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의 수난사를 온몸으로 겪어내고 예술로 승화시키다
옮긴이의 소개글
러시아 현대대표 시선
『삶은 시작도 끝도 없다』
옮긴 이 이명현 교수
안나 안드레예브나 아흐마또바
(Anna Andreevna Akhmatova)
1889-1966
러시아 시(詩)의 혼(魂)
안나 안드레예브나 아흐마또바는 1889년 6월 11일에 오데사 근방에서 태어났다. 본래 그녀의 성은 고렌꼬(Gorenko)이다. 필명인 아흐마또바는 외가 쪽 조상인 킵자크 한국¹⁾의 칸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그녀는 1905년까지 뻬쩨르부르그 근교에 있는 도시 짜르스꼬예 쎌로에서 성장하였다. 뿌시낀이 소년 시절을 보내기도 했던 아름다운 이 도시에서의 추억은 아흐마또바의 시심의 원천이 되었다.
1903년에 아흐마또바는 훗날 아끄메이즘(akmeizm)²⁾의 창시자가 될 니꼴라이 구밀료프(Nikolai Gumilyov)와 첫 대면을 하게 된다. 구밀료프의 끈질긴 구혼에 그녀는 1910년에 결혼을 승낙한다. 결혼한 지 2년 만에 아들 레프(Lev)가 태어나는데, 훗날 스딸린 치하에서 그가 겪게 되는 수난은 아흐마또바의 생애와 창작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1911년에 잡지 『아폴론』(Apollon)에 시를 발표하면서 그녀는 본격적으로 문단 활동에 뛰어든다. 그해 구밀료프와 고로제쯔끼(S. Gorodetskii)가 결성한 ‘시인조합’의 간사로 일하면서 당시 새롭게 출현한 아끄메이스뜨 시인들과 교분을 맺는다. 특히 시인 오시쁘 만젤시땀(Osip Mandel’shtam)과의 우정은 매우 각별했다.
1912년 첫 시집 『저녁』(Vecher)을 상재한 아흐마또바는 구체적이고 명료한 시어를 구사하여 상징주의의 모호하고 추상적인 문체에 지쳐 있던 독자들에게 대단히 신선한 자극을 주었다. 당시 뻬쩨르부르그의 문학 카페와 각종 문학협회에서 자주 자작시를 낭송하던 그녀는 독특한 자태와 매너로써 젊은이들을 열광시켰다. 우수에 젖은 표정이 트레이드 마크였던 그녀는 당대 화가들이 즐겨 그린 모델이기도 했다.
1914년에 아흐마또바는 종교적인 모티프들이 주를 이루는 시집 『묵주』(Chetki)를 발간한다. 곧이어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남편 구밀료프는 자원하여 참전하고 이를 기점으로 사실상 두 사람의 결혼 생활은 종지부를 찍게 된다. 그녀는 1917년 혁명이 일어나기 직전에 세 번째 시집 『하얀 무리』(Belaya Staya)를 발표하여 러시아 서정시의 고전적 전통에 대한 지향을 뚜렷하게 드러낸다. 혁명 이후 그녀는 볼셰비즘에 동조하지는 않았지만, 조국에 남는다.
1918년 구밀료프와 이혼한 이후 두 차례 더 결혼하지만, 그녀의 개인적 삶은 끝내 불행을 면치 못한다. 1921년 전 남편 구밀료프가 백색 테러의 누명을 쓰고 총살된 후로 당국의 감시 대상이 된 그녀는 당시 가까스로 도서관 사서직을 얻어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1921년 시집 『질경이』(Podorozhnik)와 『서기 1921년』(Anno Domini MCMXXI)의 출간을 끝으로 1940년대 초까지 아흐마또바의 시는 활자화되지 못한다. 시집이 판매금지 조치를 당하자 살길은 번역밖에 없었다. 그 후로 그녀는 수많은 외국 시들을 번역했는데 그중에는 한국의 시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다.³⁾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당국은 국민들의 애국심을 고취하기 위해 아흐마또바에게 시 창작을 임시로 허락한다. 전시에 그녀는 따시껜뜨로 후송되어 전쟁시를 쓰고 부상자들을 위문한다. 1944년 러시아로 복귀한 그녀는 2년 후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의 지령에 따라 작가 미하일 조셴꼬(Mikhail Zoshchenko)와 함께 “사상 없는 반동의 대표자”로 낙인찍혀 다시 작가동맹에서 제명된다. 1950년대 후반에 비로소 복권된 그녀는 젊은 시인들로부터 문단의 살아 있는 전설로 추앙받는다. 1960년대에는 이탈리아와 영국을 방문하여 문학상과 명예박사 학위를 받는다. 1965년 아흐마또바의 마지막 시집 『시간의 질주』(Beg vremeni)가 발간된다. 이듬해 5월 5일에 시인은 모스끄바 근교의 요양원에서 노환으로 사망한다.
