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지의 여인

by 알렉산드로 알렉산드로비치 블로끄

by 김양훈

미지의 여인

알렉산드로 블로끄


저녁마다 레스또랑 위에 감도는

무더운 공기는 거칠고 탁하다.

술에 취한 고함소리들

봄날의 썩은 악취가 제압한다.


저 멀리 골목길 먼지 위에

교외 별장들의 권태 위에

빵집 간판이 살짝 금빛을 띠고

어린애 울음소리 울려 퍼진다.

매일 저녁 철로 건널목 너머

노련한 재담가들 중절모 꺾으며

도랑 사이로 부인네들과

산책을 한다.

호수에는 노 젓는 소리 삐걱대고

여인네 음성 째질 듯 울린다.

하늘에는 모든 것에 익숙해진

원반이 무의미하게 일그러져 있다.

매일 저녁 유일한 벗이

내 술잔에 비친다.

떫고 신비한 액체에 취해


나처럼 순하고 멍하다.

옆 테이블들 사이로

졸린 종업원들 얼굴 내밀고

토끼 눈을 한 술꾼들이

“술 속에 진리가 있다!”¹라고 외친다.

매일 저녁, 정해진 시간에

(혹은 그저 내가 꿈에서 본 걸까?)

비단을 휘감은 처녀의 몸이

희뿌연 유리창에 아른거린다.


그리고 천천히, 취객들 사이를 지나

언제나 일행 없이, 혼자서

향내와 안개를 풍기면서

그녀는 창가에 앉는다.

고대의 미신이 감도는

그녀의 탄력 있는 비단 옷자락,

장례용 깃털 달린 모자와

반지 낀 가녀린 손.


기묘한 친근감에 사로잡힌 내가

검은 베일 속을 바라보니,

이윽고 눈앞에 보이는 매혹의 기슭,

매혹의 먼 곳.


숨겨진 비밀들이 나에게 주어졌고,

누군가의 태양이 나에게 맡겨졌으며,

내 영혼의 굽이마다

떫은 포도주가 스며들었다.

비뚜름한 타조 깃털이

나의 뇌수 속에서 흔들리고

바닥 모를 푸른 눈동자가

머나먼 기슭에서 꽃핀다.

내 영혼 속에 보물이 놓여 있으니,

열쇠는 오직 나에게만 주어졌다!

네가 옳다, 술 취한 괴물아!

나는 안다, 술 속에서 진리가 있음을. (1906)


이명현 엮고 옮김. 러시아 현대대표 시선

『삶은 시작도 끝도 없다』(창비세계문학)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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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독서과제 시선집 연재(22)

[註]
1) “In vino veritas”(술 속에 진리가 있다)
‣유래: 라틴어 격언으로, 고대 로마의 학자 플리니우스가 사용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본래 "술을 마시면 사람이 솔직해져서 숨기고 있던 진실을 말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 시에서의 의미: 블로끄는 이 세속적인 격언에 이중적 의미를 부여합니다.
‣비속한 현실: 레스토랑에서 취객들이 내뱉는 무의미하고 상스러운 외침입니다.
‣영적인 도취: 시인에게 술은 일상의 권태를 뚫고 '미지의 여인'이라는 이상적 세계를 만날 수 있게 해주는 매개체(황홀경)입니다.
이처럼 화자는 술에 취한 취기(醉氣)를 통해 현실의 논리로는 도저히 닿을 수 없는 '신비한 진리'와 '미적인 구원'에 도달했음을 이 구절을 통해 역설적으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블로끄의 뮤즈, 류보프 드미트리예브나 멘델레예바
작품의 배경과 시평

알렉산드로 블로끄의 「미지의 여인」(Незнакомка, 1906)은 러시아 상징주의 문학의 정점으로 꼽는 작품 가운데 하나입니다. 1905년 러시아 제1차 혁명이 실패로 돌아간 뒤, 지식인들 사이에 퍼진 절망감과 속물적인 일상, 그리고 그 속에서도 포기할 수 없는 고귀한 이상을 극적으로 대비시킨 시입니다. 작품의 배경과 시평을 정리해 드립니다.

1. 작품의 시대적·문학적 배경

∎ 혁명 이후의 환멸: 1905년 혁명의 불길이 꺼진 후, 러시아 사회는 극심한 정체기와 권태에 빠졌습니다. 블로끄는 초기 시에서 예찬했던 '아름다운 여인(성스러운 영원한 여성성)'이 더 이상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고통스러워했습니다.

∎ 상징주의의 변모: 이 시는 블로끄의 창작 시기 중 제2기(1904~1908)를 대표합니다. 초기 상징주의의 신비주의가 세속적인 현실(레스토랑, 술꾼, 먼지 등)과 충돌하며 발생하는 '아이러니'가 이 작품의 핵심 동력입니다.

∎ 공간적 배경: 빼떼르부르크 교외의 오저르끼(Ozerki)라는 실존하는 장소를 배경으로 합니다. 이곳은 당시 지저분한 레스토랑과 유흥가가 밀집했던 곳으로, 시 속의 타락한 현실을 구체화합니다.


A Woma wearing a red hat

2. 시평: 진흙탕 속에서 피어난 환영의 미학

전반부: 추악하고 권태로운 현실 (1~6연)

시는 매우 불쾌하고 감각적인 묘사로 시작됩니다. '무더운 공기', '썩은 악취', '어린애 울음소리'는 독자를 질식할 것 같은 현실로 밀어 넣습니다. 여기서 사람들은 '중절모를 꺾으며' 부인들과 산책을 하고, 술꾼들은 토끼 눈을 한 채 소리를 지릅니다. 이는 블로끄가 혐오했던 속물성(poshlost)의 전형입니다.

후반부: 환상과 실재의 교차 (7~13연)

술에 취한 화자의 눈앞에 갑자기 '미지의 여인'이 나타납니다. 그녀는 비단옷을 입고 검은 베일을 쓴 채, 향내와 안개를 풍기며 등장합니다.

∎ 대비: 주변의 술꾼들과 대조되는 그녀의 우아함은 현실의 것이라기보다 화자의 '예술적 환상' 혹은 '내면의 보물'에 가깝습니다.

∎ 변모: 화자는 그녀를 통해 '매혹의 기슭'을 보고 '숨겨진 비밀'을 부여받습니다. 현실은 여전히 비참하지만, 화자는 술(혹은 예술적 황홀경)을 통해 자기만의 영혼의 보물을 발견하게 됩니다.

결론: 아이러니한 구원

마지막 연에서 화자는 "네가 옳다, 술 취한 괴물아!"라고 외칩니다. 이는 술꾼의 비속한 외침을 예술적 진리로 승화시킨 것입니다. 현실의 추함을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그 추함 속에서 오직 자신만이 열쇠를 가진 '내면의 진리'를 찾아냈다는 선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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