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삐우스에 대하여

상징주의의 전범(典範), 그리고 여성과 여성성의 문제

by 김양훈

[옮긴이 해설]

상징주의의 전범(典範)
기삐우스에 대하여
러시아 현대대표 시선 『삶은 시작도 끝도 없다』
옮긴이 이명현 교수

러시아 문학사에서 기삐우스는 ‘새로운 시’ 혹은 현대시의 첫 페이지를 연 시인으로 평가된다. 그녀는 격정적인 세기말의 정서를 이전의 19세기 시와는 전혀 다른 스타일로 구현하였다. 공리주의적이고 보편주의적인 기존의 시풍을 비웃기라도 하듯, 지극히 내밀하고 주관적인 자신만의 세계에 침잠하고 몰입하는 그녀의 시는 모더니즘이란 신(新)조류가 무엇인지를 당대인들에게 선구적으로 제시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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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모더니스트적인 면모가 뚜렷하게 드러나는 대목은 무엇보다도 그녀의 시가 표방하는 개인주의다. 연대와 공감과 인도주의의 문학에 길들여져 있던 당대 독자들은 그녀의 시를 읽으면서 모종의 곤혹감과 해방감을 동시에 맛보게 된다. “나는 나 자신을 신처럼 사랑한다”(『헌사』)라는 유명한 구절은 마치 개인주의 미학의 슬로건처럼 들린다. 보편적인 연대와 공감이 아니라 자아의 고립과 자의식에의 침잠을 미화함으로써 개성의 절대성과 유일성을 옹호하는 것―현대시에 주어진 이 첫 번째 과제는 기삐우스의 첫 번째 과제이기도 했다. 가령 「책 표지에 남긴 글」을 보면, 그녀의 서정적 주인공은 그 어떤 공적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나의 비밀스럽고 비범한 꿈들”의 노예이며, 보편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유일한 이야기들”을 구현하고자 한다. 그러한 서정적 주인공에게 친근하고 사랑스럽게 다가오는 것은 “모든 외딴 것”이다.

데까당스, 즉 ‘시적 퇴폐’를 선도한 것 역시 기삐우스의 주된 공적이다. 데까당적 성향은 그녀의 시보다 개성과 언행에서 훨씬 더 강렬하게 표출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와 개성에서 두루 관찰되는 요소를 꼽자면, 그것은 대립적인 양극단의 공존이다. 「밑바닥까지」를 보면, 오만과 겸손, 기쁨과 고통, 다정함과 잔혹함, 진실과 기만을 한꺼번에 수용하고 긍정하는 것, 그리고 그러한 양극단을 그것들이 서로 상통할 때까지 맹목적으로 추구하는 것이 기삐우스의 시와 개성에서 공히 나타나는 데까당적 성향이다. 그것은 일종의 퇴폐적 극단주의―최대주의로 간주될 수 있을 것이다. 「노래」와 「헌사」 그리고 사랑은 하나」를 읽을 때 느껴지는 대립적인 양가감정 역시 그러한 특징과 무관하지 않다. 이 시들 속에는 지고한 것에 대한 갈망과 그것의 좌절에 대한 절망적 예감, 영원한 사랑에 대한 믿음과 필연적인 고독과 죽음에 대한 공포가 나란히 공존하고 있다. 기삐우스의 시의 또다른 특징은 특유의 종교적인 시심(詩心)에서 찾을 수 있다. 그녀 자신의 표현에 따르면, ‘시는 곧 기도(祈禱)’이다. 이 정의는 다른 누구보다 그녀 자신의 경우에 해당된다. 가령 「노래」는 기삐우스가 즐겨 사용한 메아리 운(韻)의 반복을 통하여 음악적인 주술에 가까운 시 텍스트를 선보인다. 그렇다면 주술이자 기도인 그녀의 시가 궁극적으로 희구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미지의 것” “이 세상에 없는 것”「노래」이며, “어렴풋한 것” “비밀스러운 것”(「책표지에 남긴 글」)이다. 요컨대 그녀는 이성으로 닿을 수 없는 종교적인 신비의 영역을 음악적인 시를 통해 열어 보이고자 한다. 바로 그러한 점네서 기삐우수의 시는, 초월적인 이데아의 세계를 암시하는 음악 같은 시를 추구한 러시아 상징주의의 전범(典範)이 된다.