쏘비에뜨 시절에 쓰인 아흐마또바의 작품들 가운데 기억해야 할 것은 서사시 「진혼곡」(Rekviem)과 「주인공 없는 서사시」(Poema bez geroya)이다. 두 작품 모두 스딸린 시대를 거치면서 1960년대까지 20년이 넘도록 고쳐 쓴 역작이다. 전자는 스딸린 테러로 희생당한 쏘비에뜨인들의 영혼을 기리고 위무하는 장시이며, 후자는 비극적이면서도 현란했던 1910년대 뻬쩨르부르그 예술인들의 삶을 회고하며 예술의 불멸을 노래한 작품이다. 이 두 편의 기념비적 서사시를 통해서 아흐마또바는 민족의 수난사를 온몸으로 겪어내고 예술로 승화시킨 위대한 시인이자 역사의 증인이 되었다.
[註1] 킵차크 칸국 또는 킵자크 한국:
킵차크 칸국(Kipchak Khanate)은 1259년 몽골 제국의 분열 이후 탄생한 서방의 4대 칸국 가운데 하나로, 칭기즈 칸의 장남 주치의 후손들이 지배했기에 당대 몽골인들에게는 주치 울루스(Ūlūs-i Jūchī)로 통칭되었다. 한자로는 금장한국(金帳汗國)으로 기록되었으며, 피지배층이었던 튀르크인들에게는 '위대한 나라'라는 뜻의 울루그 울루스(Ūlug Ūlūs)라고 불렸다.
제베와 수부타이의 서부 원정, 1236년 시작된 바투 칸의 서방 원정으로 칸국의 기초가 닦여졌으며, 바투 칸이 1255년에 사망한 이후에는 몽골 제국의 광활한 영토 중 북서부의 카자흐 대초원과 러시아 남부 평원지대를 물려받아 루스계 공국들을 속령으로 지배하면서 동유럽, 특히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였고(몽골-타타르의 멍에), 또한 발칸 반도에서는 불가리아 제2제국과 몰다비아 공국 등을 속국으로 두고 동로마 제국과 협력 및 반목을 계속하였으며 폴란드~헝가리 방면으로 팽창을 시도하였다.
비록 1290년대 후반에 노가이 칸의 야심으로 인해 부분적인 내전이 일어나기는 하였으나 이를 제외한다면 1359년까지의 약 1세기 동안 번영을 누렸다. 이 시기 킵차크 칸국은 시베리아 서부와 중앙아시아 일부를 포함하고, 동서로는 알타이 산지에서부터 다뉴브강 연안까지, 남북으로는 우랄산맥에서부터 흑해와 카스피해까지 이르는 광범위한 지역을 지배했으며 캅카스산맥을 경계로 페르시아의 일 칸국과, 트란스옥시아나를 경계로 중앙아시아의 차가타이 칸국과 접경했다.
그러나 1357년 자니베크 칸의 사후 일어난, 이른바 '대혼란(Great Troubles)'의 시대가 1381년까지 이어지며 칸국은 쇠퇴기에 접어들었다. 토크타미쉬 칸(1381~1395) 치하에서 잠시 재통합되었으나, 희대의 정복자 티무르가 쳐들어와 주요 도시들을 파괴하면서 킵차크 칸국의 운명은 확실하게 끝이 났다. 그 이후로 칸국의 국력과 영향력은 확연하게, 그렇지만 점진적으로 줄어들었으며 휘하의 루스 공국들과 부족들은 각각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지배 아래에 들어가거나 독립을 선언했다. 결국 15세기 초에 킵차크 칸국은 크림 칸국, 아스트라한 칸국, 카잔 칸국, 시비르 칸국, 노가이 칸국, 우즈베크 칸국 등으로 나뉘어졌으며 킵차크 칸국은 흑해 서부와 캅카스 북부의 조그만한 초원 지대만을 영위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시대의 킵차크 칸국은 단순히 이흐 칸국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이흐 칸국은 1502년 크림 칸국에 의해 수도 사라이가 함락당하며 멸망하였다.
