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느릿느릿한 러시아어의 세련미

by 꼰스딴찐 드미뜨리예비치 발몬뜨

by 김양훈

나는 느릿느릿한 러시아어의 세련미

꼰스딴찐 발몬뜨


나는 느릿느릿한 러시아어의 세련미.

내 앞의 다른 시인들은―전조(前兆)들,

이 언어 속에서 내가 처음으로 발견했네,

낭랑한 선율, 분노와 온유의 소리를.


나는 갑작스런 굴곡,

나는 요동치는 천둥,

나는 투명한 냇물,

나는 만인을 위한 존재이자

-그 누구의 사람도 아니네.


끊길 듯 합쳐지는 거품 가득한 파도 소리,

스스로 존재하는 대지의 천연색 돌들,

푸른 오월의 숲속 메아리,

이 모든 것 전취하리, 타인들 것까지 앗아오리.


꿈처럼 영원히 젊고,

나 자신과 타인들에 대한

열렬한 사랑으로 강건한

나는 세련된 시. (1901)


이명현 엮고 옮김. 러시아 현대대표 시선

『삶은 시작도 끝도 없다』(창비세계문학)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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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독서과제 시선집 연재(8)


K. D. 발몬뜨 by 막시밀리안 볼로신, 1900년대
문학적 배경과 시평
발몬뜨의 1901년 작 <나는 느릿느릿한 러시아어의 세련미(Я — изысканность русской медлительной речи)>는 러시아 상징주의 문학의 '황금기'를 상징하는 선언적 작품입니다. 이 시는 시인 개인이 가진 예술적 자부심을 넘어, 러시아어라는 언어 자체가 가진 음악적 가능성을 시의 본질로 끌어올린 기념비적인 시입니다. 이 시의 배경과 시평을 정리해 드립니다.

1. 문학적 배경:

상징주의의 '음악성'과 자아의 팽창

"음악이 무엇보다 우선이다"

1900년대 초 발몬뜨는 러시아 문단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프랑스 상징주의의 영향을 받아 "시는 의미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소리의 울림을 통해 영혼에 직접 닿아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이 시가 쓰인 1901년은 그가 자신의 시적 언어가 완성 단계에 이르렀음을 확신하며, 스스로를 '언어의 지배자'로 선포하던 시기입니다.

러시아어의 재발견

발몬뜨 이전의 러시아 시가 주로 서사적이거나 사상적인 측면을 중시했다면, 발몬뜨는 러시아어의 모음 조화(Assonance)와 두운(Alliteration)⁽¹⁾을 활용해 감각적인 세련미를 구축했습니다. 그는 스스로를 이전 시인들(전조들)이 미처 발견하지 못한 러시아어의 숨은 선율을 깨운 인물로 규정합니다.


2. 시평:

언어의 폭군이자 노예인 '나'

시적 자아의 전능성 (Self-Deification)

시는 "나는 ~이다"라는 강력한 단언으로 시작합니다. 화자는 자신을 단순한 시인이 아니라 '러시아어의 세련미' 그 자체와 동일시합니다.

"내가 처음으로 발견했네"라는 구절은 선배 시인들의 업적을 존중하면서도, 자신이 도달한 미학적 경지가 독보적임을 강조하는 오만한 천재성을 드러냅니다.

"타인들 것까지 앗아오리"라는 표현은 예술적 영감을 위해서라면 세상의 모든 소리와 색채를 약탈하듯 흡수하겠다는 시인의 포식자적 창조성을 상징합니다.

역동적인 자연 현상과의 합일

화자는 고정된 존재가 아닙니다.

∎ "갑작스런 굴곡", "요동치는 천둥", "투명한 냇물": 이는 시의 리듬이 가져야 할 다채로움을 형상화한 것입니다. 때로는 거칠게 몰아치고, 때로는 투명하게 흐르는 시적 언어의 가변성을 자신의 정체성으로 삼고 있습니다.

∎ "만인을 위한 존재이자 - 그 누구의 사람도 아니네": 예술은 모두에게 읽히지만, 그 본질은 누구에게도 예속되지 않는다는 예술의 자율성을 선언합니다.