[관련 논문 초록 및 해설]

장은재의 논문 <지나이다 기피우스 시에 나타난 여성과 여성성의 문제: 시 「여성적인 것은《없다》」, 「여자-성」, 「영원히 여성적인 것」을 중심으로>의 초록
여성과 여성성의 문제
3기피우스는 남성복, 남성 필명, 시 속 남성 서정적 자아, 그리고 향기 나는 담배를 좋아했다.jpg 남성복, 남성 필명, 남성 서정적 자아, 그리고 향기 나는 담배를 좋아했던 기삐우스
모더니즘 일반과 러시아 상징주의에서
성(sexuality)의 담론과 형이상학적 원리로서의 여성성(femininity)
여성 작가로서 기피우스는 여성과 여성성에 대해 모순되는 태도를 취한다. 그는 여성과 여성성을 서로 구별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육을 가진 성별로서의 여성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태도를 보인다. 기피우스에게 여성성이란 긍정적인 ‘영원한 여성성’의 원리와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원리를 동시에 담지(擔持)하는 것이었데, 이를 해결하기 위해 기피우스는 긍정적 여성성은 성과 분리 가능한 정신적인 원리로, 부정적 여성성은 성에 분리 불가능한 것으로 정립한다. 시 「여자-성」, 「영원히 여성적인 것」은 양극단의 여성성에 대한 기피우스의 서로 다른 태도를 보여주며, 그가 모순적 여성성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던 방식을 보여준다. 그러나 「여성적인 것은 《없다》」는 기피우스가 여성이라는 자신의 물리적/사회적 성별로부터 끝내 자유로울 수 없었음을 보여준다.
기피우스는 가부장적인 젠더 담론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며, 여성 혐오적이라는 비판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런데도 그의 시들은 지배 담론 속에서 확보되지 못한 여성과 여성성의 위치를 어떻게든 마련하고자 했던 20세기 초 ‘주류’ 문단에서의 시도들을 보여준다. - 장은재의 논문 <지나이다 기피우스 시에 나타난 여성과 여성성의 문제: 시 「여성적인 것은《없다》」, 「여자-성」, 「영원히 여성적인 것」을 중심으로>의 초록 전문.

[기피우스의 성 정체성 관련 해설]

지나이다 기피우스(Zinaida Gippius)는 러시아 상징주의의 '데카당트 마돈나'라 불리며, 여성 작가로서 매우 독특하고 모순적인 성 정체성을 구축한 인물입니다. 그녀의 태도는 단순히 여성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성별 이분법을 초월하려는 시도에서 비롯된 복합적인 양상을 띱니다. 기피우스가 보여준 여성성과 여성에 대한 모순된 태도를 세 가지 핵심 지점으로 정리해 드립니다.

1. 남성적 필명과 '언어적 남장'

기피우스는 자신의 작품 활동에서 여성성을 철저히 배제하려 노력했습니다. 그녀는 시를 쓸 때 여성형 어미 대신 남성형 어미를 사용했으며, 비평 활동을 할 때는 '안톤 크라이니(Anton Krainy)'라는 남성 필명을 고집했습니다.

∎ 모순점: 그녀는 여성으로서 시대를 앞서가는 지적 영향력을 행사하면서도, 정작 '여성 작가'라는 범주에 묶이는 것을 극도로 혐오했습니다. 이는 당시 '여성 문학'이 감상적이고 부차적인 것으로 치부되던 풍토에 대한 거부감이기도 했습니다.

5 Z. Gippius by L.Bakst (1906, Tretyakov gallery)-지나이다 기피우스 초상 1906년 연필, 분필, 종이 판지.jpg Z. Gippius 초상 by L.Bakst 1906년 연필, 분필, 종이 판지

2. 안드로진(Androgyne, 양성구유)의 이상

기피우스에게 있어 이상적인 인간상은 남성도 여성도 아닌, 혹은 둘이 통합된 '양성구유(兩性具有)'적 존재였습니다. 그녀는 생물학적인 여성성을 '지적이지 못하고 육체에 매몰된 것'으로 보며 경멸하는 태도를 보이기도 했습니다.

∎ 육체적 거부: 그녀는 결혼 생활 중에도 성적인 관계를 거부하며 정신적 결합을 강조했습니다.

∎ 외양의 모순: 흥미롭게도 그녀는 남장을 즐기면서도 동시에 아주 화려하고 여성적인 드레스를 입거나 긴 금발을 과시하는 등, 외양적으로 극단적인 여성성과 남성성을 동시에 연출했습니다.

3. 여성 혐오와 여성적 신비주의의 공존

그녀의 글에서는 전형적인 여성(어머니, 주부, 감상적인 여성)에 대한 냉소와 혐오가 자주 드러납니다. 하지만 종교적·철학적 차원에서는 '영원한 여성성(Eternal Feminine)'이라는 개념에 깊이 천착했습니다.

∎ 이론과 실제의 괴리: 지적 체계 안에서는 여성성을 신성하고 구원적인 원리로 숭상했지만, 현실의 구체적인 여성들에게는 '지적으로 열등하다'라는 식의 가부장적 시선을 투사하는 모순을 보였습니다.

요약하자면

기피우스의 모순은 "여성으로 태어났으나, 여성이기를 거부함으로써 진정한 (양성구유적) 인간이 되고자 했던 갈망"에서 비롯됩니다. 그녀는 자신을 "내 영혼에는 성별이 없다"라고 규정했으며, 이러한 태도는 그녀를 당대 남성 중심적 문단에서 독보적인 '여왕'의 위치에 서게 했지만, 동시에 자신의 여성성과 끊임없이 투쟁하게 만든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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