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26’ /「32살 앞 30날」
‘글을 쓰지 않고도 살 수 있을 거라
믿는다면, 글을 쓰지 마라.’
- 라이너 마리아 릴케 -
매일매일 ‘30날 글쓰기’를 한 지 이제 5일째. 두둥. ‘26’이라는 제시어를 바라보며 무엇을 쓰지 고민했다. ‘26’ 옆에서, ‘오늘은 26살에 대해 반추해봐야 할까?’ 생각했다. 이러다간 25살, 24살, 23살... 계속 내 삶을 반추할 수도 있겠지? 26살을 반추해보는 것도 매우 재밌을 것이다. 하지만, 계속 반추만 해볼 수는 없으니……. 오늘은 26살의 나를 생각하기보다는 다른 글을 써보고 싶었다.
책의 26페이지를 펼쳐보자, 까지 생각하고 괜찮은 아이디어라고 자평했다. 책 몇 권을 펼쳐 26페이지를 보다가, 책장에서 <쓰기의 말들>을 집어 들었다. 위에 인용한 릴케의 말은 은유 작가의 <쓰기의 말들> 26페이지에 쓰여있는 문장이다. 이 책의 부제는 ‘안 쓰는 사람이 쓰는 사람이 되는 기적을 위하여’다. 유유출판사에서 내는 ‘말들’ 시리즈 중 하나인데, 왼쪽 페이지에는 책의 주제와 관련된 누군가의 말이 나오고, 오른쪽 페이지엔 그에 대한 작가의 글이 적혀있다. 왼쪽 페이지의 인용 문장들도 좋지만, 은유 작가의 글을 읽다보면 정말 무엇이든 쓰고 싶어지게 되었다.
‘글을 쓰고 싶다’는 욕망이 내게 있는지조차 잘 모르던 2015년. 그의 책 <글쓰기의 최전선>을 2015년에 읽고, 꽤나 좋았다. (우연히 서점을 걷다가 혼자 발견해서 읽었다.) ‘내가 글을 쓰고 싶어 하는구나’를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그 ‘글’은... 써야만 하는 리뷰, 논문, 리포트, 입사용 논술 이런 거 말고. 나의 글이었다.
자신이 원하는 게 있는데도 잘 모르며 살아가는 경우가 있는데, 그때의 내가 바로 그런 경우였던 것 같다. (오, 마침 그때가 26살! 제시어 ‘26’과의 연관성 찾기) 머릿속에, 마음속에 쓰고픈 게 한가득한데 그걸 제대로 글로 풀어낸 적은 없었다. 그저 일기만 썼다. 글의 꼴을 다 갖춘 일기 말고, 의식의 흐름이 나열된 일기를. 그렇게라도 풀었어야 했나 보다. 책을 읽고 나서 거의 바로 은유 작가 초청 강의를 듣는 기회가 있었다. 따스하게 웃으면서 글에 관해 이야기하는 그 표정과 말투, 목소리가 인상 깊었다. 그때부터 내게 은유 작가는 ‘글도 좋고, 말도 좋고, 따스한 사람’이었다. 매우 좋아하는 작가가 되었고, 믿고 읽는 작가가 되었다.
2016년에 <쓰기의 말들>이 나왔을 때도 바로 사 읽었다. 그러고 보니 벌써 내 손에 온 지 5년째인 책인데, 여러 번 읽을 때마다 마음에 와닿는 구절들이 달라지기도 한다. 물론 처음 읽을 때나, 지금이나 읽을 때마다 마음을 울리는 문장들이 더 많다.
그런데 오늘 펼친 26페이지, 이 문장은 예전에는 크게 와닿지 않았던 말이었다. 메모가 적혀있거나, 포스트잇이 붙어있거나, 귀퉁이가 접혀있지도 않다. 그냥 읽었던 문장. 오늘은 26이라는 숫자 때문에 눈여겨보기도 했지만, 유독 더 와닿기도 한다. 곰곰이 생각해본다.
나는
글을 쓰지 않고도 살아갈 수는,
없다.