다만 킵차크 칸국의 분열 이후 멸망 시점에 대해서는 연구자들마다 의견이 다른데, 1502년에 멸망한, 사라이 일대를 지배하던 이흐 칸국은 크림 칸국 등과 마찬가지로 대등한 여러 계승국 중 하나에 불과했다고 보기도 한다. 즉 로마 제국이 서로마 제국과 동로마 제국으로 분열되었지만 둘 다 로마 제국 그 자체인 것처럼, 킵차크 칸국의 경우도 주치 울루스의 적통을 굳이 따진다면 위에서 말한 여러 분열국들 대부분이 동일한 위치에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본다면 분열한 것이지 특정 시점에 멸망했다고 볼 수 없고 그 일부분인 크림 칸국을 통해 18세기 중반까지 존속했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한편 킵차크 칸국의 쇠퇴를 틈타 러시아 북부에서 모스크바 대공국이 세력을 확장하였다. 1480년, 당시 모스크바 대공이었던 이반 3세(1462~1505)는 몽골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하고, 그해 말에 킵차크 군대를 우그라 강에서 패퇴시키면서 몽골-타타르의 멍에를 벗어던졌다. 이후 모스크바 대공국은 러시아 차르국으로,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러시아 제국으로 변모하여 킵차크 칸국의 멸망 이후 등장한 몽골-타타르계 후계국들을 차례차례 정복해나가기 시작했다. 마침내 크림 칸국과 카자흐 칸국이 각각 1783년과 1847년에 팽창하는 러시아 국가에게 멸망하면서 칸국의 마지막 잔재가 사라졌다. <위키백과 발췌>
[註2] 아크메이즘:
상징주의에 이어서 출현한 모더니즘 문학사조. 가시적이고 경험적인 지상세계를 존중하였으며, 명료하고 구체적인 표현을 지향하였다.
[註3] 아흐마토바의 한국 시 번역:
안나 아흐마토바가 한국의 시를 번역했다는 사실은 한국 독자들에게 매우 흥미롭고 뜻깊은 지점입니다. 그녀가 한국 시 번역에 참여하게 된 것은 1950년대 초반, 소련 정부의 강요와 생계유지라는 비극적인 상황 속에서 이루어진 일이었지만, 결과적으로 러시아 문학계에 한국 문학을 알리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아흐마토바가 번역한 한국 시들의 주요 내용과 특징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주요 번역 작품: 『조선 시선』 (1956)
아흐마토바는 1956년 모스크바에서 발간된 『조선 시선(Korejskaja Literatura)』에 수록된 시들 중 상당수를 번역했습니다. 그녀는 한국어를 직접 알지 못했기 때문에, 전문가들이 산문 형태로 직역해 놓은 '축자역(逐字譯)' 원고를 바탕으로 러시아어의 운율과 서정성을 입혀 재구성하는 방식으로 작업했습니다.
번역에 참여한 주요 시인 및 작품
그녀는 주로 고전 시조와 근대 시인들의 작품을 다루었습니다.
•고전 시조: 정철, 황진이, 길재 등의 시조가 포함되었습니다. 특히 황진이의 시조처럼 섬세한 감정이 담긴 작품들이 아흐마토바의 서정적 문체와 잘 어우러졌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근대 및 현대 시인:
‣조기천: '백두산'으로 유명한 조기천의 시들이 포함되었습니다.
‣이용악: 북방의 정서와 유랑의 슬픔을 노래한 이용악의 시도 그녀의 손을 거쳤습니다.
‣박팔양, 민병균 등: 당시 북한에서 활동했거나 월북했던 시인들의 작품이 주로 번역 대상이 되었습니다.
2. 번역의 배경과 의미
비극적 상황 속의 산물
아흐마토바에게 이 시기는 아들 레프 구밀료프가 수용소에 갇혀 있고, 본인은 '부르주아 퇴폐 시인'으로 낙인찍혀 창작의 자유를 박탈당한 때였습니다. 소련 당국은 그녀에게 '사회주의 형제국'인 북한의 시를 번역하게 함으로써 사상적 전향을 압박하거나 생계를 연명하게 했습니다.
아흐마토바의 태도
흥미로운 점은 아흐마토바가 이 작업을 단순한 '돈벌이'로만 여기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녀는 한국 시 특유의 절제된 슬픔과 자연에 대한 경외심에서 자신의 시적 세계와 맞닿은 지점을 발견했습니다. 그녀는 지인들에게 한국 시의 아름다움에 대해 감탄 섞인 말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3. 한국 시가 그녀에게 끼친 영향
그녀의 후기 걸작으로 꼽히는 「함께하지 못한 연가(Cinque)」나 「스물네 번째 시」 등에서 동양적인 정적이나 여백의 미가 느껴지는 이유 중 하나로, 이 시기의 방대한 동양 시(한국, 중국 등) 번역 경험을 꼽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참고] 아흐마토바가 번역한 한국 시들은 현재 러시아어로 출판된 여러 한국 문학 선집에서 확인하실 수 있으며, 국내에서도 아흐마토바와 한국 문학의 교류를 연구한 논문들을 통해 구체적인 번역 목록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그 무엇도 잃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