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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세스유니 Oct 27. 2022

일단, 학교 오지 마.

 2019년 5월 어느 날, 하교하는 큰 아이의 표정은 밝았다. 운동장에서 실컷 뛰어놀고, 집으로 돌아와 아이의 알림장을 펼치니 편지가 한 통이 있었다. 장문의 긴 글, 교장의 싸인, 담임의 이름. 학교에서 보내온 공식 편지였다. 한국 나이로 7살 반부터 캐나다 밴쿠버에서 1학년을 시작한 아이가 2학년 2학기를 보내고 있던 시점이었다.


 학교에 가서 책 보고, 그림 그리고, 공부는 뒷전이어도 신나게 놀다 오면 되는 어린 나이이기 때문에 모든 것이 괜찮았다. 아니 괜찮아 보였다. 내가 아이의 영어 실력 향상에 대한 욕심을 갖고 간 것이 아니었기에 학교에 잘 다녀오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하지만, 아이는 잘 다녀오지 못했다.


 우리가 정착하게 된 동네는 이민자가 제법 많은 동네였다. 한국 사람은 물론 이란, 중국, 인도, 필리핀, 그곳 최초의 영국 이주자들까지 살았다. 역사도 오래되고, 이민자들도 많이 드나드는 지역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아이들이 영어를 잘 못하는 것은 그곳 학교 선생님들에게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같이 학교를 다니는 아이들과 부모에게도 마찬가지로 우리 아이 같은 아이들은 이제 막 캐나다에 왔나 보다고 생각하는 분위기였다. 문제는 언어가 아니라 태도였다. 캐나다 1학년 아이들도 한국 1학년처럼 천방지축에 자기 마음대로 행동한다. 나의 큰 아이도 평범한 1학년처럼 보였기 때문에 캐나다 학교의 첫 담임도 아직 어리니까 괜찮아질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2학년이 되어도 나아지지 않았다. 아이는 수업 시간에 본인이 원하는 대로 되지 않을 때 책상을 발로 찬다고 했다. 소리를 지르거나 말을 아예 안 해버린다고 했다. 선생님의 지시에 따르지 않고, 수업 시간에 수업에 집중하지 않으며, 도서 코너에 앉아 있는다고 했다. 간혹 수업에 참여한다고 하더라도 수학 문제를 독특하게 푼다는 이야기까지 했다. 귀국이 얼마 안 남은 시점에 많이 혼란스러웠다. 

 

 학교 첫 등교 날부터 2년이라는 시간 동안 매일 같이 오늘 하루는 학교에서 아무 일이 없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런 날은 잘 없었다. 결국 이번엔 학교에서도 벼르다가 편지를 쓴 모양이었다. 한숨이 바닥을 꺼뜨릴 것 같이 쏟아졌다. 눈물도 나고, 화도 났다. 다짜고짜 아이에게 크게 화를 냈다. 어디서부터 잘 못된 것일까. 한국 같으면 물어볼 곳이라도 많고, 진작에 선생님과 두루 이야기하고 조율하며, 상황을 이해시켜 보았을 텐데, 그러하지 못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화는 아이에게 쏟아지고, 아이의 가슴에 화살이 되어 꽂혔다. 무슨 잘못인지도 모르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잘못했다고 울었다. 나도 같이 울었다.

 ‘ 나도 모르겠어. 이 상황을 어떻게 정리해야 할지.’


 그 편지의 내용엔 자폐가 의심되니 소아 정신과 스페셜리스트 (전문의)에게 다녀와야 한다고 했다. 캐나다에서는 학교의 공식적인 요구에 불응할 시 학교에서 아이 등교를 거부할 수 있다. 수많은 엉뚱한 행동에도 단 한 번도 의심해 본 적이 없는 자폐라는 단어를 듣고, 정말 그런가?라는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그날 밤 잠이 오지 않았다. 캐나다에서는 패밀리 닥터 (가정 보건의)를 만나고, 스페셜리스트 예약이 가능하다. 다음 날, 매번 가던 패밀리 닥터에게 방문해 상황을 전달했고, 그가 소개해 준 밴쿠버의 가장 유능한 소아정신과 스페셜리스트를 소개받았다. 이 의사만큼 잘 보는 사람은 없다고 했다. 진찰을 위해 예약을 했지만, 두 달이 넘게 걸린다고 했다. 그렇게 오래 기다릴 수 없는 상황이었다. 얼른 진단을 받고, 자폐인지 아닌지 확인을 할 필요가 있었다. 안 그러면, 학교에서 등교를 거부당할 수도 있었다. 사정이 급하니, 취소되는 예약이 있으면 꼭 연락 달라고 했다. 학교에도 편지를 받은 뒤의 상황을 보고 하고, 최대한 빨리 진찰을 받겠다고 했다. 학교는 기다려 보겠다고 했다. 

