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by 꼰스딴찐 드미뜨리예비치 발몬뜨

by 김양훈

바람

꼰스딴찐 발몬뜨

나는 현재에 연연하며 살 수 없네.

나는 불안한 꿈들을 사랑하네,

타는 듯한 태양 아래,

축축하고 희미한 달빛 아래.

나는 현재에 연연하며 살고 싶지 않네.

나는 귀 기울이네, 암시적인 현의 울림에,

꽃과 나무의 웅성거림에,

바다 물결이 전하는 옛이야기에.

나는 형언할 수 없는 욕망으로 괴로워하며

알 수 없는 미래를 살아가네.

안개 자욱한 미명 속에 한숨 쉬고

저녁 먹구름 속을 떠다니네.

종종 예기치 않은 희열 속에서

입맞춤으로 잎사귀들 불안케 하네.

나는 지칠 줄 모르는 질주 속에 살아가네.

끝 모를 불안 속에 살아가네. (1895)


이명현 엮고 옮김. 러시아 현대대표 시선

『삶은 시작도 끝도 없다』(창비세계문학)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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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독서과제 시선집 연재(7)


꼰스딴찐 드미뜨리예비치 발몬뜨

옮긴이의 '발몬뜨' 소개 글

꼰스딴찐 드미뜨리예비치 발몬뜨
Konstantin Dmitrievich Bal’mont
(1867~1942)

꼰스딴찐 드미뜨리예비치 발몬뜨는 1867년 6월 3일 블라지미르 현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는 민중의 옹호자가 되기 위해 모스끄바 대학 법학부에 입학했다가 작가의 길로 선회하여 중도에 학업을 포기하였다. 그 후 순전히 독학으로 문학 및 어학을 공부하여 여러 개 국어를 습득하고 유럽 각국의 시를 섭렵하였다. 1890년대부터 스칸디나비아, 유럽, 남아프리카, 오세아니아 등 세계 각지를 여행하고, 여러 민족의 문화를 몸소 체험하면서 세계 문화에 대한 방대한 지식과 독창적인 시각을 구축해 나갔다.

1890년대에 세 권의 시집 『북방의 하늘 아래』(Pod Severnym nebom, 1894), 『무한 속에서』(V bezbrezhnosti, 1895), 『정적』(Tishina, 1898)을 상재하여 러시아 신문학의 창시자로서 명성을 얻었다. 시인 발레리 브류소프(Valerii Bryusov)와 교분을 맺고, 메레시꼽스끼(D. Merezhkovskii), 민스끼(N. Minskii), 기삐우스(Z. Gippius), 쏠로구쁘(F. Sologub) 등 뻬쩨르부르그의 상징주의자들과 교유했다. 1900년에 그는 모스끄바에서 상징주의 써클의 결성을 주도하였고, 이후 러시아 상징주의 구심점이 되는 스꼬르삐온(Skorpion) 출판사를 근거지로 삼아 상징주의 문학의 지도자로서 시 창작과 번역, 비평, 강연 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해 나갔다.

1900년을 기점으로 발몬뜨는 창작 생애의 절정기를 맞이하게 된다. 초기 시에서 지배적이었던 어둡고 비관적인 정조가 말끔히 사라지고 삶에 대한 환희와 긍정적인 전망이 전면에 부상한다. 이 시기를 대표하는 시집 『우리 태양처럼 되자』(Budem kak solntse, 1903), 『오직 사랑, 일곱 빛깔의 존재』(Tol’ko lyubov’. Semitsvenik, 1903)를 통해서 그는 상징주의의 거장으로서 입지를 굳힌다. 원초적인 자연의 선명한 이미지들이 약동하고, 시어의 음성적 층위가 세밀하게 정련된 그의 시들은 ‘발몬뜨적 스타일’이라는 용어가 생겨날 정도로 강렬한 인상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1905년 혁명을 적극 지지했던 그는 제정 러시아 당국의 압력을 받고 망명을 결행한다. 1913년 정치적 망명자들에 대한 특별사면이 선포되자 그는 다시 조국으로 돌아와 동료들과 추종자들로부터 열렬한 환영을 받는다. 그러나 당시 이미 그의 창작력은 고갈된 상태였다. 1905년 혁명 이후 그는 주로 슬라브 민속을 모티브로 삼은 시들을 세계 각국에서 꾸준히 발표하지만, 그의 시에 대한 독자들의 관심은 현저하게 줄어들게 된다. 1917년 10월 혁명 이후 볼셰비즘과 혁명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를 품게 된 그는 1920년 6월 영원히 러시아를 떠난다. 이후 망명지 파리에서 잡지 편집과 번역일을 지속하였으나, 점차 시를 발표할 지면을 얻기가 어려워진 그는 말년에 비참한 생활고를 겪는다. 조국에 대한 향수에 시달리던 그는 파리 근교의 요양원에서 정신질환을 앓다가 1942년 12월 23일에 사망한다.


