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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살 앞 30날」6

'25' / 아파트에 살았던

by 구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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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 살았던 곳이 기억나는 사람이 있을까? 내가 태어났을 때, 우리 가족은 5층짜리 사원 아파트에 살고 있었다. 신혼이었던 부모님의 첫 보금자리. 아마도 그곳에서 5살 정도까지 살았던 것 같다. 아기 때 앨범을 보면 그 집에서 찍은 사진들, 아파트 옆 놀이터, 공터, 근처 산책로, 공원 등에서 찍힌 사진들이 많다. 아빠 회사 동료들의 가족들과 꽤 친하게 지냈었다. 나에겐 기억이 없지만.


엄마는 전업 주부로서, 나를 키우며 아빠가 벌어오는 월급 받으며 그렇게 그 아파트의 다른 아내들처럼 살았었다. 그렇게 어린이가 되기 직전의 나 그리고 부모님이 살았다. 엄마 말로는 엄마의 결혼 생활 중 가장 순탄했던 때라던데, 왠지 조금은 평화로웠던 시절 같아서, 기억하고 싶은 시기다.


그러고는, 유치원 때에는 2년 정도, 주택의 2층에 살았다. 아마도 사원 아파트에 살 수 있는 기간이 끝났었던 것 같다. 어린 시절 중에서, 아파트에 살지 않았던 유일한 2년이기도 하다.


주택에서의 기억은 정말 두 장면 정도 있다. 크리스마스 때에 눈을 뜨니 좋아하는 인형이 있었다. 당시 유행하던 눈이 크고 꽤나 큰 크기의 금발 인형. 정말, 믿기지 않지만, 나는 그게 부모님이 준 거라는 것까지도 알았던 것 같다. 부모님이 내 머리맡에 두는 걸 봤던 것도 같고. 기억력이 영 시원치 않지만, 그런 기억이 어렴풋하게 있다. ‘산타가 아니라 부모님이 준 선물인 건 알지만, 그래도 내가 원하는 걸 이렇게 사서 준비해주셨다니! 너무 감사하다’ 이런 마음이 들었던 것도 같은데, 7살이 그랬다고...? 기억의 왜곡 같지만. 아무튼, 조금 사랑이 가득한 기억이다. 부모님의 사랑, 나의 사랑.


다른 기억은, 거의 매일, 아침마다 달렸다. 유치원 통학버스가 서는 큰길까지 어느 정도 거리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아침마다 바빴다. 부모님 모두 출근을 해야 했는데, 그러면서도 나를 씻기고 밥 먹이고(밥도 진짜 엄청 안 먹어서 고생시킴) 옷 입히고 머리 묶여서, 엄마 출근할 때 같이 데리고 나가야 했으니! 엄마도 출근하느라 아침에 무척 바빴을 것이다. 어떨 땐 엄마도 통학버스 타고 출근하는 곳 근처까지 가기도 했다. (바쁜 삶...)


그렇게 주택에서 살아가던 2년 동안, 우리가 앞으로 살 아파트가 지어지고 있었다. 아빠는 그 아파트가 지어지는 현장 맞은편에 있는 야트막한 동산 같은 데에 나랑 같이 가는 걸 좋아했다. 거기에서는 우리가 살 아파트 동이 보였다. 나는 뭐하러 가는 지 잘 모르면서, 아빠 손을 잡고 룰루랄라~ 같이 갔다. 갈 때 같이 부르던 나만의 자작곡도 있었다. (tmi 어릴 때 혼자 여러개 자작곡을 부르던 아이)


“아빠하고~ 슬이*하고~ 집으로 갑시다~ 짠 짜라자자, 짠짠!” 아마 내 생애 아빠에게 가장 붙임성 있고, 아빠와 가장 친했던 시기였을 것 같다. 아빠는 37~38살 무렵, 나는 6~7살쯤이었던 시기의 기억이다. *슬이는 태명이었는데, 부모님은 계속 나를 슬이라고 불렀다. 구슬.


동산을 다녀오면, 엄마는 또 거기 다녀왔냐고 묻곤 했다. 아파트를 분양을 위해 중도금 등을 치르느라 빠듯했겠지만, 그래도 분명 부모님은 핑크빛 미래를 그리며 행복해하지 않았을까 싶다. 95년, 96년 그때는 더 나아질 것이라는 걸 분명하게 희망할 수 있는 때였다.


