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알렉산드르 알렉산드로비치 블로끄
축축한 적갈색 이파리에
알렉산드르 블로끄
축축한 적갈색 이파리에
마가목 열매가 붉어가고,
형리가 앙상한 손으로
마지막 못을 손바닥에 박을 때,
납빛 강물의 잔물결 위,
축축한 잿빛 언덕 위에서
준엄한 고향의 얼굴 마주하며
나 십자가에 매달려 흔들릴 때,
그때, 광활한 저 멀리
임종의 피눈물 너머 보이나니,
넓은 강물을 따라
통나무배 타고 나에게 오시는 그리스도.
두 눈에는 한결같은 소망을 담고
여전히 누더기 걸친 채.
옷자락 사이로 드러난
못 박힌 손바닥 가엾게 바라보며.
그리스도여! 고향의 광야는 애처롭습니다!
나는 십자가에 매달려 지쳐갑니다.
당신의 통나무배는 정말이지
내 십자가 언덕에 닿을까요?
이명현 엮고 옮김. 러시아 현대대표 시선
『삶은 시작도 끝도 없다』(창비세계문학)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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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독서과제 시선집 연재(23)
알렉산드로 블로끄(Aleksandr Blok)의 「축축한 적갈색 이파리에」(1907)는 그의 창작 이력에서 매우 중요한 전환점을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초기 시의 신비로운 '아름다운 여인'에 대한 갈망이 사라진 자리에, 고통받는 조국 러시아와 수난당하는 인간의 모습이 들어선 시기입니다. 이 시를 깊이 있게 이해하기 위한 배경과 시평을 정리해 드립니다.
1. 작품의 시대적·문학적 배경
1905년 혁명의 실패와 환멸
1905년 제1차 러시아 혁명이 피로 얼룩진 채 실패로 끝나자, 블로끄를 비롯한 당시 지식인들은 깊은 절망에 빠졌습니다. 초기 상징주의의 추상적인 이상향은 무너졌고, 시인은 '지저분하고 잔인한 현실의 러시아'를 직시하게 됩니다.
'러시아적 그리스도'의 형상
이 시에는 도스토옙스키나 튜체프의 문학에서 자주 등장하는 '비천한 모습으로 고난 받는 그리스도(Kenosis)'의 이미지가 강하게 투영되어 있습니다. 화려한 금빛 성상이 아니라, 누더기를 걸치고 민중과 함께 고통받는 그리스도는 러시아 정교회의 독특한 영성을 반영합니다.
자연과 수난의 결합
러시아 가을의 상징인 '마가목 열매(рябина)'는 그 붉은 빛깔 때문에 흔히 '피'나 '수난'을 상징합니다. 블로끄는 러시아의 황량한 자연 풍경을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화자가 겪는 십자가의 고통과 일체화시킵니다.
2. 시평:
십자가에 못 박힌 시인과 강물을 거슬러 오는 구원
제1~2연: 수난의 현장과 일체화된 고향
시작부터 강렬한 시각적 대비가 나타납니다. 적갈색 이파리와 붉은 마가목 열매는 화자의 손바닥에 박히는 못과 그로 인한 피를 연상시킵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화자가 십자가에 매달려 마주하는 것이 하늘이 아니라 '준엄한 고향의 얼굴'이라는 사실입니다. 화자의 개인적 고통은 곧 러시아라는 국가가 겪는 시대적 고통과 동일시됩니다.
제3~4연: 누더기를 걸친 구원자
고통의 극치에서 화자가 보는 환상은 화려한 천국이 아닙니다. 잿빛 언덕과 납빛 강물을 따라 통나무배를 타고 오는 그리스도입니다.
•누더기를 걸친 그리스도: 이는 구원이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비참한 현실 한복판에 우리와 똑같은 모습으로 존재함을 의미합니다.
•공감의 시선: 그리스도는 화자의 '못 박힌 손바닥'을 가엾게 바라봅니다. 이는 정복자로서의 신이 아니라, 함께 아파하는 동반자로서의 신을 보여줍니다.
제5연: 닿을 수 없는 구원에 대한 갈망
마지막 연은 구원의 확신이 아닌 애처로운 질문으로 끝을 맺습니다. "고향의 광야는 애처롭습니다!"라는 절규는 당시 러시아가 처한 답답한 현실을 대변합니다. 과연 이 초라한 구원의 배가 내가 매달린 절망의 언덕에 닿을 수 있을지에 대한 회의와 간절함이 교차하며 깊은 여운을 남깁니다.
3. 핵심 상징과 예술적 성취
<상징물: 의미>
‣마가목: 열매러시아의 가을, 순교자의 피, 생명력과 수난의 중의적 표현
‣십자가: 시인(지식인)이 짊어진 시대적 부채감과 고통
‣통나무배: 소박하고 민중적인 구원의 매개체
‣납빛 강물: 정체되고 암울한 러시아의 현실
"나는 십자가에 매달려 지쳐갑니다. “
이 구절은 단순한 종교적 고백이 아닙니다. 혼란스러운 시대를 살아가는 예술가가 느끼는 실존적 피로감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국 러시아의 대지 위에서 구원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 숙명론적 사랑을 동시에 담고 있습니다.
블로끄는 이 시를 통해 개인의 비극을 민족의 비극으로 확장시켰으며, 가장 비참한 순간에 가장 낮은 곳에서 오는 신성을 포착해 냈습니다.
5월의 독서과제 중 하나인 이 시를 읽으며 차가운 강물 위를 소리 없이 거슬러 오는 그 초라한 배의 의미를 한 번쯤 곱씹어 보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