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쎄르게이 알렉산드로비치 예세닌
사랑스러운 땅이여! 가슴은
쎄르게이 예세닌
사랑스러운 땅이여! 가슴은
강물에 젖은 태양의 낟가리를 꿈꾼다.
나는 너의 웅성거리는
녹음 속에 묻히고 싶다.
밭둑과 건초더미 따라 줄지어 선
물푸레나무와 토끼풀 승복,
버드나무는 온순한 여수도승처럼
낭랑하게 묵주를 찰랑인다.
늪이 피우는 구름담배
하늘에 널리 퍼진 탄 내음.
나는 누군가를 위한 은밀한 생각을
가슴속에 꼭꼭 숨겼다.
모든 걸 환영하고, 모든 걸 받아들이겠다.
내 마음 괴롭고 애타니 기쁘고 행복하구나.
내가 이 땅에 온 까닭은
오히려 이 땅을 버리고자 함이니. (1914)
이명현 엮고 옮김. 러시아 현대대표 시선
『삶은 시작도 끝도 없다』(창비세계문학)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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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독서과제 시선집 연재(54)
러시아의 자연과 영혼을 가장 순수하게 노래했던 '전원시인', 세르게이 예세닌(Sergei Yesenin)의 초기 작품입니다. 이 시는 그가 불과 19세였던 1914년에 쓰인 작품으로, 젊은 시인의 열정과 러시아적 영성이 응축되어 있습니다. 작품의 창작 배경과 시평을 정리해 드립니다.
1. 창작 배경:
"러시아의 들판에서 태어난 시심"
•농촌 공동체에 대한 애착: 예세닌은 러시아 랴잔주(州)의 평화로운 농촌 마을인 콘스탄티노보에서 태어났습니다. 1914년은 그가 고향을 떠나 모스크바에서 본격적으로 문학 활동을 시작하던 시기입니다. 도시의 소음 속에서 그는 고향의 대지와 자연을 향한 강렬한 향수를 시로 승화시켰습니다.
•범신론적 세계관과 종교성: 이 시기 예세닌의 작품에는 러시아 정교회의 이미지와 자연이 하나로 통합된 범신론적 정서가 짙게 깔려있습니다. 자연물을 '승복'이나 '묵주'에 비유하는 것은 그에게 자연이 곧 성전(聖殿)이었음을 보여줍니다.
•시대적 전조: 1914년은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해이기도 합니다. 파괴적인 전쟁의 기운이 감돌기 시작할 무렵, 시인은 오히려 가장 평화롭고 신성한 고향의 풍경을 노래하며 보존하고자 했습니다.
2. 시평:
"대지와의 합일, 그리고 이별의 역설"
자연에 입혀진 종교적 함의
이 시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자연을 의인화하는 방식입니다. 물푸레나무는 '승복'을 입고 있고, 버드나무는 '여수도승'이 되어 '묵주(이슬이나 나뭇잎 소리)'를 흔듭니다. 이는 자연을 단순한 풍경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신성한 존재로 경배하는 예세닌 특유의 시각입니다.
공감각적 심상과 신비주의
'강물에 젖은 태양의 낟가리'나 '늪이 피우는 구름담배' 같은 표현은 시각과 후각을 자극하며 독자를 환상적인 러시아의 들판으로 인도합니다. 특히 '탄 내음'과 '은밀한 생각'은 평화로운 풍경 뒤에 숨겨진 시인의 고독과 알 수 없는 불안, 혹은 어떤 결심을 암시하며 시의 층위를 깊게 만듭니다.
마지막 행의 역설: "버리고자 함이니"
가장 압권은 마지막 연입니다. 모든 것을 환영하고 받아들이겠다는 긍정의 끝에, 시인은 "이 땅을 버리고자 함"이라는 충격적인 역설을 던집니다.
이는 허무주의라기보다, 대지와의 완전한 합일을 의미합니다. 너무나 사랑하기에 그 속으로 녹아들어(매몰되어) 개체로서의 '나'를 지우겠다는 고도의 자기희생적 사랑입니다.
동시에, 아름다운 지상의 삶이 결국은 영적인 세계나 죽음으로 이어지는 통로임을 인식하는 젊은 시인의 직관이 돋보이는 대목입니다.
총평
이 시는 러시아의 토속적인 아름다움과 기독교적 영성이 결합된 수작입니다. 예세닌은 찬란한 자연의 이미지 속에 자신의 고통과 기쁨을 한데 녹여내며, 인간이 자연의 일부로 돌아가는 과정을 한 편의 기도문처럼 완성했습니다.
"내 마음 괴롭고 애타니 기쁘고 행복하구나"라는 구절처럼, 삶의 모순마저 사랑으로 안으려 했던 그의 순수한 영혼이 오늘날까지도 깊은 울림을 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