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

by 발레리 야꼬블레비치 브류소프

by 김양훈

창조

발레리 브류소프

창조되지 않은 창조물의 그림자가

꿈속에서 흔들리네,

에나멜 벽 위의

종려나무 잎사귀처럼.

보랏빛 두 손이

에나멜 벽 위에서

꿈결인 듯 소리의 윤곽을 그리네,

낭랑하게 울리는 정적 속에서.

투명한 누각이

낭랑하게 울리는 정적 속에서

부풀어 오르네, 마치

파란 월광의 반짝임처럼.

맨몸의 달이 떠오르네

파란 월광 속에……

소리들이 꿈결처럼 나부끼고

소리들이 나에게 애교 부리네.

창조된 창조물의 비밀들이

나에게 다정하게 애교 부리네.

이윽고 에나멜 벽 위에서

종려나무 그림자가 흔들리네. (1895)


이명현 엮고 옮김. 러시아 현대대표 시선

『삶은 시작도 끝도 없다』(창비세계문학)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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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독서과제 시선집 연재 (13)


난해한 말장난
보랏빛 두 손
Валерий Брюсов
러시아 상징주의의 선구자, 발레리 브류소프(Valery Bryusov)의 1895년 작 <창조>(Творчество)는 발표 당시 러시아 문단에 큰 충격과 조롱, 그리고 새로운 예술의 탄생을 동시에 알린 기념비적인 작품입니다. 이 시에 대한 배경과 비평적 해설을 정리해 드립니다.

1. 작품의 창작 배경

러시아 상징주의의 태동

1890년대 러시아 문학계는 리얼리즘의 시대가 저물고, 내면의 신비와 초월적 세계를 탐구하는 상징주의(Symbolism)가 태동하던 시기였습니다. 브류소프는 이 운동의 수장이자 '러시아의 말라르메'를 꿈꾸며 서구의 데카당스(퇴폐주의)와 상징주의를 러시아에 이식했습니다.

세기말의 '데카당스' 분위기

이 시가 수록된 시집 《러시아 상징주의자들》(1894-1895)은 당시 평단으로부터 "정신 나간 소리", "난해한 말장난"이라는 혹평을 받았습니다. 특히 이 시에 등장하는 "보랏빛 두 손"이라는 표현은 당시 보수적인 비평가들에게 조롱의 대상이 되었으나, 결과적으로는 기존의 관습을 깨부수는 혁신적인 이미지가 되었습니다.


2. 시평 (Artistic Analysis)

① 감각의 전이: 공감각(Synesthesia)

이 시의 가장 큰 특징은 소리를 시각화하고, 시각을 촉각화하는 공감각적 표현입니다.

‣ "소리의 윤곽을 그리네": 청각적인 '소리'가 시각적인 '윤곽'으로 변모합니다.

‣ "낭랑하게 울리는 정적": 소리가 없는 정적이 오히려 울림으로 다가오는 역설을 보여줍니다.

이는 예술가가 영감을 얻는 순간, 모든 감각이 하나로 뒤섞이며 일상적인 논리가 파괴되는 과정을 형상화한 것입니다.

② '창조'의 역설: 미완의 미학

시의 도입부에서 언급되는 "창조되지 않은 창조물(тени несозданных созданий)"은 이 작품의 핵심 키워드입니다.

예술가의 머릿속에만 존재하는 아직 형상화되지 않은 이데아(Idea)를 의미합니다.

완성된 결과물보다 '창조되어 가는 찰나의 과정' 그 자체에 주목합니다. 꿈과 현실, 존재와 비존재 사이의 경계에서 흔들리는 그림자는 예술적 영감의 본질을 꿰뚫고 있습니다.

③ 폐쇄된 공간과 내면의 확장

시는 '에나멜 벽'으로 둘러싸인 밀폐된 방 안에서 전개됩니다. 하지만 시인의 상상력은 이 좁은 방 안에서 '누각'을 세우고 '달'을 띄우며 우주적인 규모로 확장됩니다.

‣ 에나멜 벽 위의 종려나무 잎사귀: 이는 실제 나무가 아니라 벽지에 그려진 무늬이거나 그림자일 뿐입니다.

하지만 시인은 이를 통해 초월적 세계를 봅니다. 외부 세계와의 단절이 오히려 내면의 창조적 에너지를 폭발시키는 계기가 되는 것입니다.

④ 보랏빛 두 손의 상징성

많은 논란을 낳았던 "보랏빛 두 손"은 창작에 몰입한 시인의 상태를 상징합니다.

