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계종사자, 영화평론가, 시사교양 PD 그리고 기자
꿈은 많았지만, 무엇이 될지 몰랐던 고등학교 3학년 때. 장래희망을 조사한다며 꿈을 적으라는 말에 고민했다. 영화평론가, 영화감독, 작가 등등이 떠올랐지만 그 중 어떤 한 직업을 쓰고 나중에 그게 되지 않는다면 꿈을 이루지 않았다고 느껴질 것 같아서. 그래서 ‘문화예술계종사자’라고 썼다. 내가 쓰고서도 잘 썼다고 생각했다. 저렇게 적당하게 포괄적으로 쓸 수 쓰다니.
이후 대학교에서는 영상이론을 전공하며, 잠시 영화평론가를 꿈꾸기도 했다. 그러나 선배, 동기, 후배들 이 글을 잘 쓰는 걸 보며... 살짝 질렸다. 공부를 계속 해서 '교수'를 해볼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다가도, 우리 교수님처럼 저런 식으로 집요하게 공부만을 파면서 사는 건, 나는 어렵겠다는 생각을 했다. 교수로 살기에는 삶을 즐기기도 힘들 것 같았다. (즐기는 교수들도 많겠지만 당시에는 이런 생각이었다) 물론 공부를 더 하기 위한 돈도 가장 큰 걸림돌이었긴 하지만. 빨리 졸업해서, 빨리 취업해서 돈을 벌고 싶었다.
‘취업은 뭐 알아서 되겠지’라던 철없던 생각이, 22살이었던 2011년, 엄마가 아픈 뒤로 현실적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좋아하는 것도 살짝 변했다.
엄마가 항암 치료를 받는 1년 동안 나는 학교를 휴학했고, 공부를 하는 건 어려운 상황에서 집에서 ‘전업주부’와 같은 삶을 살았다. 그 때 TV를 정말 많이 봤다. 항암치료로 살살 걷는 것도 힘들어하는 엄마와, 내가 할 수 있는 건 쇼파에 기대서 TV를 보는 거였다. 소소한 일상을 보여주는 휴먼 다큐멘터리, 드라마, 예능 프로그램 등등. 누워있는 엄마에게 안마도 해주면서 TV를 보며 도란도란 이야기했다. TV를 볼 때 엄마도 잠시는 그 통증을 잊을 수 있었으니까. 엄마뿐만 아니라 우리 가족에게 힘을 주는 게 TV였다.
엄마가 선항암을 모두 마치고, 가을에 수술을 하기 위해서 대학병원에 입원했을 때도 TV는 함께였다. 기억남는 장면이 있다. 저녁 8시 30분 무렵병원 복도를 걸어가고 있었다. 양쪽의 모든 병실 TV에서 당시 방영하던 KBS 드라마 <웃어라 동해야>가 나오고 있었다. 내 또래의 친구들이라면 ‘막장 드라마’라며 폄하할 수도 있는 작품이었지만, 그 공간에서 그 드라마는 많은 이들이 기다리는 대상이었다. 다소 자극적이더라도 환자들과 보호자들은 8시 20분에 시작하는 그 드라마를 기다리고, 보면서 웃고 이야기를 나눴다. 새삼 그 시기를 통해 평범한 사람들의 삶에 TV가 얼마나 중요하게 자리하는지, 가지 않는 것 같은 힘든 시간을 버틸 수 있게 만들어주는 지 알 수 있었다.
엄마의 치료가 모두 끝난 2011년 말 무렵, TV에 나오는 프로그램을 만드는 PD가 되고 싶어졌다. 나도 사람들에게 힘을 주고 싶었으니까. 물론, 주요 방송사의 PD 처우가 매우 좋다는 것도 PD를 꿈꾸는 큰 이유였다. 하나뿐인 자식으로서 얼른 취업해서 부모님께 보탬이 되어야겠단 생각에 마음도 조급해졌다. 취업에 관심도 없다가 2012년 복학하면서 오로지 ‘취업’만 생각했다.
2012년 3월 복학을 했다. 학교 사람들은 여전히 어려운 영화 감독과 이론들과 함께 자신들만의 세계를 구축해갔다. 그런 걸 좋아했던 나였지만, 2011년을 보내고 난 뒤의 나는 그 모든 게 거리감이 느껴졌다. 지금 생각하면 다소 많이 나아갔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때 생각으로는.... 생계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지식인들의 자기만족 같았다. 나 혼자 마음이 바빴고 급했다. 혼자서 꿋꿋이 졸업 논문도 TV 비평으로 작성했고, 관련 기사도 수시로 봤다. 시험 준비도 했다. 하지만 방송사의 문턱은 높았다.
졸업 이후 영화제 3개월 인턴, 5개월 취업준비 그리고 서울시 청년허브 혁신활동(10개월 인턴)을 했다. 계약 기간이 끝나갈 2015년 12월 지금 다니는 회사의 채용공고를 봤고, 나의 관심사와도 잘 맞는 것 같아서 지원했다. 다행히 합격했다. 그렇게 원래는 기자를 꿈꾸지 않았지만, 문화예술계종사자, 영화평론가, PD를 꿈꾸다가 지금은 1년 4개월째 미디어 전문지 기자로 일한다.
“이제 OOOO에 들어가서 직접 기사를 쓰고, 칼럼도 쓰고 PD를 인터뷰해보고 싶습니다. 3개월 계약, 10개월 계약... 그렇게 잠시 있다가 떠날 회사가 아닌, 확실한 소속감을 가진 곳에서의 경험의 저변을 확대해나가고 싶습니다. 기회를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당시 제출했던 자기소개서 중 마지막 부분이다. 원하는 바대로, 기사와 칼럼도 쓰고, 인터뷰도 했다. 일이 재밌었다. 사람들이 잘 눈여겨보지 않던 프로그램의 좋았던 지점 또는 나빴던 지점을 비평했을 때, 인터뷰한 사람들로부터 기사 잘 봤다는 연락을 받을 때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기자’를 제대로 준비한 적이 없었기에... 추가 지난 9년 동안의 언론 탄압 등 다루는 내용 자체가 조금 버거운 기사를 쓸 때나 타매체 기자들보다 잘 쓰지 못했다는 기분이 들 때면 정말이지 무기력해진다. 그렇게 일을 하면서도 즐거운 순간과 답답하고 초조한 순간이 오고가며 고민이 이어지고 있다.
앞으로도 나는 기자로서 기사를 잘 쓸 수 있을까?
이 자리 그대로 도태되지는 않을까.
한때 꿈꾸던 PD라는 꿈은 어떻게 되는 걸까?
기자로서 일을 한다면, ‘어떤’ 기자로서 나아가야할까?
너무나도 많은 고민들이 쌓이고 있다. 하지만 김중혁 작가의 “그래, 버티다보면 재능도 생기고 뭐라도 되겠지”라는 말처럼, 일단은 ‘지금 여기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