문학적 배경과 시평
Konstantin Balmont- Symbolist poet
러시아 상징주의 문학의 거장, 꼰스딴찐 발몬뜨(Konstantin Balmont)의 시 <바람(Ветер)>은 세기말(Fin de siècle)의 불안과 탐미주의적 정서가 응축된 작품입니다. 1895년에 발표된 이 시는 러시아 문학사에서 ‘상징주의’라는 새로운 물결이 어떻게 태동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이 시에 대한 배경과 시평을 정리해 드립니다.

1. 문학적 배경

시대적 상황: 세기말의 불안

19세기말 러시아는 제정 러시아의 몰락 조짐과 함께 사회적 혼란이 가중되든 시기였습니다. 당시 지식인과 예술가들 사이에서는 현실의 모순에서 벗어나 내면의 세계, 초월적 가치, 미지의 영역으로 침잠하려는 경향이 강해졌습니다.

러시아 상징주의의 태동

발몬뜨는 러시아 상징주의의 제1세대를 이끈 주역입니다. 이들은 시를 단순히 현실을 묘사하는 도구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세계와의 교감’을 위한 음악적인 매개체로 보았습니다. <바람>이 수록된 초기 시집들은 당시 러시아 문단에 신선한 충격을 주며 현대적 서정시의 기틀을 마련했습니다.


2. 시평: 정처 없는 영혼의 음악적 질주

현재를 거부하는 초월적 의지

시의 도입부부터 화자는 "현재에 연연하며 살 수 없네"라고 단호하게 선언합니다. 이는 단순히 현실 도피가 아니라, 고착된 존재(Being)를 거부하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생성(Becoming)의 상태로 나아가려는 의지입니다. 그에게 현실은 '축축하고 희미한' 권태의 공간이며, 진정한 삶은 '불안한 꿈' 속에 존재합니다.

자연과의 범신론적 교감

화자는 자신을 '바람'에 투영합니다. 바람은 형체가 없으며, 어디에도 머물지 않습니다.

• 청각적 심상: "현의 울림", "꽃과 나무의 웅성거림", "물결의 옛이야기" 등 자연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행위는 시인이 세상의 비밀스러운 암호를 해독하는 '예언자'적 존재임을 시사합니다.

• 역동적 결합: 저녁 먹구름 속을 떠다니고 잎사귀에 입을 맞추는 행위는 인간의 자아와 자연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범신론적 합일을 보여줍니다.

'불안'의 미학적 승화

이 시에서 가장 중요한 키워드는 '불안'입니다. 보통 불안은 부정적인 감정으로 읽히지만, 발몬뜨에게 불안은 창조적 에너지의 원천입니다.

"형언할 수 없는 욕망"과 "알 수 없는 미래"는 화자를 끊임없이 움직이게 만드는 동력입니다.

마지막 구절인 "지칠 줄 모르는 질주"와 "끝 모를 불안"은 정적인 안주를 거부하고 영원히 유랑하는 현대인의 고독하면서도 역동적인 영혼을 상징합니다.

음악성과 리듬

발몬뜨의 시는 러시아어 특유의 음악성이 극대화된 것으로 유명합니다. 이 번역 시에서도 느껴지듯, 반복되는 문장 구조와 'ㄹ' 발음이 주는 유연함은 마치 바람이 불어 가는 듯한 리듬감을 형성하여 독자를 화자의 감정적 질주에 동참시킵니다.

3. 종합 의견

발몬뜨의 <바람>은 '머무름'을 거부하고 '흐름'을 선택한 한 시인의 영혼 선언문과 같습니다. 시인은 안개와 먹구름, 달빛이라는 몽환적인 이미지들을 통해 19세기말의 우울(Spleen)을 찬란한 예술적 희열로 치환해 냈습니다.

현실이라는 지면에 발을 붙이기보다, 보이지 않는 바람이 되어 영원한 미지를 향해 달려가고자 하는 그의 갈망은 시대를 넘어 오늘날의 독자들에게도 깊은 해방감을 선사합니다.

알트만의 캐리커처 '발몬뜨'
Balmont by Altman

위 캐리커처는 러시아의 유명한 아방가르드 예술가 나딴 알트만(Nathan Altman)이 그린 꼰스딴찐 발몬뜨(Konstantin Balmont)의 캐리커처(샤르주, Sharge)입니다. 발몬뜨의 외양적 특징과 당대 시인으로서의 위상을 재치 있게 포착한 작품으로, 주요 특징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작품의 배경

작가: 나딴 알트만 (안나 아흐마또바의 초상화로도 매우 유명한 화가입니다.)

