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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보라 Apr 25. 2020

제주에 가면

글, 말, 표정, 삶이 매력적이라 기억남는 사람들 그리고 소리소문 

제주도 여행 4일차. 친구와 책방을 찾아가는 중이었다. 제주도의 북서쪽에 위치한 곽지해변 근처에서 버스를 타고 20여분 달리다가 한적한 정류장에서 내렸다. 지도 어플이 그곳에서 환승을 하라고 했기 때문이다. 막상 그곳에서 다시 검색하니 어느 버스도 오지 않았다. 지나다니는 택시도 없었다. 카카오택시로 택시를 불렀다. 잡히질 않았다. 여러 번의 시도 끝에 드디어 택시가 잡혔다. 책방을 가는 길이 쉽지만은 않았지만 ‘가지 말까? 다른 데 갈까?’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꼭 가보고 싶은 곳이었다.    

  

택시를 타고 내리니, 제주도의 옛날 스타일 돌담집이 보였다. 작은 입간판에는 ‘소리소문 책방 - 책으로 가는 문’이라고 적혀있었다. 낮고 아담했다. 책방 출입구는 미닫이문으로 되어 있었는데, 청록색 기둥이 양 옆으로 있었다. 그 옆엔 커다란 창이 있었다. 창 옆엔 청록색으로 칠해진 정사각형 벽이 있었고, 흰 색 글씨로 ‘소리소문 책방’이 적혀있었다.  책방. 앞에는 주황색 기다란 의자가 놓여있었다. 사진을 꼭 찍고 싶은 공간이었다. 찍다보니 시간이 꽤 흘러 있었다.      


미닫이문을 스르륵 열고 들어갔다. 책방은 넓었다. 방 4개짜리 집에 거실이 있었던 구조 같았다. 밝고 아늑했다. 햇살이 책방을 따스하게 감싸고 있었다. 가장 중앙 자리에 자리한 두 개의 책상에는 책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신간은 아니었고, 주제별로 큐레이션되어있었다.       


중앙 자리 말고도 세 군데에 책이 있었다. 문이 있진 않았지만 방처럼 구분되어 있었다. 입구에서 가장 먼 오른쪽 방에는 책이 빼곡하게 꽂혀 있었다. 책장이 천장까지 닿아있었다. 어두운 원목의 가구들이 그 공간과 잘 어우러졌다. 자그마한 원목책상이 창가에 있었는데, 책과 종이, 필기구가 준비되어 있었다. 손님들이 이어달리기하듯 필사할 수 있었다.      


책장을 한 번 쓱 훑어본 다음, 다시 꼼꼼히 보기 시작했다. 서가를 찬찬히 살펴보는데, 그 기쁨이 엄청났다. 뭐랄까, 눈이 뜨인다고 해야 할까? 어느 책 하나 대충 꽂혀있는 게 없다는 게 온전히 전해졌다. 이 책방에서 처음 보는 책들도 굉장히 많아서 좋았다. ‘이 책방 주인은 책에 대한 안목도 있고 책방이라는 공간도 엄청 사랑하는 구나’, 책방을 둘러보는 내내~ 이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나이 듦, 섹스에 대한 책들이 꽂혀있는 서가도 꽤나 매력적이었다. 원래 관심이 있는 편이라 그런 것이었겠지만, 모여있는 책들이 하나같이 매력적이었다. 건강한 먹거리나 몸 대한 코너에서도 마찬가지로 읽고픈 책이 많았다. 아서 프랭크의 <아픈 몸을 살다>나 <환자 혁명>처럼 아픔에 대한 책도 보였다. <아픈 몸을 살다>는 좋아하는 책인데, 책방 주인의 관심사가 이쪽에도 있구나, 싶었다.      


사고 싶은 책이 많았다. 선택이 필요한 시간. 이미 여행 중에 책을 여러 권 사놓은 상태였다. 고심하다가 <섹스하는 삶>을 골랐다. 에세이라기보다는 섹슈얼리티 분야에서 20년 이상된 전문가가 쓴 여성의 섹스와 성적 자존감, 주체적으로 사랑하는 법에 대한 책이었다. 이 분야에 대한 책을 읽고 싶었지만 생각보다 이런 책이 별로 없었다. 그래서 찾기 어려웠는데 소리소문 덕분에 접할 수 있어 좋았다. 다른 책으로는 <서른의 식사법>을 골랐다. 서른이기도 하고, 글쓴이가 음식에 대한 생각에 공감이 갔다. 소박하지만 내 몸을 생각하는 먹거리를 먹으며 삶을 추구하는 데에 좋은 자극이 될 것 같았다. 1)