2년 남짓한 시간 동안, 아파트 건물은 서서히 올라갔다. 1층, 3층, 5층... 그러다 10층이 되고, 25층이 되었다. 초등학교 1학년에 들어가기 직전 그 아파트에서 살기 시작했다. 6학년이 되기 직전까지.


비슷한 시기에 지어진, 비슷하게 생긴, 비슷한 평수의 아파트에 사는 아이들과, 우르르 모여서 초등학교를 다녔다. 입학한 학생들이 얼마나 많은지 학교 수업을 2부제로 나뉘어서 했다. 오전반, 오후반. (세상에...) 아이들이 가득한 초등학교에 6학년까지 쭉 다녔다. 친구들은(나 포함) 서로의 아파트, 아파트 단지가 더 좋다며 싸우기도 했다. 내가 사는 아파트 단지에 초등학교도 있고 백화점도 있으니, 우리 아파트가 더 좋다고도 했다. (휴, 어차피 도로 하나 차이였는데, 세상 의미 없는 싸움...)


아파트에 둘러 쌓여서 아파트 키드로 살아왔다. 그러니까, 다들 비슷비슷한 아파트에 사니까, 엄청나게 다양한 환경의 사람들을 마주하며 살 수가 없었다. 아파트 놀이터에서 놀고, 아파트 상가 안에 있는 학원을 가고, 자전거를 타고, 친구들 집에 놀러가도 그 아파트 단지.


다소 획일화되기도 한 그 아파트에서의 삶이, 어떻게 생각하면 답답하기도 한데, 그래도 한편으로는 그리운 기억이기도 하다. 계속 그냥 그 아파트에 살았더라면 좋았을텐데, 라는 생각도 든다. 5학년 무렵, IMF가 터지고, 집안 사정이 좋아지지 않으면서 6학년 때엔 옆 동네 아파트로 이사를 해야했다. 새로 지어진 아파트가 아니라 오래된 아파트. 줄어든 아파트 평수. 나는 엄청나게 주눅이 들었다. 왜냐면 초등학교는 그대로인데, 나만 다른 동네로 가버린 셈이니까. 이제 더 이상 친구들과 ‘우리 아파트’ 이야기는 할 수 없었다. 친구들은 전부 A 방향에서 학교 정문을 오는데, 나만 B 방향에서 출발해 등교했다. 그 방향에 있는 아파트에 산다는 걸 친구들이 알지 않기 바라는 마음도 매우 컸다. 나만 혼자 다르다는 건 그 자체만으로도 위축이 된다는 걸 그때 절실히 알았다. 뭐랄까, 너무 표준화되고 획일적인, 빌라도 없는 지방의 계획도시에서 살다 보니 그런 걸 더 많이 느꼈던 것 같다.


아! 그러다 중학교 3학년 때였나, 그때 다시 원래 살던 아파트로 이사를 갔다. (그때 집안 사정이 확 펴진 것까진 아니었지만 무슨 맥락이 있었던 듯 하다.) 그때를 떠올리면, ‘안도감’. 아, 다시 들어왔구나. 다시, 친구들과 만나서 같은 방향에서 학교를 가고, 학원을 갔다가 집에 올 수 있겠구나. 그게 정말 좋았다. 혼자 다르지 않아서 다행인 그 기분! ‘난 남들과 다르게 살고 싶어’라는 생각이 강하던 사춘기 시절이었는데, 그래도 그때는 다른 게 싫었었다.


2년이 지나고 고등학교 2학년이 되었을 땐 주택으로 이사를 했다. 살면서 가장 좁고 어두웠던 집. 등교하는 데 5분이면 된다는 점 말고는 좋은 점이 하나도 없었던 그 집. 내 생애 환경적으로나 마음적으로나 가장 암울했던 시기를 그 집에서 보냈다. 그냥 고등학생었단 것 자체 때문만으로도 충분히 암울했겠지만, 아파트를 떠나서였을 수도, 사춘기였기 때문일 수도. 오늘은 아파트에 살기 전, 살았을 때에 대해 써보았는데, 다음에 언젠간 그 시절에 대한 글도 써봐야지. 그 시절에 내게 힘이 되어주었던 라디오, 책, 영화에 대해서도.




구보라 / 보고 듣고 쓰는 걸 좋아합니다. 오늘은 영화도 보고, 드라마도 보고, 책도 봤어요. 일하면서도 글을 썼어요. 꽤 괜찮은 하루였네요. 12월 1일부터 [32살 앞 30살] 글쓰기를 하고 있어요. 이제는 이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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