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몽에이드의 씁쓸함
첫 병원에서 같이 근무했던 동기가 연락이 왔다.
[ㅇㅇ아 요새 머 하고 지내?]
가끔 동기의 생각이 났지만 부끄럽게도 병원 이곳저곳 전전하며 태움이라는 태움은 다 당한 덕분에 먼저 연락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이렇게 부끄러운 나에게 먼저 연락을 해준
그 친구의 다정함에 나는 숨이 멎을 것 같았다.
슬프게도 너는 아직도 다정하구나
그 친구는 나와 같이 입사한 동기지만 졸업을 한지는 오래되었고 다른 대학병원을 여럿 다니다가 왔다고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눈빛에는 병원에 대한 단 하나의 그러니까 요새말로 1의 기대감도 담겨있지 않았다.
분노한 자보다 해탈한 자가 오히려 더 무섭다고 했지 않는가
딱 그 꼴이었다.
약간 웃상인 그 친구는 늘 마스크 위로 웃음이 피어있었다.
바쁘다는 이유로 가만히 있는 나를 밀치고, “야 니가 뭔데?”라며 인격 모독을 하고
“선생님 먼저 화장실 갔다가 가봐도 될까요? ”여러 번 빌어도 면전에서 무시당했던 날
나는 신규 간호사는 사람 취급도 못 받는 간호 환경에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근무가 끝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참아왔던 눈물이 엉엉 터져 나왔다.
친하지도, 안 친하지도 않았던 입사 동기인 그 친구는 내 옆에서 휴지를 떼주고 카페에서 자몽에이드를 사 와서
"우울할 때는 달달한 걸 먹어줘야 해"
라며 우는 내 입술에 빨대를 욱여넣었다.
그날 먹은 자몽에이드의 맛은 아직도 혀에 알싸하게 남아있다.
"응 그래 난 그냥저냥 지내
최근에 빅파 대학병원 면접을 봤는데 떨어졌어 ㅋㅋ"
마음은 아팠지만 애써 유쾌하게 답장을 했다.
"헐 그 병원 보는 눈이 없다 왜 ㅇㅇ이를 떨어트린대?"
빠르게 그만둔 나와 비슷한 시기에 그만둔
이제는 이름도 기억이 안나는 그 친구를 제외하고는
동기들은 근무하면서 차차 연차를 쌓아가고 있었다.
나만 아직 0년 차에 머물러있구나
씁쓸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동기들을 생각하면 그 병원 참 좋았는데 말이야
왜 그만뒀을까? 다른 대학병원 다녔을 때 생각하면 참 나쁘진 않았는데
그 병원이 첫 병원이 아니었으면 오래 버텼겠지
이런 생각을 해봤자 의미 없는 후회였다
이미 태운 사람을 신고하고 난리법석을 피우고 나온 마당에 다시 돌아가기란 참 염치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짧은 인연을 가진 나에게 친구는 동기들과 함께 모여 술 한잔 하자는 제의를 건네주었다.
나도 아직 동기로 여겨주는 모습에 고마움과 왠지 모를 미안함이 곰팡이처럼 마음 한 곳에 몽글몽글 피어났다.
가끔은 오래 지속한 인연보다 짧은 인연에서 오는 소중함도 존재한다.
서로를 잘 알지는 못하지만 어느 정도 서로에 대한 애착이 있는 그런 사람들
인간관계에 매우 미숙한 나지만 한 번씩은 잊힌 친구들에게 먼저 카톡을 보내본다.
[안녕 나야(신천지 아님, 결혼 아님, 보험 아님) 너 잘 지내고 있지?]
그렇게 지속되는 인연도 꽤 나쁘지는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