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장대 사령관 이덕구(李德九)

[제주4·3항쟁 연재①]

by 김양훈
[제주4·3항쟁①]
무장대 사령관 이덕구(李德九)

1948년 4월 3일 미명(未明)에 오름 정상에서 피어오른 봉화를 신호로 ‘제주4·3무장봉기’가 시작되었다. 초대 무장대 사령관이던 김달삼이 1948년 8월 21일 해주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 참가를 위해 황해도 해주로 떠나자 이덕구가 남로당 제주도위원회 군사부장을 겸해 인민유격대 사령관직을 이어받았다.

∎ 이덕구(李德九)는 조천면 신촌리에서 1920년 지방유지인 부친 이근훈과 모친 김상봉의 사이에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때 일본으로 건너가 교토의 리쓰메이칸(立命館)대학 경제학부 재학 중 1943년 관동군에 학도병으로 입대했다. 1945년 일본이 패망하자 고향 제주로 귀향한 그는 조천중학원에서 학생들에게 역사와 체육을 가르쳤다. 그는 살짝 곰보였으나 미남형이었고 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은 선생님이었다. 당시 조천중학원 학생들의 증언에 의하면 '사람이 무던히 좋았고 무슨 사상운동 하는 사람 같지는 않았다'라고 한다. 이덕구는 1949년 6월 7일 토벌대에 의해 사살됐다. 그의 가족과 친척들도 대부분 4·3 와중에 토벌대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그의 부인과 다섯 살 아들 진우, 두 살짜리 딸도 4·3 당시 죽었다. 어린 그의 아들 진우가 울며 살려달라고 하자 경찰관이 “아버지 있는 산으로 달아나라”고 해 산 쪽으로 뛰어가는 것을 뒤에서 쏘아 쓰러뜨렸다고 전해지고 있다.

1948년 10월 이후 전개된 초토화 작전으로 사실상 ‘산사람들’의 인민유격대는 거의 궤멸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1949년 6월 7일 새벽 3시, 이덕구는 비밀리에 배를 타고 제주도를 탈출하여 지리산에 들어가 빨치산 총사령관 이현상과 합류할 계획으로 하산하다가 경찰에게 포위되었다. 자수를 권하였으나 그는 경찰을 향해 총을 쏘기 시작했다. 이에 경찰의 집중사격으로 그의 몸은 벌집이 되었다. 당시 화북지서에 근무하며 이덕구 체포 작전에 참가했던 전송득 씨의 증언이 있다. ‘제주시 용강 출신 고창율 씨가 입산 활동하던 중 화북지서로 귀순하여 이덕구의 피신 장소를 알려주었다. 김영주 경사의 지휘 아래 고창율을 대동하여 순경 5명이 봉개동 절물로 토벌을 나갔다. 가시덤불을 헤치며 진격하다 태역밭에 돌로 쌓은 보초막이 있어서 집중사격을 하였다. 사격 후 가까이 가보니 이덕구가 죽어 있었다. 그는 일본군 패잔병들이 버리고 간 비행복을 입고 있었으며 숟가락 한 개를 소지하고 있었다’. 1949년 6월 7일 오후 4시였다. 토벌군의 작전지도로는 화북지구 제623고지였으며, 섬사람들이 시안모루 지경 ‘북받친밭’이라 부르는 곳이었다.

토벌대에 사살된 무장대 사령관 이덕구의 시신-제주4.3재단

∎ 1949년 6월 8일 관덕정 광장에는 십자형 틀에 묶인 이덕구의 시체가 전시되었다. 4·3무장봉기의 끝이나 마찬가지였다. 인민유격대 사령관 이덕구 시신은 때에 절은 일본군 비행복에 고무신을 신고 입가에 피를 흘린 채였다. 웃옷 주머니에는 수저를 꼽고 있었는데 그를 조롱하기 위함이 분명했다. 이후 토벌대는 경찰에 생포돼 조사받던 이덕구의 무장대 부하들을 시켜 이덕구의 효수된 머리를 경찰서 앞 관덕정 광장의 전봇대에 매달도록 명령했다. 섬사람들은 침묵으로 이 광경을 지켜볼 뿐이었다. 이덕구의 나이 29세였다.


∎ 강력한 무력을 가졌던 나폴레옹에 대항해 음모를 꾸미던 反나폴레옹 혁명가들에게 사람들은 ‘오로지 성냥개비 같은 무기로 덤비려한다’며 조롱을 했다. 그러나 그 음모의 지도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성냥개비를 가졌다면, 지렛대는 필요 없다. 세상을 뒤엎을 수 없다면, 불태워버리면 그만이다!’ 레닌도 한참 후에 이 말을 외쳤었다.