제목: 꼰스딴찐 발몬뜨 (그의 강연에서)

시기: 러시아 상징주의와 아방가르드가 교차하던 20세기 초반으로 추정됩니다.

2. 이미지의 시각적 요소 분석

과장된 외모: 발몬뜨 특유의 치솟은 콧수염과 뾰족한 턱수염, 그리고 뒤로 넘긴 풍성한 곱슬머리가 강조되었습니다. 이는 그가 평소 고수하던 '태양의 시인' 혹은 '귀족적 예술가'로서의 자의식을 유머러스하게 표현한 것입니다.

강연하는 시인: 하단의 텍스트(К. Д. Бальмонт (къ его лекціи))에서 알 수 있듯, 강단 뒤에서 청중을 압도하며 강연하거나 시를 낭송하는 모습을 담았습니다.

꽃의 상징성: 단상 앞에 놓인 꽃 줄기는 그가 탐미주의적이고 섬세한 서정시의 대가임을 시각적으로 보여줍니다.

대조적인 묘사: 발몬뜨 본인은 정교하고 날카로운 선으로 묘사된 반면, 하단의 청중들은 아주 단순하고 거친 선으로 처리되었습니다. 이는 대중 위에 군림하는 스타 시인으로서의 발몬뜨의 위치를 극명하게 드러냅니다.

3. 문화적 의미

당시 발몬뜨는 "나는 이 세상에 태양을 보러 왔다"고 선언할 만큼 자기애가 강하고 화려한 퍼포먼스를 즐기는 시인이었습니다. 알트만은 이러한 발몬뜨의 '자아'를 비꼬기보다는, 그가 가진 독특한 카리스마와 예술적 아우라를 날카로운 필치로 잡아냈습니다.

발몬뜨의 시에서 느껴지는 그 역동적인 '바람'과 '질주'의 에너지가 이 그림 속의 날카로운 눈매와 콧수염의 각도에서도 느껴지는 듯합니다. 당시 러시아 문단의 분위기를 엿볼 수 있는 흥미로운 자료입니다.


[덧]

떠도는 바람
위에 덧붙여 올린 이미지 속의 시는 꼰스딴찐 발몬뜨(Konstantin Balmont)가 1895년에 발표한 <떠도는 바람(Ветер перелётный)>입니다. 앞서 읽었던 시와 비슷한 제목(혹은 연작)이지만 내용은 다르며, 밤과 낮의 대립과 순환을 아름다운 음악적 언어로 노래한 작품입니다. 원문의 리듬과 분위기를 살려 번역해 드립니다.
번역

떠도는 바람

- 꼰스딴찐 발몬뜨 (1895)

떠도는 바람이 나를 애무하며

슬프게 속삭였네: "밤이 낮보다 강하다네..."

노을은 흐릿해지고 먹구름은 검게 변해 -

흐릿한 가문비나무들은 떨며 당황해하네...

거친 물결 소용돌이치는 어두운 바다 위를,

떠도는 바람이 물결 따라 달려갔네...

밤이 세상을 지배했네...

그러는 사이 멀리 바다 너머로

-불타는 눈 하나가 타올랐네..

하늘에는 새로운 꽃 한 송이가 피어났고 -

부활한 빛으로 동방이 번쩍였네. 바람이 바뀌어,

내 눈가에 향기를 불어넣으며

미소 짓듯 속삭였네: "낮이 밤보다 강하다네..."


시평 및 감상 포인트

이 시는 앞선 작품이 가졌던 '불안'과 '질주'의 정서와는 달리, 빛과 어둠의 대조를 통한 희망적 반전을 보여줍니다.

대칭적 구조: 시의 전반부는 "밤이 낮보다 강하다"는 비관적 속삭임으로 시작하지만, 후반부에는 "낮이 밤보다 강하다"는 낙관적 결말로 끝납니다. 이는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결국 새로운 빛(태양)이 떠오를 것이라는 순환의 철학을 담고 있습니다.

감각적 묘사: "불타는 눈(태양)", "하늘에 핀 꽃(여명)" 등 상징주의 특유의 화려한 비유가 돋보입니다. 바람은 단순한 기상 현상이 아니라 메시지를 전달하는 영적인 전령사로 그려집니다.

분위기의 전환: 가문비나무가 떨고 구름이 검게 변하는 전반부의 '공포와 불안'이, 동방의 빛과 향기로운 바람이 부는 후반부의 '환희'로 교차되는 지점이 이 시의 백미입니다.

앞서 읽은 시가 내면의 끝없는 갈망을 노래했다면, 이 시는 그 갈망 끝에 마주하는 세계의 역동적인 생명력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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