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3 때 다이어리를 오랜만에 꺼내보았다. 5단 책장 위에 올려져 있는 공간박스 지퍼를 열고. 열어보니, 일단 Monthly Plan에는 그날 본 영화나 책 제목이 적혀 있다. 고3으로 넘어가기 전 겨울방학. 2008년 1월에는 영화를 14편, 책을 7권 봤다. 아련하다. 이때 봤던 목록에 장준환의 <지구를 지켜라>가 있는데, 유독 정말 재밌게 봤었다. B급 감성 정말 사랑했다. 아니, 과거형은 아닌데... 지금도 사랑하지만. (B급 영화든 뭐든 요즘은 새로 나온 영화를 잘은 안 보는 듯.)
2월은? 영화 4편, 책 5권! <후회하지 않아>, <천하장사 마돈나>를 봤었다. <천하장사 마돈나>는 20대 중반까진 5-6번은 봤다. 대학 자기소개서에서 이 영화를 언급했던 기억이 난다. 대학에 들어가서도 더 많은 영화를 봤지만, 여전히 <천하장사 마돈나> 스타일, 유머러스함, 하고자하는 메시지, 연기가 참 좋았다. 안 본 지 5년이 넘었다. 가장 마음에 남았던 건. “난 무엇이 되고 싶은 게 아니야. 그냥 살고 싶은 거야.” 라던 남자 주인공 동구(배우 류덕환)의 대사.
3월은 본 영화가 전혀 적혀 있지 않다. 여백에 있는 내 글씨. “그래도 고3 첫 달이라고 영화 한 편도 안 봤네 >< ”. 언젠가 반추하면서 쓴 듯. 그래 나름 고3이라고 안 봤네. 4월은 다시 봤다. 영화 8편.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색,계>, <말할 수 없는 비밀>, <스쿨 오브 락>, 7월 3편 <6년째 연애 중>, 8월 5편 <비포 선라이즈>, <비스티 보이즈>(tmi 윤계상을 좋아했음), 9월 1편.
이렇게나 영화를 좋아했구나. 수능을 치는 그 해에도 나름 열심히 시간을 틈내어서 본 셈이다. 이러다 보니 그냥 국문학과나 인문계, 심리학과를 가고싶던 마음이 바뀌어서 전공도 영화 쪽으로 가게 된 것 같다.
나름 좋아하던 영화의 기준은, B급 감성 / 다른 삶을 살지만 마이웨이/ 이런 지점들이 드러나는가? or 멜로였던 것 같다. ‘청소년 관람 불가’인 영화도 자주 찾아 봤다. 19살에 보던 19금 영화. 19살을 넘어선 20살 그때보다 19살에 더 본 것 같기도 하고... (이 이야기만으로도 글이 또 한 편인데, 다음에...) 아무튼 기준은 이 정도였다.
서로 재밌게 본 영화를 추천해주는 친구가 딱 한 명 있었다. (주위에 영화를 많이 보는 친구가 거의 없었다.) N. 이름은 밝고, 성격은 시크하면서도 독특했다. (N도 나를 특이한 친구라고 생각했을 수도...!) 팍팍한 고2, 고3 때에도 영화 이야기를 나눌 친구가 있었기에 영화 보는 게 즐거웠던 것 같다. 태어나서 처음 영화제를 가본 것도 N과 함께. 고2 때, 함께 부산국제영화제에 영화를 보러갔었다. 나에게 영화 관련 과를 알려줘서 지원할 수도 있었다. 여러모로 많은 영향을 서로 주고받았기에, 19살과 영화를 떠올리면 반드시 떠오르는 친구.
2. 인디 음악, 라디오, 친구
영화든, 책이든. 19살에는 좋아하는 게 참 많았다. 빼놓을 수 없는 건 음악과 라디오. 음악적 취향이 다양하지는 않았고, 인디 음악을 좋아했다. 들으면 해방감이 듬뿍! 느껴졌다. 고2 때 듣기 시작한 라디오, 신해철이 진행하는 고스트네이션 때문이었다. 덕분인가. 거의 매일 새벽 2시마다 그 라디오를 들었다. (잠은 언제 잔 거니... 역시 18살, 19살... )
지금보다 무엇이든 더 좀 열정적으로 좋아했던 것 같다. 좋아하는 마음이 조금 더 원형이었다고 해야 할까...?