보라색은 전통적으로 신비주의, 고귀함, 혹은 죽음과 퇴폐를 상징합니다.

정적 속에서 소리의 윤곽을 그리는 이 보랏빛 손은 현실의 물리적인 손이 아니라, 영적인 창조의 주체로서의 손을 의미합니다.

3. 종합 평가

브류소프의 <창조>는 단순히 아름다운 풍경을 노래한 시가 아닙니다. 이 시는 '예술가가 어떻게 무(無)에서 유(有)를 만들어내는가'에 대한 심리적 보고서이자 시각적 유희입니다.

그는 논리적인 문법을 해체하고 이미지의 파편들을 병치함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시인의 황홀경(Ecstasy)에 동참하게 만듭니다. 1895년이라는 발표 시기를 고려할 때, 이 시는 러시아 문학이 리얼리즘의 객관성에서 벗어나 주관적인 내면의 세계와 현대성(Modernism)으로 진입했음을 선언한 선구적인 텍스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창조된 창조물의 비밀들이 나에게 다정하게 애교 부리네."

이처럼 시인은 고통스러운 산고 끝에 얻어낸 창조물과 화해하며, 다시 에나멜 벽 위의 그림자로 돌아옵니다. 이는 예술적 환상이 끝난 뒤에도 그 비밀스러운 감각만은 시인의 영혼에 남겨져 있음을 암시하며 여운을 남깁니다.


발레리 브류소프의 시
(Valery Bryusov Poems)

부유한 상인 가문에서 태어난 브류소프(1873-1924)는 1892년부터 1899년까지 모스크바 대학교에서 역사학을 공부했습니다. 콘스탄틴 발몬트와 마찬가지로 브류소프는 당대 가장 찬사 받는 시인 중 한 명이었습니다. 해박한 지식으로 유명했던 그는 '문학적 유행의 입법자'이자 상징주의 학파의 수장으로 간주되었습니다. 그는 1904년부터 1909년까지 러시아 상징주의의 구심점 역할을 했던 당대 가장 중요한 문학잡지인 <베시(Vesy, 천칭)>를 창간했습니다.

러시아 혁명 이후, 브류소프는 공산당에 입당하여 교육인민위원회(Narkompros) 문학부 부장이 되었습니다. 시 <독설(Invective)>에서 그는 옛 상징주의 동료들이 혁명을 인정하지 않고 오직 피와 파괴로만 바라보는 것에 대해 훈계하기도 했습니다. 마리나 츠베타예바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그를 가리켜 '시가 감정에 기반하지 않고 인위적으로 구축된, 자기중심적인 시인'이라며 비판했습니다.

실제로 브류소프의 시는 지나친 박식함(bookishness)과 순수한 음악성에 과도하게 의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에로틱하거나 심지어는 변태적인 사랑이 그가 즐겨 다루는 주제였으며, 여기에 포함된 그의 '한 줄짜리 시'는 도발적인 농담으로 유명했습니다. 보리스 파스테르나크는 그를 질책하면서도 동시에 가치 있게 여겼습니다. 파스테르나크는 감사의 마음을 담아 언젠가 그에게 이렇게 묻기도 했습니다.


"당신 자신이 이제는 그 무의미함에 죽을 만큼 지쳐버렸을지라도, 한때 아침에 우리에게 죽지 않는 법을 가르쳐주셨기에 저 또한 어쩌면 죽지 않을 것입니다. 맞습니까?"


브류소프는 시인으로서 뿐만 아니라 비평가, 역사학자, 극작가로서도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그는 자신의 작품을 주로 수록한 3권 분량의 선집 <러시아 상징주의자들>을 엮어 출판했으며, 푸시킨 연구서와 시 비평 및 이론에 관한 에세이들을 집필했습니다. 진정한 학술적 가치를 지닌 학자이기도 했던 그는 프랑스 상징주의자들, 아르메니아 시인들, 그리고 에드거 앨런 포의 작품들을 광범위하게 번역했습니다.

<남십자성 공화국>(1905)

그의 경고성 단편인 <남십자성 공화국>(1905)은 내재된 모순이라는 신비로운 전염병에 의해 파괴되는 전체주의 유토피아를 다룬 환상 소설입니다. 이 작품은 20세기 디스토피아(dystopia) 개념을 처음으로 도입했으며, 결과적으로는 그의 정치적 성향과 상반되는 통찰을 보여주었습니다. <Valery Bryusov Poem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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