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며불며 택시를 따라오던 어린 선호의 모습이 은호의 머릿속에 꽤 단단히 뿌리 박혔다. 그건 어쩌면 ‘오빠에 대한 안타까움’이자 ‘선택받았다’는 안도감이었다. 이 계산적인 양가감정은 결국 은호의 인생 전체를 뒤흔드는 불안정한 회전판으로 작동됐다.
어릴 때 두 아이는 바이올린을 가지고 놀았다. 엄마 해령은 아이들에게 바이올린을 사주고 매일매일 테스트를 했고 엄마의 과한 푸시에 먼저 반기 들고 떨어져 나간 건 선호였다.
아마도 그때부터 엄마의 편애가 시작됐으리라. 달콤한 편애는 오빠 놀려먹기 좋았고 한편으로는 그 감정을 이용해 우위에 서보기도 하고 최신 게임기도, 예쁜 옷도, 맛있는 간식 등 손에 쥐는 게 많았다. 어쩐지 오빠를 더 예뻐하는 듯한 아빠와 할머니가 있으니 엄마가 내 편인들 숫적으로 내가 지는 거 아니야? 생각했던 어린 은호다.
아빠가 사고로 돌아가시고 난 후 급해진 엄마는 급기야 은호만 데리고 미국에 가버렸다.
미국에 도착해서는 모르는 아저씨의 집으로 갔다. 은호는 작은 공주방을 받았지만 엄마는 아저씨와 같은 방을 썼다. 그 아저씨의 플랜대로 은호모녀는 바쁘게 움직였다. 엄마가 은호를 위해 어떤 대가를 치렀는지 철 좀 들고 알게 됐다.
호시절은 오래지 않아 끝났고 엄마의 히스테리에 돌변한 아저씨와 대판 싸운 날을 기억한다. 그날로 두 모녀는 그 집에서 쫓겨 나와 싸구려 호텔을 전전했다.
'선호'라는 비교대상이 없으니 특권의식도 작동하지 못했다.
“너는 나야..”
그 말이 100% 애정이라고 믿었던 은호는 그 어린 눈에도 엄마가 안쓰러웠고 그녀가 원하는 대로 기꺼이 따랐다.
은호가 해령의 열망을 하나 둘 이루어내 주자 엄마의 욕심은 끝간 데 없이 차올랐고 반항도 해봤지만 결국엔 그 장단에 맞춰주느라 몸도 마음도 너덜너덜해졌다. 남들은 부러워하는 수식어와 왕관마저도 은호에게는 그닥 의미가 없었다.
본격적인 갈등은 차정민과 헤어지는 과정이었다. 차정민과의 비밀연애가 해령에게 발각되면서 은호는 더 이상 ‘착한 딸’이 아니기로 했다. 지금의 까칠한 캐릭터가 분출된 그 시점이다.
스타일리스트 현정과는 미국의 고등학교 친구였고 그저 운전할 알바가 필요해 소개받은 것이 당시의 가난한 유학생 선배 차정민이었다. 정민과 현정, 은호는 허물없이 어울렸다.
사실, 현정의 짝사랑을 눈치챘었다. 그렇게 티가 나는 데 어떻게 모르겠는가. 그러나 정민은 현정의 고백에 확고하게 선을 그었고 현정도 은호와 정민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사랑과 연애는 발신자와 수신자가 명백히 서로를 교신해야 온전한 것이 되는 것을.. 한쪽의 활화산은 그저 그러다 말 현상인 것을.. 누가 먼저 알고 짝사랑에 빠졌는지는 현실연애에 적용되지 않는 냉정한 룰인 것을..
훤칠하고 영특한 명문대 유학생, 차정민.
가난한 것 빼고는 나무랄 데 없었던 정민을 엄마도 마음에 들어 했으나 그건 그저 스탭으로서 그랬다는 거다.
운전으로 시작했지만 비즈니스마인드가 특출 났던 정민은 기가 막힌 프레젠테이션으로 해령의 허영심을 만족시켰고 결국에 은호 1인 기획사를 설립했으며 오늘날의 광영의 길로 이끌었다.