 

 그로부터 2주쯤이 지났을까. 아이는 Dr. Van을 만났다. 그 의사는 반갑게 인사를 나누며, 아이에게 몇 가지 질문을 했다. 일상적인 질문이었고, 질문은 10분도 오가지 않았다. 특별한 검사는 하지 않았다. 의사는 나를 보며, 안심하라는 듯 편안한 미소로 “이 아이는 자폐가 절대 아닙니다.”라고 말했다. 두근거리는 가슴은 더 쿵쾅 뛰었다. 다행인 건지, 더 복잡해진 건지 그 당시엔 잘 몰랐다. 기쁘지도, 슬프지도 않았다. 앞으로 이 아이의 학교생활을 위해 난 무얼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은 채 집으로 돌아왔다. 바로 다음날 학교에 우리 아이가 자폐가 아님을 알렸다. 그런데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반응이 돌아왔다. 그들은 재검사를 요청했다.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비명을 참았다. 내 영어가 조금 더 능숙했다면, 내 아이의 성향을 잘 이해시킬 수 있었을까? 학교의 재검 요청에 난 ‘왜?’ 정도로 반응하고, 결국 ‘알겠다.’고 답했다. 


 그 후 며칠간 나 자신을 끊임없이 비난했다. 이 모든 게 내 잘 못 같았다. 이 아이를 낳은 것부터 아니 결혼을 한 것부터 잘못되었다고 생각했다. 다 내가 시작한 일이라서, 다 나를 닮아서 이렇게 된 것 같았다. 우울하고, 외로 웠다. 내 서러움을 보듬어줄 남편도 옆에 없고, 가족도 없었다. 사라지고 싶었다. 우울하고, 슬픈 마음을 꺼내어 정화시킬 방법은 도저히 없었다. 이 감정을 바꿔내야겠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그냥 한없이 우울하고 싶었다. 그렇게 불안함과 우울함을 동시에 느끼며, 멍하니 있었다. 가장 지치고, 우울한 그때, 큰 아이는 하얀 얼굴에 동그란 안경 밖으로 초승달 같은 눈을 한 채 나를 쳐다보았다. 

“엄마 사랑해요.” 


 그 아이는 왜 그때 그렇게 멀뚱히 앉아 있는 나에게 와서 눈을 맞추고, 그 말을 해주었을까. 블랙홀에서 순식간에 빠져나오는 기분이 든 그 순간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아이를 안으며, 나도 많이 사랑하고, 미안하다고 말했다. 토실토실한 볼, 움푹 들어간 예쁜 보조개, 나를 꽉 끌어안아주는 짧은 팔, 무해한 내 아이의 맑은 웃음이 위로 이자, 삶의 의미임을 깨달았다. 

 ‘자폐면 어떻고, 아니면 어때. 내 아이가 이렇게 건강하고, 예쁘기만 한데. 웃으며, 행복하게 살게 해주고 싶다. 지금 보다 더. ’ 


 그날 즉시, Dr. Van에게 연락했다. 의사는 내 사정을 듣고는 다시 와보라고 했다. 다시 만난 의사는 어이가 없다는 듯 학교가 이상하다고 했다. 본인의 이메일을 알려주며, 학교에서 또다시 재검을 요청한다면, 자신의 이메일을 학교에 전해 주라고 했다. 의사가 아니라는데, 학교에서 우길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학교에서는 자폐 진단이 나와야, 수업 참여에 어려움을 겪는 아이에게 보조교사의 고용 지원을 교육청에 요청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럼에도 자폐가 아닌 걸 자폐라는 진단을 받아 올 수는 없었다.


 그 당시 Dr. Van은 내 아이가 자폐는 아니지만, 언어 발달이 다른 아이에 비해 늦어 정서적으로 매우 불안한 상태라고 했다. 불안한 아이가 학교에 가서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놓였을 때, 얼마나 힘들었을지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다. 그것도 모르고, 다른 아이처럼 학교에만 데려다 놓으면 알아서 배우고, 크겠지라고 생각했던 나 자신이 부끄러웠다. 내 아이의 성향과 기질을 더 정확히 파악할 필요가 있었다. 그로부터 6개월간 한국 가는 날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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