써야 한다. 만약 삶이 안정적이라면. 경제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안정적이라면, 다른 모든 건 다 할 수 있다면. 그런데 글만은 쓸 수 없는 삶이라면? 안 쓰고 살 수 있을까? 그래도 쓰고 싶은 걸. 그래, 방금 생각한 극단적 안정감과 글을 못 쓰는 상황은 살면서 오지 않겠지만, 어쨌거나 나는, 글을 쓰고 싶어하고, 쓰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사람이구나. 깨닫는다. 릴케의 문장 오른쪽에 실린 은유 작가의 글도 무척 공감이 간다. 그 중 일부.
‘비교적 생활이 안정된 시기의 글쓰기 욕망은 순했다. 영화나 책 읽기 같은 문화 생활 향유의 후기였다. 쓰면 좋지만 안 써도 무방한 글, 향유의 글쓰기. 내가 글을 부렸다. 생활의 기반이 흔들리고 시야가 뿌옇게 흐려지면서 쓰지 않으면 안 되었다. 릴케의 표현을 빌리자면, “글을 쓰지 않으면 내가 소멸될 게 분명했다.” 생존의 글쓰기, 글이 나를 쥐었다. 발밑이 흔들릴 때 본능적으로 두 팔을 벌려 수평을 유지하듯이 불안의 엄습이 몸을 구부려 쓰게 했다. 글쓰기는 내가 지은 긴급 대피소. 그곳에 잠시 몸을 들이고 힘을 모으고 일어난다. (27)’
내가 소멸되지 않기 위해서, 살아가기 위해서 써야 한다. 쓰고 싶다. 그래서 이렇게 자기 전에도 쓴다. 넷플릭스를 보면서 쉬거나 인스타그램을 보다가 지나가버릴 수도 있을(정말 시간 순삭_) 그 시간에, 이렇게 엉덩이 붙이고 책상에 앉아서 타이핑을 하고 있다.
그리고 아직 5일째지만 앞으로도 계속 해내기 위해, 지난 5일을 돌아보자면. 이렇게 매일 쓸 수 있는 건, 함께 30일 동안 매일 글을 쓰는 주성님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무슨 일을 도모할 땐, 작심삼일인 경우가 많다. 글쓰기도 마찬가지. 분명 스스로 하고 싶어서 기획한 일이고, 심지어 ‘안 쓰고 살 수 없다’면서 글 쓰고 싶어하면서도(!) 혼자 했더라면 이미 하루쯤 안 썼거나 쓰기를 포기했을 수 있다. 그런데 이 글쓰기는 이미 3일을 넘겼다! 매일 글을 쓰고, 공유하고, 읽고 있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도 주성님은 글을 다 썼을지, 무엇보다 어떤 글을 썼을지 궁금한데 우선 내 글부터 써내야겠지. 브런치 매거진에 주성님이 [30날 글쓰기]에 대해 소개한 글을 보면 ‘매일 글을 쓰면서, 자신을 마주하고 마음을 다잡는 솔직한 고백이자 성찰의 기록’이라고 적혀있다. 이 문장에서 ‘매일 글을 쓰면서’가 눈에 들어온다. 어떤 기록을, 글을 썼느냐도 중요하지만, 일단 ‘글을 썼고, 지금도 쓰고 있는’ 이 자체로도 힘이 된다는 걸 요즘 부쩍 더 깨닫는다.
‘우리가 힘을 얻는 곳은 언제나 글 쓰는 행위 자체에 있다.’(나탈리 골드버그)
<쓰기의 말들> 다른 페이지에 적혀있는 이 문장처럼. 역시, 글쓰기라는 긴급 대피소에서 힘을 모으다 보면 그 대피소를 나가서도 살아갈 힘이 충전되나 보다. 그러니 쓰자, 쓰는 게 쉽지만은 않지만, 쓰는 것만큼은 질리지 않으니까. 그리고 살아가면서 가장 잘하고 싶은 일이기도 하니까. 계속 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