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이, 루시여, 내 고향이여

by 쎄르게이 알렉산드로비치 예세닌

by 김양훈

어이, 루시여¹, 내 고향이여

쎄르게이 예세닌


어이, 루시여, 내 고향이여,

오두막은 성상(聖像)처럼

-가사(袈裟)를 걸쳤구나…

끝도 없이 아득하여

푸른 빛깔만 두 눈에 사무친다.


타관에서 온 순례자인 양

나는 너의 들판을 바라본다.

나지막한 울타리 곁에는

찰랑대는 백양나무 초췌하다.


사과향 꿀 향기 은은하고

교회마다 너의 온화한 구세주 성화(聖畫).

원무(圓舞) 저편에는

초원에서 우리는 흥겨운 춤 소리.


초록빛 이랑들의 주름진 솔기 따라

나는 광활한 대지를 내달리련다.

처녀들의 웃음소리 나를 맞이하며

귀고리들처럼 찰랑거리겠지.


“루시를 버리고 낙원에서 살아라!”―

만일 그 옛날 성스러운 군대가 외친다면,

나는 말하리. “낙원은 필요 없으니

내 고향을 주시오.” (1914)


이명현 엮고 옮김. 러시아 현대대표 시선

『삶은 시작도 끝도 없다』(창비세계문학)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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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독서과제 시선집 연재(53)


러시아의 농촌 시인 세르게이 예세닌(Sergei Yesenin)의 초기 작품인 <어이, 루시여, 내 고향이여>는 그가 스무 살도 되기 전에 쓴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문학 세계를 관통하는 핵심적인 정서와 철학을 고스란히 담고 있습니다. 이 시의 창작 배경과 문학적 가치를 정리한 시평을 전해 드립니다.

1. 창작 배경:

'루시'를 향한 순결한 연가

이 시는 1914년에 쓰였습니다. 당시 러시아는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며 거대한 격변의 소용돌이 속에 있었고, 도시화와 산업화가 급격히 진행되던 시기였습니다.

•농촌 출신의 시인: 예세닌은 러시아 랴잔주의 시골 마을에서 태어난 '농민 시인'입니다. 그는 근대화되는 도시의 모습보다, 자신이 자란 농촌의 소박하고도 거룩한 풍경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습니다.

•'루시(Rus)'의 의미: 시에서 언급되는 '루시'는 현대 국가인 '러시아'와는 결이 다릅니다. 이는 고대 슬라브족의 정신적 고향이자, 서구화되지 않은 원형적 러시아를 뜻합니다.

•종교적 색채: 당시 예세닌은 농촌의 일상적 풍경을 종교적 성스러움으로 치환하는 방식을 즐겨 사용했습니다. 오두막을 성상에 비유하는 등의 표현은 그가 고향을 단순한 거주지가 아닌 '지상의 천국'으로 인식했음을 보여줍니다.


2. 시평:

대지와 영혼의 합일

① 일상의 성화화(聖畵化)

이 시의 가장 큰 특징은 농촌의 평범한 풍경을 종교적 숭고함으로 격상시킨 점입니다. "오두막은 성상처럼 가사를 걸쳤구나"라는 첫 대목은 집 한 채, 나무 한 그루조차 신성한 존재로 대하는 시인의 물활론(物活論)²적 세계관을 드러냅니다. 사과향과 꿀 향기가 가득한 들판은 곧 교회이자 성소가 됩니다.

② 감각적 이미지의 변주

예세닌은 시각과 후각, 청각을 절묘하게 배치합니다.

•시각: '푸른 빛깔', '초록빛 이랑'은 생명력과 영원함을 상징합니다.

•후각: '사과향과 꿀 향기'는 풍요로운 가을의 수확과 평화를 느끼게 합니다.

•청각: 처녀들의 웃음소리가 '귀고리처럼 찰랑거린다'라는 표현은 공감각적 심상의 극치를 보여주며, 고향의 활기찬 생동감을 전달합니다.

③ 낙원보다 고귀한 고향

가장 압권은 마지막 연입니다. 신의 군대가 "낙원에서 살라"고 제안함에도 불구하고, 시인은 단호하게 "낙원은 필요 없으니 내 고향을 주시오"라고 외칩니다. 이는 관념적인 천국보다 눈앞에 보이는 비루하고 초췌한 고향의 흙냄새를 사랑하겠다는 선언입니다.

이러한 '지상적 낙원주의'는 예세닌 문학의 핵심입니다. 그는 고통받고 가난한 러시아의 현실조차 그 자체로 성스러운 가치가 있다고 믿었습니다.

3. 문학사적 의의

이 시는 훗날 볼셰비키 혁명을 거치며 전통적인 러시아의 모습이 파괴될 때, 예세닌이 느꼈던 깊은 상실감의 뿌리를 이해하게 해주는 작품입니다.

결론적으로, 이 작품은 고향에 대한 단순한 향수를 넘어, 인간의 영혼이 뿌리내릴 곳은 추상적인 구원이 아니라 자신이 나고 자란 대지라는 사실을 아름다운 서정으로 노래한 수작입니다.