그러나 한라산의 ‘산사람’들은 그들이 그토록 미워하며 불태우고자 했던 불의한 세상은커녕 그들 스스로를 불태워야 했다. 세상을 바꿀만한 힘도 마땅한 무력수단도 없으면서 그들이 목숨을 걸고 무장봉기한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불과 22살이던 김달삼이 강력하게 주장해서 무장봉기를 결정했다는 ‘신촌회의’에서 이덕구는 과연 어떤 의견을 내놓았을까? 무모했던 고립무원의 한라산 게릴라 투쟁기간에 그는 무슨 생각으로 싸웠을까? 이덕구가 십자가 형틀에 묶여 전시되었던 관덕정 마당은 제주도에서 일어난 민중항쟁의 장두들이 효수되어 내걸리던 바로 그 자리였다. 시신은 ‘빨갱이의 말로’라며 본보기로 전시되었다. 며칠 후 그의 시신은 남수각이라는 냇가에서 화장되었다. 다음 날 큰비가 내리는 바람에 그의 유골은 빗물에 떠내려갔다고 전해졌다. ‘순교자’로 비치는 걸 두려워했을까? 그의 육필(肉筆)도 육성(肉聲)도 어느 하나 오롯이 전해진 것이 없는 걸 보면 반드시 큰비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들은 어느 흔적도 없이 서서히 잊혀가길 바랐는지 모르겠다. 섬사람들도 오랫동안 ‘이덕구’란 이름이 두려워 함부로 입 밖에 낼 수 없었다. 가위눌리게 하는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지금이라고 크게 달라지지도 않았다. 그는 오늘의 우리에게 ‘누구’일까?

이덕구 산전(山田) 참배 2017. 6. 7

[註]

신촌회의
제주4·3사건의 참극을 불러오는 무장봉기를 최종 결정한 회의를 '신촌회의'라고 부른다. 남로당 제주도당에서는 이 대책회의를 '2월회의‘라 불렀다. 무장봉기를 최종 결정한 날짜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1948년 2월 동안 구좌면과 조천면을 돌아다니며 회의를 계속했고, 최종적으로 신촌리에서 3일간 주야 격론 끝에 무장봉기가 결정되었다. 남로당 제주도당이 1948년 2월 25일, 당 조직을 전투태세로 개편하고 ’구국투쟁위원회‘가 조직된 것으로 보아 2월 20일 전후에 무장봉기가 결정되었다고 생각된다. 그 당시 회의에 참석했던 이삼룡은 ’중앙당 지령은 없었고 제주도 자체에서 결정한 것이며, 김두봉의 집이 본거지였다’고 증언했다.
제주4.3연구소에서 간행한 '이제사 말햄수다'의 증언에 의하면 “마지막 회의를 3일 동안 밤낮으로 진행했습니다. 여기서 '항쟁파'와 '항쟁반대파'로 나누어지는 데 항쟁 반대파에 섰던 사람은 조몽구, 안세훈, 김류환 등 40대 층 지도부들이었고, 김용관, 김달삼, 문도배, 송필순, 김양근 등은 항쟁파에 섰습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2012년 4월 30일자 아래 제민일보 기사 속에는 그날의 회의 모습을 증언한 사람들이 있다.
[4·3 진실찾기 그 길을 다시 밟다
<제민일보> 2012년 4월 30일
양조훈 육필기록
체험자 증언조사 활동②

“신촌회의에서 무장투쟁 결정”

김달삼이 강경투쟁 주장…12대7로 의결

무장대 출신자들 "장기전 될 줄 몰랐다“


4·3위원회 진상조사팀은 증언조사를 하면서 제주 진압작전에 참여했던 군 장교 출신자 못지않게 반대진영에 섰던 무장대 경력자 발굴에 신경을 썼다. 토벌대나 무장대의 실상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그 관련자들의 증언이 무엇보다 필요했기 때문이다.

무장대 경력자들을 국내에서 찾기는 힘들었다. 한때 '반공'을 국시로 내세울 만큼 완고한 반공체제의 정치환경에서 그들이 발붙일 곳은 없었다. 그들을 찾기 위해서는 천생 일본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진상조사팀은 일본 현지 조사 과정에서 몇몇 무장대 경력자들을 만날 수 있었다.

제민일보 취재팀이 일본에서 만났던 무장대 경력자 및 좌익 활동가-왼쪽부터 이삼룡 김시종 김민주 박갑동

그 대표적인 인물이 이삼룡(도쿄 거주)이다. 필자와 김종민 전문위원으로 구성된 일본 자료 조사팀은 2002년 7월 도쿄 한 호텔에서 일흔아홉살의 그를 만났다. 제주도청 공무원이었던 그는 4·3 발발 때에는 남로당 제주도당 정치위원의 신분으로 김달삼과 함께 대정면 신평리에 있던 도당 아지트에 있었다고 털어 놓았다.