[고스 인디 차트]라는 코너 그리고 평소에 그 라디오에서 틀어주는 노래들이 인디 음악이었기에 익숙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때 좋아했던 밴드들이 정말 엄청나게 많았다. mp3엔 온통 음악들이 가득했다. (좋아하던 밴드 이름을 적어둔 수첩이 어딘가에 있으나 찾지 못 한다.)
기억에 의존해서 쓰면, 아마 고스에서 많이 들었던 노래는. 피터팬컴플렉스, 뷰렛, 언니네이발관, 내귀에도청장치, 이지형, 넬,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 타카피, 아일랜드시티, 피아, 못 등등...
주로 한국 인디 밴드 음악만 들었다. 그런 내게 외국 밴드 노래를 추천해주던 친구가 있었다. 2학년 때부터 3학년까지 계속 같은 반이었던 친구. 고등학교 시절 가장 좋아한 친구, H. H는 밴드에서 베이스를 연주했고, 말은 많이 없었으며, 성격이 다소 시크한 편이었다. 그런데 나는 그 시크한 친구와 너무 친해지고 싶었다. 내 눈에 너무 멋졌기 때문에. 친구 사귀는 게 많이 힘든 편은 아니었는데... H와는 친해지려고 조금 노력했던 것 같다. H는 모르겠지만, 정말 마음을 많이 썼었다... (먼산) 친해지는 게 무척 힘들었을 뿐, 친해졌다. H는 자신의 관심사와 이야기, 고민거리들을 내게 들려주었고, 나는 그 이야기들을 기꺼이 기쁜 마음으로 들었다.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점만으로도 좋았다. 그런 친구였다.
H 덕분에 마이 케미컬 로맨스, 더 유즈드, 린킨파크, 미스터빅, 엘르 가든 등의 노래를 들었다. 다이어리의 마지막 장에 효주가 적어준 포스트잇 두 장이 붙어 있다. 다이어리의 맨 앞 장에도 또다른 포스트잇. 찡하다. 못 본 지 1년 반이 넘은 친구. 미국으로 유학을 가 있는데, 잘 지내고 있는지… 얼마 전 세 달만에 카톡을 했는데, 답이 없었다. 바빠서 그럴 수 있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신경은 쓰인다…
3. 친구
글을 쓰다보니 고등학생 시절이 떠올라서 더 찡하다. 영화, 책, 인디음악, 라디오… 이 무엇보다도 내가 제일 많이 마음을 쓰고, 생각하고, 좋아한 건 친구들이었다. 친구들과의 관계가 좋으면 성적이 좀 떨어져도 괜찮았고, 친구들과의 관계가 다소 소원해지면 성적이 나아져도 마음은 한없이 우울했다.
그 시절 내 곁에 머물렀던 친구들. 친구들과의 우정을 잠시 떠올려본다. 친구들과 연락은 하지만, 그때만큼의 우정은 아닌 게 현실이다. 특히 나는 여럿이 모이는 모임이 없다. 학년마다 어울리던 무리는 있었지만, 그 무리들 중 한 명씩, 한 명씩 친해서… (고등학생 때 친구들과의 우정을, SNS에 한껏 과시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런 사람들을 보면 그래서 좀 부럽기도 하면서 씁쓸하다.)
우리는 더이상 고등학생 때처럼 매일 만나지도 못 하고, 서로를 생각하지도 않는다. 명절이나 생일 때 생각하면 많이 생각하는 듯. 또는 서로의 집안의 대소사가 있을 때. 생각해보면 지난해 엄마의 장례식 때 고등학교 때 친구들 6명 정도를 한꺼번에 봤다. 우리들 중에선 결혼한 친구도 없었기에, 다 본 건 졸업하고 처음 있는 일이었다. 둘, 둘, 둘씩 친한 친구들이 신기하게도 비슷한 시간대에 와서 같은 테이블에 있었다. 친구들은 말을 거의 하지 않았다. 나는 친구들을 보며, 이렇게 한 자리에 모이다니! 반가우면서도 고맙고 미안하고 짠한 감정이 동시에 들었다.
다음엔 언젠간, 그냥 아무 일이 없어도, 한 번 다 모였으면… (왠지 힘들 것만 같지만)
그때 H는 마침 한국에 잠시 들어와있었기에 올 수 있었다. 장례식에 오면서 “보라야, 필요한 건 없어?”, “몸은 괜찮아?”라고 물어봐준 유일한 친구. 꼭 나만 마시라고 박카스 한 통을 사왔다. 나는 그런 친구가 되어줄 수 있을가. 그런 친구였을까. 다시 연락 한 번 해봐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