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기

by 안나 안드레예브나 아흐마또바

by 김양훈

용기

안나 아흐마또바


우린 안다, 지금 무엇이 저울 위에 놓여 있으며

무슨 일이 지금 벌어지고 있는지.

우리의 시계가 용기의 시각을 알렸고,

용기는 우리를 버리지 않을 것이다.


죽음의 총탄 아래 쓰러지는 건 무섭지 않고,

집도 절도 없이 남는 건 슬프지 않다.

러시아어, 우리가 너를 보존하리니,

위대한 러시아 말을.


자유롭고 순결한 그대로 너를 이어 날라서,

자손들에게 전하고, 속박에서 영원히너를

구원하리라! (1942)


이명현 엮고 옮김. 러시아 현대대표 시선

『삶은 시작도 끝도 없다』(창비세계문학)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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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독서과제 시선집 연재(34)


Russian soldiers defend a barricade at Gatchina.
안나 아흐마또바의 시 「용기(Мужество)」는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거대한 비극 속에서 피어난 단단하고도 아름다운 저항의 목소리입니다. 이 시가 쓰인 1942년의 공기와 아흐마또바가 지키고자 했던 것이 무엇인지, 그 깊은 속내를 짚어보겠습니다.

1. 창작 배경:

봉쇄된 도시와 위기의 조국

이 시가 쓰인 1942년 2월은 소련(러시아) 역사상 가장 고통스러웠던 시기 중 하나입니다.

레닌그라드 봉쇄: 아흐마또바의 고향이자 영혼의 안식처인 레닌그라드는 당시 나치 독일에 의해 완전히 고립된 상태였습니다. 굶주림과 추위, 끊임없는 포격 속에서 수십만 명의 시민이 죽어가고 있었죠.

타슈켄트에서의 외침: 아흐마또바는 비행기로 간신히 레닌그라드를 탈출해 우즈베키스탄의 타슈켄트로 피난을 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마음은 여전히 사선을 넘나드는 동포들과 함께였고, 그 절박한 심정이 이 시를 탄생시켰습니다.

개인적 고통을 넘어선 공적 목소리: 이전까지 아흐마또바는 내밀한 사랑과 슬픔을 노래하는 시인으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하지만 전쟁은 그녀를 '러시아의 양심'이자 '민족의 목소리'로 변모시켰습니다. 그녀는 총칼 대신 언어를 통해 적과 맞서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Peoples Militia volunteers moving steadily to the front. Many of the volunteers were factory worker

2. 시평:

왜 '언어'가 최고의 용기인가

이 시는 단순한 전쟁 찬가나 선동 시가 아닙니다. 아흐마또바는 무엇이 진정으로 영원하며, 우리가 마지막까지 손에서 놓지 말아야 할 가치가 무엇인지 엄중하게 묻습니다.

죽음을 압도하는 담담함

첫 연에서 시인은 지금이 "용기의 시각"임을 선포합니다. "저울 위에 무엇이 놓여 있는지 안다"는 표현은 이 전쟁이 단순한 영토 전쟁이 아니라, 민족의 존립과 정신의 사멸이 걸린 절체절명의 순간임을 직시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물질적 상실 vs 정신적 보존

"죽음의 총탄 아래 쓰러지는 건 무섭지 않고,

집도 절도 없이 남는 건 슬프지 않다."

이 구절은 충격적일 만큼 단호합니다. 생명과 재산은 인간에게 가장 소중한 것이지만, 시인은 그것들이 '부차적인 것'이라고 말합니다. 육체는 죽을 수 있고 집은 무너질 수 있지만, 결코 파괴되어서는 안 될 핵심이 따로 있다는 논리입니다.

'러시아어'라는 최후의 보루

이 시의 백미는 후반부에 등장하는 러시아 말(Russian Word)에 대한 찬사입니다.

언어=민족의 영혼: 시인은 영토를 빼앗기는 것보다 무서운 것은 언어를 잃는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언어는 과거와 현재, 미래의 후손을 잇는 유일한 끈이기 때문입니다.

구원과 전승: "속박에서 영원히 너를 구원하리라"는 다짐은, 외세의 침략으로부터 러시아라는 국가를 지키는 것을 넘어, 러시아 문화와 정신의 순결함을 지켜내겠다는 시인의 예술가적 소명이 드러나는 대목입니다.

3. 총평: 시대를 이기는 고전의 힘

아흐마또바의 「용기」는 비단 1942년의 러시아인들만을 위한 시가 아닙니다.

"비극적인 상황에서도 인간이 품격을 잃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시인은 그 답을 '문화적 자부심'과 '역사적 책임감'에서 찾았습니다. 수많은 시인이 전쟁의 광기에 휩쓸려 거친 구호를 외칠 때, 아흐마또바는 오히려 가장 정제되고 순결한 언어로 '언어 그 자체'를 지키겠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녀의 이 짧고 강렬한 외침은 결국 총칼보다 오래 살아남아, 오늘날 우리에게도 진정한 용기란 소중한 가치를 끝까지 믿고 이어가는 힘임을 일깨워줍니다. 이 시는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 속에서도 인간의 정신이 얼마나 고결해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위대한 증거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Citizens flee as shells explode on Leningrad’s main street Nevsky Prospekt.
A pile of corpses awaits transport to a mass grave.
Citizens were so weak from starvation, that many did not have the strength to move the dead.
Supply trucks move across a frozen Lake Lagoda on a cold winter’s night.
레닌그라드 폭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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