러시아인들이 왜 그토록 예세닌을 '가장 러시아적인 시인'으로 사랑하는지, 이 시의 마지막 구절만으로도 충분히 설명됩니다.


[註1]

'루시(Rus, Русь)'
Kyivan Rus’ Київська Русь

'루시(Rus, Русь)'는 단순한 지리학적 명칭을 넘어, 러시아인의 심상 속에 깊이 뿌리 박힌 역사적·정신적·종교적 원형을 상징하는 단어입니다. 현대 국가 체제를 뜻하는 '러시아(Rossiya)'가 제도적이고 정치적인 느낌을 준다면, '루시'는 훨씬 더 시적이고 본질적인 가치를 지닙니다. 그 의미를 세 가지 핵심 층위로 나누어 설명해 드립니다.

1. 역사적 기원: 러시아의 뿌리, '키예프 루시'

'루시'라는 명칭은 9세기경 동슬라브족이 세운 최초의 국가인 '키예프 루시(Kyivan Rus')'에서 기원합니다.

이는 러시아, 벨라루스, 우크라이나 삼국의 공통된 조상 국가를 일컫습니다.

따라서 예세닌과 같은 시인들에게 루시는 현대의 국경선이 생기기 이전, 슬라브 민족이 하나로 묶여 있던 태고의 순수함을 상징합니다.

2. 종교적 가치: '성스러운 루시(Svyataya Rus)'

러시아 정교회 전통에서 루시는 '성스러운 루시'로 불립니다.

•신앙의 공동체: 여기서 루시는 단순히 영토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정교회 신앙으로 결속된 영적인 공동체를 의미합니다.

•고난과 구원: 러시아인들은 루시를 외적의 침입과 고난 속에서도 신앙을 지켜내며 종말론적 구원을 기다리는 '선택받은 땅'으로 여겼습니다. 예세닌의 시에서 오두막이 성상처럼 느껴지고 들판이 교회처럼 묘사되는 이유도 바로 이 루시의 성스러움 때문입니다.

3. 정서적·문화적 원형: '농촌 공동체'와 '대지'

예세닌을 비롯한 많은 작가에게 루시는 도시화와 산업화로 파괴되기 전의 원형적 농촌 풍경을 뜻합니다.

•어머니 같은 대지: 루시는 종종 '어머니 루시(Matushka Rus)'로 의인화됩니다. 이는 끝없이 펼쳐진 자작나무 숲, 광활한 대지, 소박한 마을 공동체를 모두 아우르는 개념입니다.

•반(反)도시적 정서: 서구적 합리주의와 세련된 도시 문화에 대비되는, 투박하지만 따뜻하고 신비로운 러시아의 본질을 루시라는 단어에 담았습니다.

요약하자면

예세닌이 시에서 "낙원은 필요 없으니 내 고향(루시)을 주시오"라고 말할 때, 그가 요구한 것은 단순히 자신이 태어난 행정 구역이 아닙니다. 그것은 성스러운 신앙이 살아있고, 민족의 태고적 순수함이 보존되어 있으며, 자연과 인간이 분리되지 않은 채 공존하는 '영혼의 안식처'를 돌려달라는 외침입니다.

그에게 루시는 눈에 보이는 영토인 동시에, 잃어버려서는 안 될 러시아적 영혼의 정수 그 자체였습니다.


[註2]

물활론 (物活論 / Hylozoism)

1. 개념 정의

만물(그리스어: hyle)이 생명(zoe)을 가지고 있다는 철학적 견해입니다. 물질과 생명을 분리된 것으로 보지 않고,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바위, 강, 나무 등)이 살아 있거나 그 안에 영혼(Psyche) 또는 정신적인 힘이 깃들어 있다고 믿는 사상입니다.

2. 철학적 배경

•고대 그리스: 탈레스(Thales)가 "모든 것은 신들로 가득 차 있다"고 말하며 자석의 자성을 영혼의 증거로 본 것에서 유래했습니다.

•근대와 낭만주의: 기계론적 세계관(세상을 정교한 시계 부속처럼 보는 시각)에 반대하여, 자연을 하나의 거대한 유기체로 보려는 예술가와 철학자들에 의해 계승되었습니다.

3. 문학적 형상화 (예세닌의 경우)

세르게이 예세닌의 시 세계에서 물활론은 단순한 수사가 아닌 '대지와의 영적인 교감'을 의미합니다.

•사물의 의인화: 나무가 말을 하거나, 오두막이 옷을 입고, 달이 들판을 가로지르는 등의 묘사는 사물을 죽어 있는 객체로 보지 않고 인간과 동등한 '생명적 주체'로 대우하는 물활론적 태도에서 비롯됩니다.

•범신론적 연결: 인간의 감정과 자연의 변화가 하나로 얽혀 있다고 믿으며, 고향의 풍경 자체를 신성이 깃든 성소(聖所)로 인식하게 만듭니다.

4. 현대적 의의

오늘날 물활론은 인간이 자연을 정복의 대상으로만 보았던 근대적 사고에서 벗어나, 자연과의 공존과 생태적 감수성을 회복하려는 담론에서 중요한 철학적 토대로 재조명받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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