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오시쁘 예밀리예비치 만젤시땀
침묵
오시쁘 만젤시땀
그녀는 아직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음악이요 또한 말,
그러므로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의
파괴할 수 없는 연결.
바다의 가슴은 평온히 숨 쉬지만
마치 광인처럼 날은 환하고,
검푸른 그릇 속에는
라일락빛 거품.
그래, 나의 입은
원초적 침묵을 얻으리라,
크리스탈 음(音)처럼
태어날 때부터 순결한 침묵을!
거품인 채 있으라, 아프로디테여,
말이여, 음악으로 되돌아가라,
가슴이여, 가슴을 부끄러워하라,
삶의 근원과 하나인 채!
이명현 엮고 옮김. 러시아 현대대표 시선
『삶은 시작도 끝도 없다』(창비세계문학)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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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독서과제 시선집 연재(38)
창작 배경과 시평
오시프 예밀리예비치 만델슈탐(Osip Emilyevich Mandelstam)의 시 「침묵(Silentium)」은 그의 초기 시 세계를 상징하는 작품 중 하나입니다. 이 시는 단순히 말이 없는 상태를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근원과 예술의 본질에 대한 깊은 성찰을 담고 있습니다. 이 작품의 창작 배경과 비평적 분석을 정리해 드립니다.
1. 창작 배경:
상징주의의 끝에서 아크메이즘으로
이 시는 1910년에 쓰였으며, 만델슈탐의 첫 시집인 『돌(Kamen)』(1913)에 수록되었습니다. 당시 러시아 문단은 두 시류 사이의 전환점에 있었습니다.
• 상징주의와의 대화: 19세기말 러시아를 지배했던 '상징주의'는 세상을 보이지 않는 형이상학적 세계의 그림자로 보았습니다. 만델슈탐 역시 초기에는 이 영향을 받았으나 점차 구체적이고 명징한 사물의 세계를 지향하게 됩니다.
• 튜체프의 「Silentium!」에 대한 오마주: 만델슈탐의 이 시는 러시아 서정시의 거장 표도르 튜체프의 같은 제목의 시 「Silentium!」을 직접적으로 의식하고 쓰였습니다. 튜체프가 "생각은 말로 표현되는 순간 거짓이 된다"며 내면으로의 침잠을 강조했다면, 만델슈탐은 '언어가 태어나기 전의 근원적인 조화'에 집중합니다.
• 음악과 로고스(Logos)의 결합: 만델슈탐은 시를 '건축물'처럼 견고하게 짓고자 했던 '아크메이즘(Acmeism)' 운동의 주역이었습니다. 그는 언어가 단순한 정보 전달 수단이 아니라, 음악적 순수성을 가진 '존재의 근원'이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2. 작품 평론:
존재의 자궁으로 되돌아가는 언어
① 태어나지 않은 것의 완벽함
"그녀는 아직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음악이요 또한 말"
시의 도입부에서 '그녀'는 아직 형체를 갖추지 않은 예술적 영감, 혹은 존재 그 자체를 의미합니다. 만델슈탐에게 가장 완벽한 상태는 무언가로 규정되기 전, 즉 음악과 말이 분리되지 않은 '태초의 상태'입니다. 일단 말로 뱉어지는 순간 본질은 훼손되기 때문에, 시인은 '아직 태어나지 않은 상태'의 역설적인 생명력을 예찬합니다.
② 아프로디테와 '거품'의 미학
"거품인 채 있으라, 아프로디테여,
말이여, 음악으로 되돌아가라"
그리스 신화에서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는 바다의 거품 속에서 태어났습니다. 만델슈탐은 여신이 완전한 육체를 갖춘 모습보다, 그 탄생 직전의 '거품' 상태로 남아있기를 갈망합니다.
• 거품: 형체가 생기기 전의 혼돈이자 모든 가능성을 품은 상태.
• 음악: 언어의 의미가 고정되기 전의 순수한 울림.
여기서 시인은 시를 쓰는 행위가 곧 '말'을 다시 '음악'으로 되돌려 보내는, 즉 존재의 근원으로 회귀시키는 작업임을 선언합니다.
③ 순결한 침묵과 크리스탈 음(音)
만델슈탐은 침묵을 단순히 '소리가 없는 상태'로 보지 않습니다. 그는 이를 '크리스탈 음'처럼 맑고 투명한 것으로 묘사합니다. 이는 시각적인 투명함과 청각적인 명료함이 결합된 이미지로, 아크메이즘 특유의 선명한 조형미를 보여줍니다. 시인은 타락한 일상의 언어가 아니라, 태어날 때부터 순결했던 그 원초적 에너지를 회복하고자 합니다.
3. 종합적 평가
만델슈탐의 「침묵」은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려는 시인의 고귀한 투쟁'을 보여줍니다.
보통 시인은 말을 만드는 사람이지만, 이 시 속의 시인은 말을 거부하고 그것을 다시 음악적 침묵으로 되돌려 보내려 합니다. 이는 역설적으로 세상의 모든 소음으로부터 예술의 순수성을 보호하려는 의지입니다.
이 작품은 만델슈탐이 이후 전개할 '언어의 건축학'을 예고하는 서시와도 같습니다. 그는 이 시를 통해 독자들에게 속삭입니다. 진정한 예술은 화려한 수식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삶의 근원과 하나가 된 채 고요히 숨 쉬는 '원초적 침묵' 속에 있다고 말이죠.
비평적 요점:
이 시는 '표현'의 도구인 언어를 사용하여 '비표현'의 상태인 침묵을 찬양하는 형이상학적 역설의 극치를 보여주며, 러시아 현대 시학에서 상징주의적 신비주의를 아크메이즘적 명징성으로 승화시킨 기념비적인 작품입니다.
"생각은 말로 표현되는 순간 거짓이 된다"
ㅡ 튜체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