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는 지금 답답하고 울적하죠

by 안나 안드레예바 아흐마또바

by 김양훈

그대는 지금 답답하고 울적하죠

안나 아흐마또바


그대는 지금 답답하고 울적하죠

영예와 꿈을 거부했지만,

나에겐 어쩔 수 없이 사랑스러운 그대

침울할수록 나를 더 설레게 해요.


그대는 술을 마시고, 그대의 칙칙한 밤이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 못하죠.

그러나 그대의 고뇌 어린 초록빛 눈동자

술 속에서 안식을 찾지 못했죠.


심장은 어서 죽기만을 원해요,

운명의 더딤을 저주하면서.

서풍은 자꾸자꾸

그대의 비난, 그대의 애원을 실어와요.


과연 나는 감히 그대에게 돌아갈 수 있을까요?

내 고향의 창백한 하늘 아래서

나는 노래하고 추억할 줄밖에 모르지만,

그대는 절대로 나를 추억하지 마세요.


이렇게 세월은 슬픔을 키워가며 흘러가죠.

내가 그대 위해 신께 뭐라고 기도하면 좋을까요?

그대의 짐작대로, 내 사랑은 그런 것,

그대조차도 없앨 수 없었죠. (1917)


이명현 엮고 옮김. 러시아 현대대표 시선

『삶은 시작도 끝도 없다』(창비세계문학) 中

----

5월 독서과제 시선집 연재(30)


창작 배경과 시평
안나 아흐마토바의 1917년 작 「그대는 지금 답답하고 울적하죠」는 러시아 혁명의 광풍 속에서 개인의 비극과 시대의 고통이 어떻게 사랑이라는 실타래에 엉켜 있는지를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이 시의 창작 배경과 시평을 정리해 드립니다.

1. 창작 배경:

혁명의 불길과 이별의 전조

이 시가 쓰인 1917년은 러시아 역사의 거대한 분수령이었습니다.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나 제정 러시아가 붕괴하고 사회 전체가 혼란에 빠진 시기였습니다.

•시대적 고립: 당시 지식인과 예술가들은 조국을 떠나 망명하거나, 남아서 고통을 견뎌야 하는 선택의 기로에 서 있었습니다. 아흐마토바는 많은 동료가 망명을 선택할 때 끝까지 러시아에 남기로 결심했는데, 이 시는 그런 결단 뒤에 따르는 개인적인 상실감과 시대적 우울을 담고 있습니다.

•시적 대상: 시 속의 '그대'는 구체적으로 누구를 지칭하는지에 관해 여러 설이 있으나, 당시 아흐마토바의 주변 인물 혹은 혁명이라는 거대 서사 앞에서 무너져가는 러시아의 지식인 상(像)을 투영한 것으로 보입니다. 술에 의지하며 안식을 찾지 못하는 '그대'의 모습은 몰락하는 귀족 계급이나 구시대적 가치의 파멸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2. 시평:

절망의 끝에서 부르는 고결한 사랑의 노래

➀ 자기 파괴적 슬픔과 관찰자의 시선

시의 전반부에서 '그대'는 영예와 꿈을 거부한 채 술과 칙칙한 밤에 침잠해 있습니다. 아흐마토바는 이를 단순히 동정하는 것이 아니라 "침울할수록 나를 더 설레게 해요"라고 고백합니다. 이는 상대의 파멸마저도 사랑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초인적이며 탐미적인 애착을 보여줍니다. 초록빛 눈동자가 술 속에서 안식을 찾지 못한다는 묘사는 극한의 허무주의를 시각적으로 드러냅니다.

➁ 거리 두기와 귀환의 불가능성

"과연 나는 감히 그대에게 돌아갈 수 있을까요?"라는 질문은 단순히 물리적 거리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혁명으로 인해 변해버린 세상에서 과거의 순수했던 관계로는 결코 돌아갈 수 없다는 단절의 선언입니다. 화자는 자신을 "노래하고 추억할 줄밖에 모르는" 존재로 규정하며, 상대에게는 "나를 추억하지 말라"고 당부합니다. 이는 고통스러운 기억으로부터 상대를 해방하려는 역설적인 배려이자, 홀로 슬픔을 짊어지겠다는 비장한 태도입니다.

③ 신성해진 사랑의 영속성

마지막 연에서 화자는 이 고난과 슬픔이 세월과 함께 커질 것임을 직시합니다. 흥미로운 지점은 "그대조차도 없앨 수 없었죠"라는 대목입니다. 사랑의 대상인 '그대'마저도 화자의 사랑을 멈추게 할 권한이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사랑은 더 이상 두 사람 사이의 감정이 아니라, 화자가 신 앞에서 지켜내야 할 절대적인 가치가 됩니다.

3. 총평

이 시는 아흐마토바 특유의 '절제된 비애'가 돋보이는 작품입니다. 감정을 쏟아내기보다는 '창백한 하늘', '초록빛 눈동자', '서풍' 같은 구체적인 이미지를 통해 내면의 격랑을 차분히 가라앉힙니다.

이 작품은 1917년이라는 파국의 시대에 바치는 또 하나의 레퀴엠(진혼곡)이자, 세상이 무너져도 변하지 않는 인간의 본질적인 감정을 노래한 시입니다. "그대조차 없앨 수 없는 사랑"은 곧 어떠한 정치적 격변이나 역사적 비극도 인간의 영혼과 예술적 의지는 꺾을 수 없다는 아흐마토바의 선언과도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