'세련된 시'로서의 영원한 젊음

마지막 연에서 화자는 시를 '꿈처럼 영원히 젊은 것'으로 정의합니다. 발몬뜨에게 시는 늙지 않는 생명력이며, 자신과 타인을 향한 '열렬한 사랑'을 동력으로 삼는 강건한 실체입니다. 이처럼 시인은 자신을 '세련된 시' 그 자체로 박제함으로써, 시간의 흐름을 이겨내는 불멸성을 획득합니다.

3. 종합 의견

이 시는 발몬뜨가 추구한 '태양의 시학'의 정점입니다. 그는 러시아어의 느릿하면서도 우아한 리듬 속에서 천둥 같은 분노와 시냇물 같은 온유함을 동시에 발견해 냈습니다.

"나는 세련된 시"라는 마지막 선언은, 시인이 단순히 글을 쓰는 존재가 아니라 언어라는 질료를 통해 새로운 우주를 창조하는 신성한 존재임을 천명하는 것입니다. 1895년의 <바람>에서 보여준 불안한 질주가 1901년에 이르러 확신에 찬 미학적 제국주의로 완성되었음을 보여주는 작품이라 할 수 있습니다.

[참고] 이 작품은 발몬뜨의 시집 『빌딩들(Здания)』 혹은 『우리는 사랑과 같으리(Будем как солнце)』 시기의 정서를 대변하며, 러시아 상징주의가 가진 유미주의적 성격과 시적 자아의 극대화를 가장 잘 보여주는 텍스트 중 하나입니다.


[註1]

모음 조화(Assonance)와
두운(Alliteration)에 대하여
시의 음악성을 극대화했던 발몬뜨의 시학을 이해하는 데 있어 모음 조화(Assonance)와 두운(Alliteration)은 가장 핵심적인 도구입니다. 이 두 기법은 언어를 단순한 의미 전달 수단에서 '소리의 예술'로 격상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1. 모음 조화/모음운(Assonance, 母音韻)

모음 조화(모음운)는 단어들의 모음 소리가 반복되는 현상을 뜻합니다. 자음은 다르더라도 모음이 주는 특유의 울림을 통일시키는 기법입니다.

‣ 효과: 시 전체에 일정한 '색채'나 '분위기'를 부여합니다. 모음은 소리의 '밝기'를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 예시 (영어): "mellow wedding bells" (e 소리의 반복으로 부드러운 느낌 강조)

• 발몬뜨의 경우: 그는 자신을 "느릿느릿한 러시아어의 세련미"라고 칭하며, 러시아어의 길고 우아한 모음들을 배치해 시가 마치 노래처럼 들리게 만들었습니다. 특히 '아(a)'나 '오(o)' 같은 개방 모음을 사용하여 광활하고 낭랑한 선율을 만들어내는 데 탁월했습니다.

2. 두운(Alliteration, 頭韻)

두운은 시행이나 문장의 인접한 단어들에서 첫 자음이 반복되는 현상을 말합니다.

‣ 효과: 리듬감을 형성하고, 특정한 물리적 소리를 모사하거나 강렬한 인상을 남깁니다.

• 예시 (한국어): "가랑잎 가득 가을 길" (ㄱ 자음의 반복)

• 발몬뜨의 경우: 그는 러시아어의 거친 자음을 반복하여 '천둥'이나 '파도'의 역동적인 소리를 재현하곤 했습니다. 예를 들어 r(p) 발음을 반복하여 구르는 듯한 역동성을 주는 식입니다.

3. 발몬뜨 시에서의 결합(시각적 이해)

발몬뜨는 이 두 기법을 결합하여 '음성 상징(Sound Symbolism)'을 구현했습니다.


<기법: 대상 -> 심상(Image)>

• 두운(자음): 파도, 천둥, 바람 -> 거칠고 역동적인 움직임, 물리적인 타격감

• 모음운(모음): 안개, 달빛, 선율 -> 몽환적이고 부드러운 분위기, 감정의 잔향


발몬뜨의 시 <바람>이나 <나는 느릿느릿한…>을 원어로 읽으면, 마치 악보를 읽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이 기법들이 정교하게 배치되어 있습니다. 그는 단어의 뜻보다 그 단어가 내는 '울림(Gong)'이 독자의 영혼을 흔든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발몬뜨의 시를 감상하실 때, 번역본에서도 반복되는 음절이나 문장의 호흡(리듬)에 집중해 보시면 그가 의도했던 '세련된 음악성'을 더 깊이 느끼실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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