책방을 둘러보다보니 1시간 넘게 시간이 훌쩍 지나있었다. 책을 엄선해서 드디어 계산대로 향했다. 계산대 옆 벽에는 사인이 있었는데, 은유 작가님의 사인이 보여서 반가웠다. 이 책방을 알게 된 것도 은유 작가의 페이스북 포스팅 때문이었다. 소리소문이라는 책방과 주인들이 아름다운지에 대해 써놓은 글을 보고 꼭 가야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2)    


계산을 하던 사장님이 소리소문 책방만의 도장이 있다며 찍고 가길 권했다. 사장님이 도장을 잘 찍는다고 했다. 그렇다면, 책에 직접 도장을 찍어달라고 부탁드렸다. 쑥스러워하면서도 도장을 하나씩 정성껏 찍었다. 싸인을 하는 것 같았다. 소소하지만 이런 이벤트가 살갑고 좋았다.       


계산하고 나가려다가, 출입구 옆에 길다랗게 있는 복도가 눈에 띄었다. 아 맞다, 저쪽을 안 가봤지? 복도 끝에는 책들이 있었고, 신문 스크랩들이 붙어 있었다. 사장님 부부의 책들이 놓여져 있었다. <오늘이 마지막은 아닐거야>. 이 책은 두 사람이 세계여행을 떠난 이야기다. 두 사람 다 책을 사랑했고, 책을 매개로 만나 결혼까지 이어졌다. 그런데 결혼 직후, 아내가 암 판정을 받았다. 그러나 암세포가 자리한 위치상 항암이든 방사선이든 어떤 치료효과도 기대되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치료를 받을 것인가? 이 상황에서 두 사람은 중대한 결단을 내린다. 평생의 꿈이었던 세계 여행을 가기로. 세상에, 이런 분들이었구나...! 그래서 아픔에 대한 책들도 잘 큐레이션이 되어있었단 생각들이 머리를 스쳤다. ‘이 책을 안 살 수가 없지!’   

  

다시 계산대로 향했다. “또 계산하러 왔어요...(웃음)” 이번에는 도장이 아니라, 사장님 부부에게서 사인을 받았다. 그러다 나도 언젠가는 책방을 하고 싶다는 말도 했다. 상대의 말을 굉장히 경청하는 사장님들과, 따스하게 대화를 나눴던 기억이 난다. 계산을 끝낸 뒤 책방 안에서 또 사진을 찍고(사진 촬영이 가능했다), 그날 구입한 책에 대해 짧게 영상으로 기록도 남겨봤다. 그러고 나서 정말 그 공간을 나왔다. 하지만 끝나지 않는 소리소문 사랑~ 책방 입구 포토존에서 10여분은 더 사진을 찍었다. 친구랑 둘이서 “소리소문 여기 너무 좋다!” 라며 계속 감탄했다. 책방을 떠나야하는데 발길이 잘 떨어지질 않았다.  

    

글을 쓰다 <오늘이 마지막은 아닐거야>를 펼쳐들었다. 글을 읽으면서 사장님들의 밝은 표정이 머리에 그려졌다. 이 책은 여행이 중심이 아니라, 여행을 통한 자신들의 삶과 생각이 잘 적혀 있다. 그들은 여행을 하면서 확신을 가진다. 그리고 자신들이 살아가고자하는 삶에 대해 용기를 얻어서 돌아온다.3) 그 용기로 새로운 삶에 도전했고, 그러다 제주에서 이 책방을 차렸다. 글, 말, 표정, 삶이 밝고 매력적이라 기억에 남는 사람들. 그 사람들이 꾸려가는 공간, 소리소문. 제주에 가면, 또 가야지. 





1) 친구는 내가 고른 책에 대해, “식욕, 성욕에 대한 책을 골랐으니 이제 다음엔 수면에 대해 고르면 되겠다”고 평했다. 오 다음엔 수면에 대한 책을 사야지!      

2) 은유 작가의 팬이라서, 작가님을 신뢰합니다. 작가님이 좋다고 하는 건 일단 믿고 보고 가는 편입니다.     

3)  ‘내가 앞으로 살아가야하는 삶에 대한 그림이 조금 더 완성되었다. 그리고 점점 더 용기가 생겼다.’ 『오늘이 마지막은 아닐거야』 p.224 



[에세이 드라이브] 3기 3번째 글_2020년 3월 2일 작성 


구보라 

뭐든 보는 걸 좋아합니다. 

어제는 목련 꽃봉오리를 봤어요. 

곧 꽃을 피울 것 같아서 괜히 좀 설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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