그가 밝힌 무장봉기 결정 과정은 이렇다. 1947년 3·1 발포사건과 3·10 총파업 이후 응원경찰과 서청에 의한 탄압이 계속되자 1948년 2월말(혹은 3월초) 조천면 신촌에서 도당 책임자와 면당 책임자 등 19명이 모여 대책회의를 했다는 것이다. 이 자리에서 당시 도당 조직부장인 김달삼이 무장투쟁을 제기했다. 시기상조라는 신중파와 강행하자는 강경파 사이에 열띤 토론이 벌어졌고, 끝내 12대 7로 무장투쟁이 결정되었다는 것이다.

자신도 무장투쟁을 주장했다는 이삼룡은 "우린 당초 악질 경찰과 서청을 공격대상으로 삼았지 경비대나 미군과 맞대응할 생각이 아니었다. 그런데 우리가 공격한 후 미군이 대응할 것이라는 것을 예상하지 못했다"고 털어 놓았다. 장기전을 생각지 못했다는 그는 "우리가 정세 파악을 못하고 신중하지 못한 채 김달삼의 바람에 휩쓸린 것"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4·3 발발 당시 남로당 제주읍당 세포였다는 김시종 시인(오사카)도 이와 비슷한 증언을 했다. 그는 "'4·3'을 한 3개월 정도 봤다. 6월이면 조천까지는 해방구가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본토의 군대가 반란을 일으켜 호응해 올 것이라는 기대도 있었다. 당시 제주성내는 습격하지 않았는데, 이는 조천 등 외곽을 장악해 읍내를 고립시키면 자연스럽게 접수될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라고 증언했다. 1901년 '이재수난'을 연상시키는 회고를 한 그는 "낭만적인 생각들이었다"고 털어 놓았다.

1948년 7월 조천중학원 학생 신분으로 입산한 김민주(도쿄)는 "당시 우리끼리는 '입산은 영광'이라는 생각이 있었다"고 회고했다. 임의로 산에 오른 것이 아니라 일종의 심사를 거쳐 '등용'된 것이나 다름없게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도 "장기전을 생각 못했기에 여름옷만을 입고 그대로 산에 올라갔다"고 말했다. 그는 무장대의 규율은 매우 엄격했고, 이성문제가 발생하자 재판을 열어 집행하기도 했다고 전했다. 그는 그러나 "1949년 6월 이후 산에 남아있던 사람들은 이미 질서있는 게릴라라고 하기 어렵고, 이때는 거의 '무질서한 폭도'에 가까웠다고 본다"고 평가했다.

오현중학교를 나와 1948년 5월 입산했다는 이순식(도쿄)은 직접 유격대 활동을 한 인물이다. 그는 입산자 중 무장세력은 '유격대'로, 죽창부대는 '면당 특공대'로 불렸다면서 군경 쪽에서 발표하는 '인민해방군'이란 용어는 쓰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어떤 지역을 습격할 때에 유격대는 군과 경찰을 상대하고, 식량 약탈 등의 보급 투쟁이나 지목 살인 등은 면당 특공대의 역할로 구분했다고 설명하고, 실제 유격대의 숫자는 그리 많지 않았다고 증언했다. 유격대는 제주읍에서 서쪽으로 서귀면까지 담당하는 제1지대와 조천면에서 동쪽으로 남원면까지 담당하는 제2지대로 나누어졌고, 자신이 소속했던 제2지대도 30명을 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이런 입산자들의 증언을 듣다 보면 무장대의 핵심 인물이라 할 수 있는 김달삼과 이덕구에 대한 인물 평가도 다소 다름을 느낄 수 있었다. 김달삼은 주로 선동적이고 과격한 인물로 묘사됐다. 그에 반해 이덕구는 과묵하고 인간미가 있었다는 증언이 곳곳에서 나왔다. 김민주는 입산 5개월만인 1948년 12월 은사였던 이덕구를 산에서 만났는데, "이덕구 선생은 내게 '넌 집에서 가만히 공부하지 왜 이런 데 왔느냐'고 꾸중을 했다"고 증언했다.

한편 진상조사팀은 한때 4·3에 대한 남로당 중앙당 지령설의 근원이 되었던 박갑동(남로당 지하총책 출신)을 도쿄에서 직접 만나 "그 글은 내가 쓴 것이 아니고 신문에 연재할 때 외부(정보부)에서 다 고쳐서 그렇게 된 것"이라는 증언을 녹취했다. 그는 1973년부터 「중앙일보」에 연재된 회고록을 통해 제주4·3에 대해 "남로당 중앙의 지령이 있었다"는 글을 발표, 논란이 됐었다.


[덧] 김양훈의 한라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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