그걸로도 부족했던지 엄마는 국내외 가리지 않고 재벌가 선자리를 물어왔다. 억지춘향도 한두 번이지 엄마 취향 남자들과의 만남은 정민을 더 간절하게 했다. 그러나 일거수일투족 은호만 조명하는 엄마 때문에 스트레스가 커졌다.
어느 한 날 정민은 떠나자고 제안했고 은호는 진심 흔들렸다. 지금까지의 커리어를 버릴 만큼.. 그러나 두 사람의 이상한 낌새에 도둑촬영까지 한 엄마에게 그 계획은 발목을 잡혔고, 죽는다고 날뛰는 엄마의 모습에 결국 정민을 배신했다.
정민과 은호의 사이가 모호해질무렵 정민의 침실에서 현정을 목격하고는 은호는 마지막 남은 삶의 의미가 완전 흩어져버렸다. 엄마는, ‘남자는 다 똑같고 시간이 약’이라고 했지만 머지않아 알게 됐다. 정민을 짝사랑한 현정의 마음을 엄마가 이용했다는 걸.. 그 한 씬의 목격을 위해 미리 판을 짜두었다는 것을.
정민은, 기억나지 않지만 자신의 실수와 과오에 책임을 지겠다고 했다. 은호는 연인과 절친을 한 날 한 시에 잃었다. 그렇게라도 정민을 잡고 싶었던 현정은 그 굴욕을 감내했다. 결혼의 이유가 ‘사랑은 아니지만 실수와 과오에 대한 책임..’ 그 얼마나 처참한 프러포즈인가.
은호가 현정을 온전히 미워할 수 없는 부분이 그 대목이다. 공식적으로 그 한 사람을 가졌다는 이유로 모든 감정을 거세당한 가여운 영혼..
은호가 이렇게까지 생각하는 이유는 정민의 마음이 아직도 자신을 향하고 있다는 확신과 죄책감 때문이다.
불행할수록 은호는 바이올린에 열중했고 명성은 더욱더 견고해졌고 오늘날에 이르렀다. 은호는 은호대로, 현정과 정민은 그들 위치에서 은호를 조명했다. 그렇게 덤덤하게 마음속 용암을 잠재우며 어른이 되었다.
“너 입원하고 나서 니 엄마가 쳐들어왔었어. 내가 가져온 커피에서 치사량의 수면제가 검출됐다나. 어떻게 된 거야? 내가 준 커피 내 눈앞에서 옮겨 담았잖아.
너 그날 아무것도 안 먹었다며. 그럼 설마 니 짓이야? 그래서 유언장 가방에 넣었어?”
“아무리 철딱서니 없어도 관객들 모아놓고 수면제 치사량 커피 드링킹 하겠어? 그게 무슨 민폐냐고.”
“그럼 뭐야. 니네 엄만 왜 그런 거짓말까지 한 건데.”
“그 속을 누가 알아. 아마도 태블릿을 봤을 거야. 바탕화면이 오빠 너랑 찍은 사진이었거든. 유추해서 비번도 풀었겠지. 거기에도 있었어, 유언장. 공증받기 전에 손글씨로 쓴.”
“....”
“유언장을 무력화시키려면 오빠의 흠결과 결격이 필요했겠지. 그게 사실이건 아니건 사람들은 믿고 싶은 걸 믿으니까.”
“니 돈 필요 없으니까 그 양반 다 줘. 너만 살아 나와. 먹이고 재워주는 건 할 수 있어. 시집도 보내줄 거고.”
은호는 피식하고 웃음이 터져 나왔다.
“알량한 오래비라고 시집도 보내준다네..”
“정말 죽고 싶었다면 나한테 유언장 따위 보내지 않았을 거야.
넌 제대로 살고 싶은 거고 나한테 S.O.S 친 거야.”
정말 내가 그랬을까.. 가만히 생각해보는 은호다.
뭔가 울컥 올라오는지 은호는 그렁이는 눈망울로 선호를 바라보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