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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보라 Dec 13. 2020

더 많이 말하고 싶다

[에세이 드라이브] 8기 3번째 글_7월 27일 작성 / 글감 '무대'

여러 사람 앞에서 말하는 건 언제나 두려운 일이었다. 긴장을 너무 많이 해서, 심장이 쿵쾅쿵쾅, 빨리 뛰었다.    

  

다행히도(?) 학창시절이나 대학생 때(과 특성상) 발표하는 일은 거의 드물었다. 그런데 4학년 때 학교를 잠시 벗어나 수업을 듣고 싶다는 생각에 교류 수학을 신청한 적이 있다. 근처 대학 두 군데에서 수업을 들었다. 문화콘텐츠 수업을 들은 곳에서는... 그때 50명 정도 되는 수강생들 앞에서 기획안을 발표해야 했다. 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떨리는데, 그때는 정말... 너무 창피하게도 많이 떨어버렸다. 겨우겨우 마이크는 들었는데, PPT는 잘 보이지도 않는 것 같았다. 심지어 내 목소리가 들렸다. 무지하게 떠는 목소리였다. 떨리는 목소리를 들으면서도, 제어가 되지 않으니 그냥 그 상태로 계속 발표했다. 식은땀 나는, 트라우마처럼 남은 기억이다.      


드라마 <멜로가 체질>에서 배우 안재홍이 연기한 방송사 PD가 발표하던 장면을 아는 분? 그게 저였어요. 마냥 웃으면서 볼 수 없던 장면...      


(다른 대학에서도 러시아 문학 수업을 들었는데 수강 인원이 기본 50~60명이었다. 교수님의 수업이 매우 좋아서 수업 가는 날이 즐거웠다. 그런데 수업 도중 무언가를 물어보셨을 때, 알고 있어서 기쁜 마음으로 대답하고 싶어도 대답하면 사람들이 나를 쳐다보니까,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다행히도 그 수업은 발표는 없었던 듯 하다.)     


취업준비생일 때엔 가장 큰 걱정이 자기소개서보다도, 면접이었다. 자기소개서는 혼자서 고치고 또 고칠 수 있었다. 마감 전까지. 수십번을. 그런데 면접은... 수십명까지는 아니더라도, 나의 취업여부를 가르는 권리를 지닌 낯선 인간들 앞에서 나에 대한 질문에 답을 한다는 건 걱정 그 자체였다. 다행히도(!) 조금은 자신감 없이 말하는 나를 받아준 회사들이 있었기에 회사생활은 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나에게 많은 이들에게/ 낯선 이들에게 말하기는, 되도록 하지 않길 바라는 일이었다. 정말.      


그러던 내가 조금은 달라졌다. 달라지고 있는 중이다. 


지난 5월, 망원동에 있는 책방, 제로헌드레드의 마씨 사장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사장님이 기획하는 페스티벌에서 워크숍을 해달라는 요청이었다. 페스티벌의 이름은 덕계못(덕후가 왜 계를 못 타?) 페스티벌. 덕심으로 콘텐츠를 만드는 이야기에 대해서 1시간 30분 정도의 워크숍을 진행해달라고 하셨다. 기획안을 보내면 검토해보고 알려달라고 했는데, 그 설명만 들어도 너무 하고 싶었다. 그냥 바로 한다고 말했다.      


말하는 걸 두려워하던 내가, 말을 해야만 하는 워크숍을 선뜻 한다고 했다니... 이건 1~2월부터 시작한 팟캐스트의 영향이 크다. 각각 다른 친구 A, B랑 팟캐스트를 만들고 있다. 어느새 5개월이 훌쩍 넘었다. 두 팟캐스트는 12회와 10회를 맞은 상태. 그러니 나는 22번 동안 말하기 연습을 한 셈이기도 했다. 친구랑 둘이서 이야기하는 것과, 불특정 다수가 들을 걸 생각하며 말하기를 준비하는 건 차원이 달랐다. 그럼에도 팟캐스트를 할 수 있었던 건, 일단은 내 눈 앞에 많은 사람들이 있는 건 아니었기 때문이다. 녹음을 하는 순간만큼은 나랑 친구만 있었다. 그러니 편안한 분위기에서 말할 수 있었다.      


그 경험이 쌓여가며, 준비를 제대로 한다면 1시간~1시간 30분 정도는 말을 할 수도 있구나, 라는 걸 깨달아 갈 수 있었다.      


