마녀 같은 웃음소리가 텅 빈 호텔방에 가득 울렸다.






은호와 선호는 바다를 향해 서있다. 은호가 그저 ‘바다’라고 했지만 선호는 찰떡같이 알아들었던 이 특별한 바다. 아빠와 함께 왔던 그곳이다. 바다는 아빠의 품처럼 거대하고 웅장하게 두 아이를 맞이했다. 한동안 은호와 선호는 말을 잊었다.


“언제부터야?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한 거.”


대답 대신 은호의 짧은 울음소리가 터져 나오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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