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잔으로 우리 마시지 않으리

by 안나 안드레예브나 아흐마또바

by 김양훈

같은 잔으로 우리 마시지 않으리

안나 아흐마또바

같은 잔으로 우리 마시지 않으리

물도, 달콤한 포도주도.

이른 아침에 입 맞추지 않고,

저녁 무렵 창밖을 바라보지도 않으리.

그대는 해를 들이쉬고, 나는 달을 들이쉬고,

그러나 우리 같은 사랑으로 살아 있지.


내 곁에는 언제나 나의 신실하고 다정한 벗,

그대 곁에는 그대의 쾌활한 여자친구.

잿빛 눈동자의 놀란 기색을 나는 이해하네,

내 병은 그대 탓이니.

짧은 만남일지언정 우리는 자제하네.

우리는 그렇게 우리의 평안을 지킬 운명.

다만 그대의 음성 내 시 속에서 노래하고,

그대의 시 속에는 내 숨결이 떠돌 뿐.

오, 모닥불 하나 있으니, 망각도 두려움도

그것을 감히 건드리지 못하리.

그대가 알면 좋으련만, 그대의 건조한 분홍 입술

지금 얼마나 내 맘에 드는지! (1913)


이명현 엮고 옮김. 러시아 현대대표 시선

『삶은 시작도 끝도 없다』(창비세계문학) 中

----

5월 독서과제 시선집 연재(28)


Photo by Kristina Tarasenko
안나 아흐마또바(Anna Akhmatova)의 시 <같은 잔으로 우리 마시지 않으리>는 러시아 문학의 '은세기'를 대표하는 서정시 중 하나입니다. 1913년에 쓰인 이 시는 아흐마또바 초기 시의 특징인 '절제된 비극성'과 '심리적 세밀함'이 정점에 달한 작품으로 평가받습니다. 이 시의 창작 배경과 작품 평을 정리해 드립니다.

1. 창작 배경:

사랑과 예술 사이의 '자발적 거리두기'

이 시가 쓰인 1913년은 아흐마또바의 첫 시집 『저녁』(1912)이 성공을 거둔 직후이자, 남편 니꼴라이 구밀료프와의 관계가 소원해지면서도 서로 예술적 동지로서의 긴장을 유지하던 시기입니다.

•아끄메이즘(Acmeism)의 정수: 당시 아흐마또바는 모호한 상징주의에 반대하고 명료한 사물성과 절제된 감정을 강조하는 '아끄메이즘' 운동의 핵심이었습니다. 이 시 역시 구체적인 사물(잔, 포도주, 창문)을 통해 추상적인 이별의 고통을 형상화합니다.

•실제 대상에 대한 추측: 많은 연구가는 이 시의 수신인을 그녀의 남편 구밀료프, 혹은 당시 그녀와 깊은 교감을 나누었던 시인이나 예술가로 추정합니다. 하지만 특정 인물에 국한되기보다는, '서로를 깊이 사랑하지만 결코 일상을 공유할 수 없는 운명적 관계'에 대한 보편적인 고백으로 읽힙니다.

•시대적 공기: 제1차 세계대전 직전, 러시아 지식인 사회에 감돌던 불안한 공기와 개인적인 연애의 비극성이 결합하여, '평안을 지키기 위해 만남을 자제해야 하는' 비장미가 형성되었습니다.

Anna Akhmatova and Nikolaï Goumilev by the unknown

2. 작품 평:

결핍을 통해 완성되는 영원한 사랑

① 거부(Renunciation)의 미학

이 시는 첫 구절부터 "마시지 않으리", "입 맞추지 않고", "바라보지도 않으리"라며 일상적인 친밀함을 단호하게 거부합니다. 그러나 이 '부정(Not)'은 사랑이 없어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 사랑이 너무나 치명적이기 때문에 선택한 방어 기제입니다. 세속적인 결합(같은 잔으로 마시는 것)을 포기함으로써 역설적으로 그들의 사랑을 훼손되지 않는 순수한 상태로 박제합니다.

② '해'와 '달'의 이원론적 공존

"그대는 해를 들이쉬고, 나는 달을 들이쉬고, / 그러나 우리 같은 사랑으로 살아 있지."

두 사람은 각각 낮과 밤이라는 서로 다른 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이는 결코 합쳐질 수 없는 두 평행선을 의미하지만, 동시에 우주를 구성하는 두 축으로서 서로의 존재를 전제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물리적 거리는 떨어져 있으나 영혼의 궤도는 공유하고 있다는 아끄메이즘적 선언입니다.

③ 예술적 승화: 시(詩) 속에서의 재회

3연에서 시인은 현실에서의 불가능한 사랑을 '예술적 합일'로 치유합니다. 육체는 각자의 파트너인 ‘다정한 벗’과 ‘쾌활한 여자친구’ 곁에 머물며 사회적 평안을 유지하지만, 영혼은 서로의 시 속에서 노래하고 숨 쉽니다. 현실의 '결핍'이 예술의 '풍요'로 전이되는 과정입니다.

④ 마지막 구절의 도발적 진실

마지막에 언급된 "건조한 분홍 입술"에 대한 고백은 이 시가 단순한 관념 시가 아님을 증명합니다. 차갑게 절제하던 시인은 결국 마지막 순간에 숨겨둔 욕망을 살짝 드러내며 시적 긴장감을 터트립니다. "망각도 두려움도 건드리지 못할 모닥불"은 결국 두 사람의 시적 영감과 열망이 영원할 것임을 암시합니다.

총평

이 시는 '가장 가까이 가고 싶으나 가장 멀리 서 있어야만 하는' 사랑의 모순을 다룹니다. 아흐마또바는 비명을 지르는 대신 차분하게 "우리는 마시지 않으리"라고 선언함으로써, 슬픔을 품위 있는 예술로 승화시켰습니다.

독자는 이 시를 통해 사랑의 완성이 반드시 '결합'에 있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절제와 그리움'을 통해 영원성을 획득할 수 있다는 가슴 시린 진실을 마주하게 됩니다.

매거진의 이전글여기 우리는 모두 난봉꾼, 매춘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