생각해보면 나는 혼자 하는 프로젝트가 없고, 대부분(아마 모두) 프로젝트를 친구와 한다. 팟캐스트도 그 중 하나인 것처럼, 이번 덕계못 워크숍도 친구인 찬경이와 함께 준비했다. 그 친구와 9와 숫자들의 팬을 인터뷰하고, 그 이야기를 담은 책을 같이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함께하는 프로젝트이기에 혼자서 이 프로젝트를 말하고 싶지는 않았고, 함께했기에 잘 준비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6월부터 워크숍까지 두 달의 시간 동안, 워크숍을 준비하기 위해 여러번 만났다. 지난 12월부터 지금까지, 반년 동안 우리들의 프로젝트 시작부터 짚어나갔다. 이 프로젝트를 우리가 왜 하기 시작했는지, 어떻게 했는지, 잘하고 있는지 등등. 하고 싶은 말의 큰 얼개를 짜고, 각자 그 얼개에 살을 붙여나가고, 말하는 콘텐츠를 만들어나갔다. 워크숍 1주일전에는 A4 10장이 넘는 그 대본을 같이 소리내어 읽기 시작했다. 읽고 고치고, 읽고 고치고 머리에 넣고, 그 작업을 이어나갔다.      


그리고 워크숍 당일인 지난 토요일. 아는 얼굴들이 속속 도착했다. 매거진 수업을 같이 들었던 다원님과 지민님. 같이 글쓰고 팟캐스트 만드는 티끌님. 9와 숫자들의 팬인 순영님과 구름별님. 찬경의 대학 친구들 세 명. 찬경의 대학원 친구 두 명. 꽃다발, 떡, 커피 등을 사온 따스한 친구들 앞에서, 따스한 분위기 속에서 말하기 시작했다.      

아는 이들 앞이었지만, 당연히 떨렸다. 그러나 이번 떨림은 두렵고 숨고 싶은, 땅으로 꺼져버리고 싶은 종류의 떨림이 아니었다. 말을 잘 하지 못 할까 걱정스럽기는 하지만, 그래도 기다려지고 설레는 떨림이었다.      


워크숍의 순서는 총 5교시로 구성했다.      

[1교시] 올드앤뉴는 누구인가요? : 프로젝트팀 소개

[2교시] 올드앤뉴는 어떤 프로젝트를 하나요? 

[3교시] 팬들을 인터뷰하는 건 어땠나요? 

[4교시] 덕질이 콘텐츠가 된다면? : 프로젝트를 하면서 바라는 점 & 느낀 점

[5교시]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소감도 환영합니다!      


4교시에서는 워크숍을 준비하면서 느낀 점들을 이야기했는데, 글에 옮겨놓고 싶은 부분이 있어서 적어본다.       

좋아하는 대상이 존재할 때에 그 마음을 최대한 많이 표현해야한다는 걸 더 깨닫고 있어요. 만약 제가 9와 숫자들을 좋아하는데 딱히 그 마음 표현한 적 없었다면? 그러다 밴드가 해체해버리면, 허무하잖아요. 또 예를들면… 저는 9숫보다도 더 좋아하는 뮤지션은 신해철이에요. 그런데 그는 이제 이 세상에 없잖아요. 이제는 없으니 좋아하는 마음, '내가 당신 덕분에 이렇게 힘을 내고 있다'는 말을 전할 수가 없어요. 연예인이든 작가든 누구든 좋아한다면 내가 당신의 작품이나 노래 등을 이만큼이나 '좋아한다', '계속 해달라' 는 메시지를 보내야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무엇이든 시작해보는 게 중요하단 것도 많이 깨달았어요.  또 시작했으면 일단 그냥 알려야 하는 것 같아요.  

제가 이걸 하고 있단 걸 사람들에게 말하고 다니지 않았더라면? 아무도 몰랐을 거예요. 책 나오고 나서야 알았겠죠.(나오고 나서도 몰랐을 수도 있고요.)      


많이 이야기하고 다녔어요. 제가 주로 이용하는 SNS인 인스타그램에도 올리기도 하고, 여기 제로헌드레드에 와서도 9와 숫자들 팬 인터뷰하는 책 만든다는 이야기를 했었어요. (사장님도 9숫 팬인 걸 알았거든요.) 책이 아직은 나오지 않았는데도, 이렇게 북토크 같은 워크숍을 할 수 있었단 점도 너무 감사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워크숍을 준비하면서 그 과정을 정리하고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이었어요. 정말 뜻깊은 시간이었습니다.”


좋아하는 것에 대해서, 나를 좋아하고 지지하는 사람들 앞에서 이야기할 수 있었던 소중한 시간이었으니까. 이 시간 덕분에 나는 누군가 앞에서 말할 자신감도 얻었다. 앞으로 이런 기회가 먼저 주어지지 않아도, 먼저 제안해보는 사람도 되어보고 싶어졌다.


더 많이 말하고 싶다. (아, 말만 잘하는 사람 말고, 말도 잘 하는 사람!) 





구보라 


책방에서 일하고, 글 쓰고

팟캐스트를 만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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